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머런, 'EU탈퇴 국민투표' 공약 거센 역풍

[분석]"총선 승리 위해 나라와 유럽 운명 거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마침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안건을 차기 총선 공약으로 공식 발표했다.

캐머런 총리는 23일 "앞으로 EU조약을 영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는 재협상을 추진할 것이며, 그 협상 결과를 가지고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2017년까지 시행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2017년 말까지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내에서 상당한 유권자들이 EU 탈퇴를 원한다는 여론을 내세워 EU가 영국의 입장을 고려해 EU조약의 재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브렉시트(Brexit)'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장을 EU에 보낸 것이다.
▲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3일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2017년말까지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

"캐머런의 공약, EU조약 협상 압박 카드"

하지만 EU 주요 회원국들은 물론, 미국 등 외국의 반응은 격렬한 비난에서부터 냉소와 간곡한 만류 등 반대 일색이다. 영국 내에서도 "캐머런의 제안은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영국은 EU회원국이지만 유로존 가입은 거부하고, EU가 경제공동시장을 넘어 그 이상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 수준을 높이는 것을 반대해 왔다.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로 파운드라는 독자적 화폐를 갖고 있는 이점을 누리면서 EU 공동시장의 혜택은 누리겠다는 것이다.

EU의 양대 경제대국인 프랑스와 독일이 즉각 "EU가 무슨 주문형 식단 메뉴냐", "영국은 체리 피커냐"는 등 맹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런 영국의 행태를 얄밉게 보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들은 대체로 캐머런 총리의 'EU 탈퇴 국민투표' 카드가 EU에 대해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보다는 국내 정치적인 용도에 가깝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캐머런 총리는 'EU 탈퇴 국민투표' 공약을 내걸면서도 영국이 EU의 주요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앞으로 이런 소신을 EU회의론자들에게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캐머런 총리는 EU조약 재협상에 무게를 두고 'EU 탈퇴 국민투표'는 당내의 압박을 비켜가면서 EU조약 재협상의 동력을 얻으려는 대내외적인 전술 카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익이 아니라 당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총리"

캐머런 총리 자신은 EU를 탈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면서도 'EU탈퇴 국민투표'라는 공약을 내건 배경에는 당내 사정도 있다.

집권 보수당 내에서 대부분의 의원들이 EU조약에 대한 재협상을 해야 하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EU에서 영국이 탈퇴해야 한다고 캐머런 총리를 압박하고 있어, 자신의 당권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야당인 노동당의 에드 밀리밴드 대표는 "캐머런은 국익이 아닌 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나약한 총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맹비난했다.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의 대표로 부총리를 맡고 있는 닉 클레그도 "EU와 어떻게 협상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내놓지 않고 몇 년에 걸친 불확실성만 키운 이런 공약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자민당은 영국이 EU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입장이고, 캐머런 총리는 "공약에 반대하는 당과는 연정을 하지 않겠다"고 밝혀, 차기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한다면 자민당과의 연정 파트너 관계는 청산하게 된다.

캐머런이 정말 노리는 것은 EU조약이 영국에게 보다 유리하게 개정되면서도 총선에서 승리하고 국민투표는 부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국민투표 결과 EU 탈퇴를 선택한 국민이 많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편도'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전형적인 최후통첩성 공약이다.

"자기 머리에 총 겨누며, 떼쓰는 격"

하지만 'EU탈퇴 국민투표'가 정치적 승부수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조차 회의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자신의 정치적 노림수를 위해 영국과 유럽의 운명까지 걸었다는 점에서 도박적 공약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BBC> 인터뷰에서 "캐머런의 제안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쏠거야'라고 협박하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캐머런의 의도가 성공을 거둘 가능성에 회의적인 전망이 대부분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캐머런의 희망이 이뤄질 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캐머런 총리가 영국 근대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도박적인 카드를 던졌지만, 그가 도박에서 이길 것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따.

EU의 지도국이라고 할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존 위기 해결과 EU통합 가속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적극적인 협조도 하지 않는 영국의 불평을 들어줄 의향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입장에 미묘한 차이는 있다. 프랑스는 영국의 EU 탈퇴 협박에 어이없다는 반응이지만, 독일은 EU의 맏형답게 "공평한 지점을 찾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 입장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공동 재정정책부터 확고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면서 "진지하게 대화해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도 "다른 회원국들의 입장도 있다"고 강조한 만큼 그의 '대화 제의'는 외교적 수사에 가깝다.

EU탈퇴 희망 여론, 급감

금융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차기 총선에서 집권 보수당이 패배하면 '없던 얘기'가 될 것이고, 국민투표가 시행된다고 해도 4~5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재계에서는 'EU 탈퇴 국민투표'라는 공약이 초래하는 불확실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세계 최대 광고그룹 WPP 회장으로 광고업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마틴 소렐 경은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시행이 된다고 해도 5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이런 공약은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영국 국민의 여론도 시간이 갈수록 현실론으로 기울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의 여론조사업체 유고브의 조사에 따르면, EU에서 탈퇴하길 희망하는 국민은 지난 11월 51%에서 지난주 조사에서 34%로 급감했으며, EU 잔류를 원하는 국민은 40%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현실론의 배경에는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손해본다고 여길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탈퇴하는 것은 영국이나 EU에게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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