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해서 성희롱? 26년 외교관 인생이 한순간에…"

박병환 전 이르쿠츠크 총영사의 사연 들어보니

26년 경력의 베테랑 외교관 박병환 러시아 이르쿠츠크 총영사는 임지에 부임한 바로 다음 날인 지난 10월 10일, 한국 민간 의료기관 관계자들과 러시아 지방정부 공무원들이 만나는 만찬 모임에 참석했다. 한국 의료관광에 러시아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설명회가 있은 뒤 러시아 측 공무원들을 접대하기 위한 자리였다. 본부(외교통상부)의 사전 연락이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꼭 참석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민간 활동을 돕자는 취지에서 만찬에 나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모임은 원만하게 끝났다.

그런데 다음날 그에게 난데없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외교부 차관이 전화를 걸어와 "당신 김형오 의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다그친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전날 만찬 모임 진행에 불만을 품은 한 병원 이사장이 서울의 김형오 의원(한나라당, 전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했고, 김 의원이 외교부 장관에게 불만을 표한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김형오 의원이 러시아에서 생긴 일에 대해 불만을 표하다니, 참 희한한 일이었다. 경위야 어찌 됐건, 본부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니 박병환 총영사는 바로 그 병원 이사장에게 유감을 표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나서 열흘 쯤 지난 후 이번엔 서울신문이 '만취 러시아 주재 총영사 추태' 라는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당시 만찬 모임에 참석했던 익명의 병원 관계자들을 인용한 보도였다. '만취'에 '추태'라니, 박 총영사로서는 날벼락이었다. 바로 다음 날 그는 본부에 제출한 소명서에서 그 기사는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소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기사가 나간 후 닷새 만에 보직 해임되어 서울로 소환됐다. 총영사 부임 17일만이었다. 외교관 생활 26년 만에 일생일대의 치욕을 당한 셈이었다.

외교부는 이 사태에 대한 별도의 자체 진상 규명도 하지 않은 채 이같은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서울신문 보도를 사실상 전부 진실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박 총영사는 당시 만찬 모임에 참석했던 23명의 대표단원 중 18명(나머지 5명은 박 총영사 본인, 서울신문에 대한 제보자로 추정되는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 및 자생한방병원 직원 1명, 관광공사 직원 2명)에게 일일이 확인서를 받아냈다. 이들은 서울신문이 보도한 그날 모임에 '고함' '반말' '성희롱'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결같이 증언했다. 특히 서울신문에서 박 총영사의 '추태'를 증언한 것으로 보도된 익명의 관계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서울신문 측의 질문을 받았으나 그런 일이 없다고 답변했음에도 그런 보도가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신문 측은 자신들의 보도가 정확하다며 정정 보도를 외면하고 있다. 외교부 장관은 박 총영사가 법정 소송을 해서 진실 규명을 해오면 그때 구제해 주겠다며 야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 총영사는 지난 11월 서울신문을 상대로 명예훼손(형사) 및 정정 보도(민사)를 요구하는 소송을 내고 법적 투쟁에 들어갔다. 일단 소송에 들어가면 최소한 몇 달은 지나야 판가름이 날 터. 그는 자신이 당한 인사 조치가 너무도 억울하다며 <프레시안>을 찾았다. 그는 "언론의 일방적이고 부정확한 보도를 바탕으로 이런 식의 인사 조치를 한다면 앞으로 어떤 외교관이 소신 있는 활동을 펼치겠느냐"며 잘못된 인사 조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 이번 사태의 전말을 짚어본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다.


▲ 박병환 전 러시아 이르쿠츠크 주재 총영사 ⓒ프레시안(김봉규)

"하루 아침에 파렴치한으로"

프레시안 : 10월 10일 만찬 상황을 설명해 달라.

박병환 : 총영사 발령을 받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게 10월 9일 새벽이었다. 한국에서 온 의료관광 대표단은 그날 아침 도착 예정이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한국관광공사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이 미리 도착해 우리 총영사관에 통역 요원 지원과 세부 행사 참석을 요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민간인들이 오면 본부(외교부)에서 지시가 온다. 어떤 도움을 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경우가 있고, 특별한 도움은 필요 없으니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의료관광 대표단이 오는 것에 대해서는 본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총영사가 얼굴만 비춰도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러관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전이 있었고, 총영사로 처음 부임했고 해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에 의료관광 대표단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10일 오전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의료관광 설명회가 열렸다. 나도 그 자리에 30~4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왔다. 관광공사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이 저녁 만찬에도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꼭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국장급, 부국장급이 포함된 러시아 지방정부 공무원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대표단에서 한국인 중에서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관광공사 지사장 밖에 없어서 의사 소통도 도울 겸 총영사관 전 직원 6명이 만찬에 참석했다.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설명회 만찬이라고 했는데, 오전 설명회 때 참석했던 러시아 지방정부 공무원들을 접대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저녁 식사일 뿐이었다.

만찬은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저녁 8시에 시작됐다. 러시아 공무원들하고 그런 자리를 가지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일어나 2~3분 정도 부담 없는 덕담을 하는 게 관례다. 관광공사 지사장이 사회를 봤고, 러시아 측과 한국 측이 번갈아 가며 발언을 했다.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에게 건배사를 하도록 제의했다. 그때 내가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도 여성분이 말하는 게 어떠냐"라는 제안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러시아 공무원 일행이 2명을 제외하고는 다 여성들이었다. 그때까지 러시아 측에서는 여성들만 건배사를 했는데 우리 측에서는 남자들만 했다. 우리 측 대표단은 의사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다 남자였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도 여성이 한 번은 발언을 하는 게 어떠냐는 취지로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자가 그냥 신 이사장을 시키자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러시아 공무원들은 대부분 교외에 살고 있어서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 이사장의 발언이 길어졌고 통역까지 하다 보니 더 길어져서 내가 신 이사장께 "짧게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게 전부다. 모욕적인 말도 아니었고, 행사 진행을 위해 한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 이사장은 자신의 건배사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고 준비도 해온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만찬이 끝나고 신 이사장이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의 심모 서비스관리실장,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의 안모 교수, 순천향대 부천병원 최모 건진팀장이 김 의원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 그리고 다음 날 김형오 의원이 김성환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그 후 민동석 외교부 차관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민 차관은 대뜸 "박 총영사, 김형오 의원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라고 말했다. 사실 관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는 김형오 의원이 이르쿠츠크에 온 적도 없고, 신 이사장이 김 의원한테 전화를 했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민 차관이 어쨌든 수습을 하라고 지시했다.

황당한 생각에 뭐가 문제였는지 관광공사 이르쿠츠크 지사장과 한국 대표단장인 미즈메디병원 노모 이사장한테 물어봤다. 그랬더니 신 이사장이 나 때문에 기분 나빠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신 이사장에게 직접 가서 오해가 있었고 어쨌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본부에 경위를 보고했는데 '별 일은 아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경고 조치를 내리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10월 21일자 서울신문에 '만취 러시아 주재 총영사 추태'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워지면서 10월 26일자로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29일 서울에 도착했고 지금은 대기발령 상태다. 내가 책임을 뒤집어 쓴 건데, 나는 이번 일로 해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가 됐다. 11월 4일 김성환 장관을 면담했고, 11월 18일 서울신문사를 상대로 고소를 했고,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청구도 냈다.

프레시안 : 외교부의 별도 조사는 없었던 건가?

박병환 : 서울신문 기사가 난 하루 뒤인 22일 내가 소명서를 낸 게 전부다. 별도의 절차는 없었다. 외교부 감사관실도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외교부가 자체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조사를 할 경우 장관의 소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기모순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외교부 감사관실에 따로 감사를 지시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서울로 와서 11월 4일 장관을 찾아뵈었다. 장관은 나에게 '미안하다. 과도한 조치라는 걸 알지만 당시 상황에서 외교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나에 대한 신문 보도는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장의 음주 교통사고, 또 다른 공관의 공금 횡령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나온 것이었다. 두 사건 모두 외교부 소속 사람들이 한 건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다 외교관들의 문제로 비쳐진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나에 대해서도 소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장관의 설명이라고 본다.

내가 장관한테 서울신문을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정정 보도를 받아내면 문제를 풀어주겠다고 했다. 결국 장관 메시지의 요지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외교부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교부가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진실을 규명해오면 원상 회복을 해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김성환 장관은 또 당시 청와대 인사비서관실 쪽에서 압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도 했다. 청와대 인사라인의 분위기에 장관 본인이 화가 났었다는 의미도 있었고, 부담을 느꼈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장관은 해외 공관의 문제에 대해 불관용 원칙을 선언하고, 그런 모양새를 갖춰서 언론과 청와대에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소환 명령 자체는 징계가 아니지 않나?

박병환 : 형식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10월 9일 부임하고 17일 후에 소환됐다. 점잖게 얘기하면 보직 해임이고 더 나가면 직위 해제인데, 실질적으로 보자면 최고 수준의 징계다.

프레시안 : 서울신문 쪽은 만나 봤나?

박병환 : 서울신문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을 만났다. 서울신문 측은 10월 10일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한테 전화를 다 해봤더니 자기네 기사 내용과 같은 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신문이 취재했다는 세 사람은 기자들의 전화를 받았을 때 신준식 이사장의 주장을 부정했다고 한다. 내가 당시 참석자 20명(러시아 지방정부 공무원 2명 포함)한테 받은 확인서를 보면 된다. 거기 진상이 다 나와 있다. <프레시안>에서 그 사람들에게 별도로 확인을 해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 서울신문 측은 자신들이 허위 보도를 함으로써 원인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신문은 신준식 이사장이 아니라 경찰 쪽 정보보고를 보고 취재를 해서 기사를 썼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서울신문하고 신 이사장은 지금 서로 교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신 이사장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 변호사를 선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프레시안 : 김형오 의원은 만났나?

박병환 : 만나려고 갔는데 그날이 하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통과되던 11월 22일이어서 보좌관만 만나고 왔다. 나중에 보좌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고소장에서 김 의원의 이름을 빼달라고 하더라. 그러나 나는 이번 일의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김 의원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름을 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보좌관을 통해 면담을 신청했지만 매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회피했다. 신 이사장이 이르쿠츠크에서 김 의원한테 전화를 걸었던 시점은 한국 시간으로 한밤중이다. 상당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그 시간에 전화를 걸기 힘들었을 것이다.

"목표는 오직 명예회복…물러설 수 없어"

프레시안 : 진상이 밝혀질 경우 원상 복귀 가능성은 있나?

박병환 : 정년이 길어야 5년 남았다. 5년을 다 채우든 1~2년만 더 하든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점은 언제 그만두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공무원 생활을 졸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소한 일로 모함을 받았다.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 내가 이러는 것은 오직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인사 문제 해결은 명예회복의 결과로 주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적당히 다른 자리로 발령이 난다고 해도 명예회복은 별개의 문제다. 파렴치한으로 낙인 찍혔으니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 볼 낯이 없다. 죽마고우들이야 나를 이해해 주지만, 거기만 벗어나면 '기사는 약간 과장됐겠지만 그래도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명예가 회복돼도 이미 상처는 났다.

상당수의 외교부 동료들이 공감하고 있듯이, 이렇게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모함을 하고 그걸로 외교관들이 소환되는 일이 되풀이되면 해외 공관에 나가있는 외교관 중 몇 사람이나 살아남겠나. 외교관으로서 주재국을 상대로 한 본연의 업무는 제쳐두고 서울에서 오는 사람 하나하나에 비위나 맞춰야 하고, 그걸 잘 못하면 자리보전이 어렵게 될 것이다. 자기의 일에 의욕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할 수가 없는 환경이 될 것이다. 내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철저히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박병환 총영사 관련 일지

10.9 박병환 러시아 이르쿠츠크 총영사 부임
10.10 의료관광 유치 설명회 및 만찬. 신준식 이사장, 김형오 의원에게 전화
10.11 박병환, 신준식 찾아가 유감 표명
10.21 서울신문 '만취 러시아 주재 총영사 추태' 기사 발행
10.26 외교부 장관 보직 해임 명령
10.29 박병환 귀국 후 대기발령중
11.4 박병환, 김성환 외교부 장관 면담
11.18 박병환, 서울신문 편집국장.사회부장.기자2명 상대 명예훼손 고소(형사) 및 정정보도·손해배상 청구(민사)


* 서울신문의 보도 내용, 만찬 참석자들의 증언에 관해서는 본 기사 하단 관련기사 <'성희롱' 당했다는 女교수 "성희롱 같은 행동 듣도 보도 못해">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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