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위기 구할 유로본드는 없다"

<FT>"유로는 정체성 없는 단일통화라는 치명적 결함"

국제신용평가업체들이 예고해온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20일(현지시간)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를 시작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사상 최초로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강행했던 S&P는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로 한 단계 내렸다.

상위 6번째 등급으로 한국과 같은 등급이며, 게다가 전망도 '부정적'으로 매겨 추가 강등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간밤에 뉴욕증시의 다우지수는 이미 그리스 부도 임박 등 유로존 부채위기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며 1% 가까이 하락했다.

이와 관련,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국제 전문 칼럼니스트 기디언 래치먼을 동원해 유로존 위기 최후의 해법으로 거론되는 '유로본드(유로존 회원국이 연대보증하는 채권)'의 실현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유로존에 대한 비관론을 강한 어조로 밝혔다.

다음은 '유로의 진짜 치명적 결함(The single currency's true fatal flaw)'이라는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편집자>




▲ 세계 8위 경제대국 이탈리아에서는 요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부채위기로 신용등급이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게다가 유로의 앞날에 대한 회의론이 점점 증폭되고 있다. ⓒAP=연합
특정 인물이나 장소 이미지 없는 화폐

유로가 왜 이런 위기에 처했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부채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유로 지폐를 들여다보라. 가공의 건물들이 그려져있다. 국민 화폐들은 실존인물이나 장소를 이미지로 택하는 것과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유로화는 지폐에 반영될 유럽의 정체성이 취약한 화폐다. 유로는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를 지우게 만들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유로존 위기 앞에서 유럽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자체가 바로 유럽에 대한 충성심보다 민족적 충성심이 더 강하다는 점에서 그들이 실행가능한 해법을 찾기에 제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낙관론 믿고 유권자 동의 없이 출범한 화폐

유로화가 도입될 때 독일을 포함해 대부분의 유럽연합 국가들은 유권자들의 직접적인 동의를 받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유로가 도입돼 보다 번영하고 강력한 유럽으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면 유로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로 출범 10년이 지난 뒤 이 단일통화는 고통, 긴축, 부채라는 단어들과 연결돼 있다. 유럽의 연대로 지켜내기에는 한계가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인색해서 유로본드가 도입될 가능성을 원천 부정한 것이 아니다. 독일 유권자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남유럽 국가들을 영구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와 네덜란드 같은 북유럽 채권국들의 유권자들은 독일보다도 유로본드를 더욱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유로의 출범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전망했던 전문가들의 견해는 지금도 경청할 만하다. 유로존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 가능성이 높은지도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유로 회의론자들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통합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단일통화는 지속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유로 낙관론자들은 정치적 통합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경제적 통합이 결국 정치적 통합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은 유럽의 정치적 정체성은 경제적 위기에서도 단일통화를 지탱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는 점을 경고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로 낙관론자들은 아직도 상황이 끝난 게 아니며, 유럽의 유권자들은 정치적 통합을 더욱 굳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유로본드 논의, 시간 낭비인 이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기 힘들 것으로 본다. 오히려 호세 마누엘 바로수 유럽위원회 위원장 같은 지도자들이 유로본드처럼 결코 실행되지 않을 해법들을 주장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로본드가 도입되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를 생각해 보라. 유럽의 조약을 다시 쓰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하고, 협상이 타결돼도 27개국 회원국들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급속하게 확산되는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이런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된다.

그나마 실행가능한 해법이 있다면, 기술적이면서 이해하기 힘들고 유권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방안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채권을 매입해주는 현행 프로그램이 바로 이런 조건에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 방안에도 문제가 있다. 독일처럼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통화증발 정책에 민감한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메르켈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나에게 귀뜸하기를 "ECB의 프로그램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에서 이미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단기적 타격 엄청날 것

유로본드, '조세 공동운영'처럼 유럽의 단합이 훨씬 더 필요한 방안들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앞날은 두 갈래다. 긴축과 구제금융으로 구성된 현재의 프로그램이 실제 효과를 발휘하거나, 일부 유럽 국가들은 부도가 나서 유로존을 탈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그리스의 경우 유로존을 떠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로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타격은 매우 심각할 것이다. 그리스에게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유럽은 은행 부실 사태, 보다 가혹한 긴축, 실업 악화, 사회적 소요, 정치적 극단화, 유럽연합의 분열 위기 고조 등의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망이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유로 회의론자들조차 좋아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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