"486? 당신 월급이 그쯤 되나 보죠?"

[변방의 사색] 김예슬의 <김예슬 선언>

경성제대 예과에 다니던 한 조선인 학생이 버스 안에서 여차장에게 '고것 참 예쁜데' 하고 농담을 했는데, 운전사와 차장이 합세하여 '경성제대에 다니면 제일이냐, 버릇 좀 고쳐야겠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다. 이 소문이 예과에 퍼지자 순식간에 60여 명의 조선인 예과 학생이 모여 당시 운전사와 차장들의 합숙소가 있는 청량리 역전으로 몰려가 몽둥이와 돌멩이로 숙소를 완전히 때려 부쉈다. (<입시 전쟁 잔혹사>(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48쪽)

이런 시절도 있었다. 대학생들이 두르고 다니던 망토가 벼슬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과 80년 뒤 바로 그 경성제대생의 후배들은 졸업의 자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다고(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결국 그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된다면서.

대학생이 오늘날처럼 가련하게 살았던 시절은 유사 이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10년 초 이른바 '김예슬 선언'으로부터 올해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카이스트(KAIST)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그리고 얼마 전 반값 등록금 촛불 집회에 이르기까지 뭔가 사태의 핵심을 건드리는 사안들은 이어지지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88만 원 세대니, G세대니, 실크로드 세대니 하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시도도 맹렬하고, 그들을 광장으로 끄집어내려는 선배들의 호소도 이어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꿈쩍도 않는 것 같다.

반값 등록금 촛불 집회가 제법 불이 붙을 때 한 칼럼니스트는 "촛불 집회가 놀라운 게 아니라, 그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그게 놀랍다"고 했는데, 그나마 일어난 촛불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카이스트 사태 때, 나는 그래도 그 형편없는 총장이라는 자가 끌어내려지거나, '안습' 그 자체인 카이스트의 학사 제도 중에 몇 가지라도 뿌리 뽑히길 기대했는데, 그마저도 요지부동이었다.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은 끔찍하리만치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486세대가 '너희들 왜 그렇게 사냐?'고 채근하면 '486? 당신 월급이 그쯤 되나 보죠?'라며 시크하게 답할 것 같다.

▲ <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김예슬 지음, 느린걸음 펴냄). ⓒ느린걸음
그러나 대학생을 탓하는 이야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정치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올바르지 않다. 그들의 가능성을 부인하고서 무슨 변화를 꿈꿀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현실은 기실 486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만들지 않았느냐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학 문제를 둘러싼 가십거리들은 풍성한데, 의미 있는 논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다들 하나마나한 소리("왜 짱돌을 들지 않니?")나 듣기 좋은 소리("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만 주절거릴 뿐이다. 정치인들은 "집권하면 등록금 깎아줄게" 따위 이야기뿐이고.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프레시안>에도 소개된 바 있는 격월간 <오늘의 교육>(교육공동체 '벗' 펴냄)의 '대학의 교육 불가능' 특집과 <김예슬 선언>(김예슬 지음, 느린걸음 펴냄)을 통해 이 문제의 얼개를 대략이나마 정리해 보고 싶다.

대학이 아니라 포주다

<오늘의 교육> 특집에는 대학생 및 대학원생 필자들이 자기가 겪은 일들을 들려주고 있다.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글을 읽고 나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두산그룹의 중앙대학교 인수 이후 벌어진 일들과 그에 맞선 싸움의 여정을 그린 중앙대생 노영수의 글은 대학과 기업의 불륜 현장을 급습한 듯 적나라하다. 물론 그들은 들켜도 태연하게 하던 행위를 계속 하겠지만.

중앙대 구조 조정에 반대하는 고공 농성에 대해 "나는 눈이 작아서 농성장이 잘 안 보인다"고 한 박용성 이사장의 조크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되돌려줄 날이 오지 않겠는가. 중앙대 동문 변호사들이 퇴학생 후배들의 소송을 돕겠다고 하자 "그들을 도우면 고시반에 대한 지원을 줄이겠다"는 대학 당국의 엄포에는 '개콘 유치원 잎새반 어린이'도 상상할 수 없을 '쩌는 위엄'이 서려 있다. 두산중공업 대리가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 관련 동향 보고'라는 문건을 소지한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도, 중앙대 퇴학생들이 두산중공업 노조와 연대하는 일도 의미심장하다. '노학 연대'의 새로운 전형이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 등록금이 475만 원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대학원은 수업이라는 게 별로 없을 텐데, 한 학기에 475만 원을 받아 가면 대체 한 시간 수업이 얼마짜리라는 얘긴가. 알바하느라 친구 사귀는 것도 포기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피곤에 전 몸으로 심야에 과제를 시작하는 덕성여대생 서유정의 글은 마음이 아파서 한 번에 다 읽어내기가 어렵다. 이쯤하면 오늘날 대학이란 <프레시안> 손문상 화백의 만평이 날카롭게 적시하듯 '대학이 아니라 포주'다. <오늘의 교육> 특집 필자들은 여학생들이 많고, 그들의 글에는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 잦다. 그저, 눈물로써 버텨내는 현실이 아닌가.

'청년학도'라는 허위의식보다 지금이 낫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청년학도'라고 지칭했는데, 나는 이 표현이 거슬렸다. 그들은 '우리가 한국 사회를 책임진다'는 책임 의식에 '들려' 있었던 게 분명하다. '왜 대학생이 사회를 떠메고 가야하지?', 막연하게나마 나는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다. 내가 1학년 때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는 연설하다가 흥분하면 허공을 향해 장하게 목을 꺾으며 '청년 학도여~' 하며 벼락처럼 울부짖었는데(그 인간은 지금 뉴라이트의 앞잡이가 되어 MBC에서 한자리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느냐고? 그러니까 나는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이 어두움이 차라리 진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따위 이야기는 참 듣기 고약하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대학다웠던 시절이 언제 있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내가 다니던 그 시절에도 강의에서 배울 것은 없었다. 다만, 최루탄 냄새 맡으며 거리에서, 어둑한 빈 강의실 세미나에서, 혹은 막걸리 집에서, 야학 교실과 물컹한 논바닥에서 세상과 노동을 배웠을 따름이다.

오늘날 대학의 위기란 학문 공동체의 추락도, 인문학의 위기도, 당연히 아니다. 그 시절과 지금의 차이란, 그렇게 데모하고 다녀도, 룸펜으로 살아도 어쨌든 '취직'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살려고 마음먹는 순간 이 체제로부터 '제명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 무리의 학자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인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늘 위기였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인 것은 자신들에게 돌아갈 연구비가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예슬 선언>에서 김예슬이 지적하듯, 그들은 그렇게 확보한 노동자 서민들의 세금으로 무얼 해 왔는지, 그 연구 성과란 것이 시대의 어두움을 얼마나 밝혀냈는지, 인문학자들 자신의 삶은 이 연구를 통해 얼마나 변해왔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다만 '돈을 달라'는 것이었고, 국가와 자본은 <오늘의 교육>에서 교육학자 정용주가 지적하듯 국가 인문학과 기업 인문학으로,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로 인문학을 진화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대학생들이 자본주의 계층 구조의 가장 낮은 곳, 산업 예비군과 다름없는 자리에 처하게 된 지금 이 상황이 이 당대 현실의 실체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게 된, 다른 의미에서 진짜 '공부'가 가능해진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공통의 지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대학과 대학생의 문제가 지금 제대로 '문제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의 교육>에서 엄기호가 던지는 물음, '무엇이 동시대성의 형성을 방해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환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예슬이 강렬한 퍼포먼스로써 이 체제를 들이받아도, 카이스트 학생이 연이어 다섯 명이나 목숨을 끊어도, 천문학적 등록금이 멈추지 않고 올라도 이 계기들이 동시대적 문제로써 대학생 스스로를 엮어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김예슬의 퇴교 선언은 대번 이러한 반응에 부딪쳤다. '대학이 죽었다고? 그걸 김예슬만 몰랐나?', '고대 경영학과나 되니 주목받지, 이미 오래전부터 대학생들은 소리 없이 대학을 떠나고 있었거든' 이런 식이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이후 엄기호는 덕성여대, 연세대 원주캠퍼스 그리고 상지대 학생들과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자살한 카이스트 학생들이 그들의 '동료'에서 그저 '동시대인'으로, 더 흐릿한 동시대인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증언한다. 그것은 이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권도, 발언에 대한 사회적 주목도 '1등에게 부여되는 특혜'일 뿐이라는 서글픈 진실이다. 김예슬은 고대 경영대를 그만두어도 고대 경영대 자퇴생이며, 카이스트 학생은 죽어도 카이스트 출신인 것이다.

엄기호의 지적에서 새겨들어야할 것은 이것이다. 고대 경영대를 자퇴한 김예슬이든, 징벌적 등록금으로 600만 원을 납부한 카이스트 학생이든, 진종일 이어지는 알바로 피곤에 절어 울면서 과제를 하는 덕성여대생이든, '팔려가기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는 심적 고통으로 선배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서울대생이든, 그들은 이 체제가 아로새긴 분명한 상처가 있음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똑같은 투명인간이며, 유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위기란, 혹은 대학생의 삶의 위기란, 유령이 유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투명인간이 투명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사회를 향해 던질 의제에는 어떤 것이 있나?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 보이콧과 불복종 운동, 등록금 투쟁, 정당과의 연대, 모두 소중하고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통의 지반이 필요하다. 하나는 반값 등록금이든, 무상 교육이든, 대학 평준화든 그것이 실현되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이제 사실상 '깡통 계좌'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다.

또 하나, 오늘날 이 현실을 가능케한 것은 '도시 중산층의 삶에 대한 희구'일진대, 이것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타산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안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공부는 왜 하는가? '편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예슬이 그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한 대목을 음미해보자. 주인공 존이 말한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詩)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를 요구하겠지?"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은 가치의 투쟁인 것이다. 김예슬이 호소하듯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 불행해질 권리에 대해, 안락한 삶을 거부하는 정신의 공동체에 대해, 다른 삶에 대한 갈망과 정직한 에로스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가치의 투쟁이 오늘날 이 들끓는 청춘들의 고통과 만날 때, 그때서야 변혁은 폭발할 것이다. 희망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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