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된 남북 '위안부' 연대, MB정부 들어 단절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박물관 건립에 정부·대기업 지원 '제로'

한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사슬로에서 풀려난지 꼭 66년을 맞았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한국 현대사는 피억압의 고통,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역사다.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발 아래 35년 동안 억눌려 살아야 했고, 8.15 광복 뒤에도 좌와 우로 나뉘어져 같은 민족끼리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다.

8.15가 지닌 밝음과 어두움

한국인들에게 8.15는 어떤 의미일까.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안겨준' 8.15 해방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8·15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극좌·극우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부딪쳐 피를 흘렸다. 식민지시대 내내 민족을 배반하며 자기 한 몸의 편안함을 구하던 무리들은 새로운 점령자에 빌붙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히 남한에서 그랬다.

이렇듯 8.15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밝은 면을 지녔지만, 아울러 민족 분단과 갈등이 시작됐고, 일제 식민지 찌꺼기를 쓸어내지 못했다는 어두운 면도 지녔다. 따라서 8.15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통일의 목표와 더불어 아직도 풀지 못한 과거사 문제 해결이라는 숙제를 남겼다. 과거사 문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흔히 '정신대'라고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위안부' 전쟁범죄 사죄와 올바른 역사교육을 촉구하는 길원옥 할머니 Ⓒ조승근
일본군의 성노예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중국 침략(1937년)과 진주만 공습(1941년)에 이어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로 쳐들어가면서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을 때,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납치해갔다. 그리고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 놀음에 희생시켰다. 한국인들을 전쟁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간 납치행위는 곧 전쟁범죄다.

학계에선 그 무렵 일본 본토와 사할린의 탄광,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전선으로 강제로 끌려간 우리 한국인들이 무려 2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납치된 이들 가운데엔 논밭에서 일하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인간사냥꾼들에게 붙들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던 수십만명의 꽃다운 여성들도 있다.

인간사냥 또는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속여 일제가 끌고 간 일본군 성노예 규모가 얼마나 될까. 이를 밝혀줄 1차 자료(일본 정부의 문서)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렵지만, 관련 연구자들은 대체로 20만 명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대만 필리핀과 그 밖의 동남아시아 지역(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여성들도 짐승과 같은 일본군에 피눈물을 흘렸다. 분명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가운데 다수는 한국인이었다.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

8.15 광복절에 즈음해 전국적으로 여러 종류의 행사들이 열렸다. 그 가운데 특히 의미가 깊은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상임대표 윤미향) 주관 아래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 동안 서울 연건동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던 <1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이다.

▲ 제10차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가 8.15를 맞아 서울에서 열렸다. Ⓒ조승근

아시아연대회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춰 1992년 서울에서 1차 회의를 연 이래로 2년에 한 번꼴로 아시아 피해국들과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이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의 마당이다. 올해엔 한국과 대만, 동티모르, 일본, 태국, 필리핀, 독일, 미국, 캐나다의 인권활동가들이 참가해 지난 20년간의 연대활동을 평가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이번 아시아 연대회의가 지닌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연대모임을 통해 지난 20여년 동안 일본 정부가 거부해온 공식사죄와 법적 책임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빠른 정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며 결단하는 마당이 되기를 바란다."

북한 대표가 참석 못한 이유는

이번 모임에서 북한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명박 정부의 남북 '접촉 불허' 방침에 따라 북한 쪽에 초청장조차 보내지 못했다. 현재 북한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살아 있다.

남과 북은 1990년대 아시아연대회의 초기부터 함께 손을 잡고 '남북 간 여성들의 연대'를 이뤄왔다. 지난 2000년 일본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는 남북이 함께 기소를 했고, 2007년 서울의 제8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는 남북공동결의문을 내놓기도 했었다.

일본군 위안부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동원돼 큰 희생을 치렀던 사람들이 바로 식민지 시절의 한민족이다. 그런 남북의 피해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활동하는 것은 일본에게 더 큰 압박을 가할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정착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얼음처럼 차가워진 남북관계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데에서마저도 남북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 집권 민주당도 "모르쇠"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10차 아시아연대회의 포스터 Ⓒ조승근

연대회의에서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진상조사 성과와 과제' △'입법해결 활동 경과보고와 과제' △'국제연대 활동의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 아래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나란히 앉아 발제를 했다.

첫 발제자인 강정숙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혀내려는 여러 연구자, 활동가, 단체들이 발로 뛰며 애쓴 끝에 이뤄낸 녹취 조사, 그에 바탕한 증언구술집 등 그동안의 연구 작업들을 정리해 소개했다. 그 증언구술집들에는 피눈물이 흐르는 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남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시각 차이가 있다. 강 연구원은 "남한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에서 비롯된 식민지성에 바탕을 둔 반면, 일본은 여성문제(젠더문제), 북한은 계급성을 강조한다"고 분석하면서 "민족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식민성으로 해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내부의 문제 등 좀 더 다양한 연구 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번 연대회의에서 모든 발제자들이 입을 모아 비판적으로 지적한 사항은 일본 정부가 '우린 모르쇠' 식으로 시간을 끌며 전쟁범죄 사실을 애써 부인하면서 책임을 피하려는 태도다. 두 번째 발제자인 요시카와 하루코(吉川春子) 전 일본 참의원(공산당)은 "2001년부터 일본의 세 야당, 즉 민주당-공산당-사민당이 뜻을 모아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죄 △정부 책임으로 피해자 보상을 뼈대로 한 법안을 8차례에 걸쳐 제출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뀐 뒤에는 법안 제출조차 어려워졌다"고 안타까워했다.

▲ 태국에서 온 노수복 할머니. 생일을 잊어서, 8.15를 생일로 삼으셨다. Ⓒ조승근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눈 못감겠다"

이번 회의에는 태국에 사는 노수복 할머니(90)와 일본의 송신도 할머니(89)가 참석해 눈길을 모았다. 노수복 할머니는 21살 때인 1942년 부산 영도다리 가까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인간사냥꾼들에게 붙잡혔다. 3년 동안 싱가포르, 태국에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거쳐 풀려났다. 그러나 한국에는 돌아갈 엄두를 못 내고 태국에 머물렀다.

"나의 생일을 잊어 8.15를 생일로 삼고 있다"는 노수복 할머니는 "공항에 내려 태극기를 봤을 때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못하는 게 가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에 무관심한 일본 정부를 고발하고자 한국에 왔다"는 송신도 할머니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힘으로 느껴졌다. 16살의 꽃다운 나이에 인간사냥꾼들에 붙잡혀 중국으로 끌려갔던 송 할머니는 일본에서 "나도 위안부 피해자"라며 차마 밝히기 어려운 사실을 용기 있게 드러낸 유일한 생존자이다.

송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에게 참으로 짐승보다 못한 짓을 당했다. 내 등에는 일본군이 찌른 상처도 있다. 내 나이 지금 89세이지만 젊었을 때 당한 고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눈을 못 감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며 송 할머니는 1993년부터 10년 동안 법정투쟁을 해왔었다. 안타깝게도 법정투쟁은 패소로 막을 내렸다. 2007년에 상영된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송 할머니가 10년 동안 벌여온 법적 투쟁과정을 담은 화제의 다큐멘터리이다.

송 할머니는 진상규명과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적극 대응을 보이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질타했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응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미적지근하다. 정치를 잘 해야 된다."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낼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디딤돌이 역할을 해줘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얘기다.

▲ "등에 일본군이 찌른 상처가 남아 있다"는 송신도 할머니 Ⓒ조승근

환향녀(還鄕女)를 보는 잘못된 눈길

송 할머니의 말대로 '짐승보다 못한 짓을 당한' 여인들은 1945년 8.15 뒤 그런 사실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정절을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관념도 그녀들의 침묵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사실이 결코 그녀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 고려시대에 몽고족의 원나라에 끌려가 숱한 고생을 하다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이 '화냥X'이란 비속어로 잘못 불리게 된 사정과 크게 맥락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떠오른 것은 8.15 광복을 맞고서도 46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그녀가 겪었던 악몽을 증언하고 나서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상에 드러났다. 김 할머니는 "이 역사를 잊으면 또 당한다"라며 진상규명과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나섰다.

'모르쇠' 버티기 속 생존자는 겨우 70명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국가가 주도해 저지른 전쟁범죄임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그에 따른 최소한의 법적 책임을 지거나 배상을 하지 않겠다며 버텨왔다. 그러면서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녀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본의 진정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한 채로 한분 두 분씩 세상을 떴다.

국내외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011년 8월 현재 모두 70명. 그 가운데 8명이 중국(4명), 미국(2명), 일본(1명), 태국(1명)에 머물고 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1992년 1차 아시아연대회의 때 참석해 '위안부'들의 고난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증언하셨던 하셨던 김학순, 노청자 할머니를 비롯해 강경덕, 김순덕 할머니 등은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고, 다른 여러 할머니들도 연로하셔서 건강이 좋지 못한 상황"이라고 밝힌다.

▲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시위장의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 Ⓒ조승근

20년 이어져온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이 계기가 돼 1992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수요 시위는 일본 정부에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부로서 강제 연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라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워라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하라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역사교육 속에서 이 사실을 가르쳐라 등을 요구해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로부터 이렇다 할 태도의 변화가 없다. 눈비를 맞아가며 할머니들이 목 쉬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외쳤던 수요시위도 오는 12월 14일로 1000회를 맞을 채비다.

할머니들의 눈물이 그칠 날은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를 비롯한 활동가들과 생존 할머니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면, 서울 성미산 기슭에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짓는다는 소식이다. 아시아 연대회의 행사의 일환으로 '위안부' 할머니들도 참석한 가운데 8월 14일 '희망의 문 열기' 행사도 가졌다.

문제는 건립자금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돼지저금통을 터는 등 그동안 국민성금으로 모은 17억의 상당 부분은 이미 부지 구입 등으로 쓰였다. 그런 어려운 사정으로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올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개관한다는 목표가 이뤄지기는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는 탓일까, 아니면 '위안부' 문제 자체를 껄끄럽게 여기는 탓일까, 이명박 정부의 지원도 없고 대기업의 성금도 없는 상태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심기가 불편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 어린 눈길이 성미산 기슭으로 모아지길 바란다. 아울러 일본이 뒤늦었지만 성심어린 반성으로 '위안부' 할머니의 마르지 않는 눈물이 그치는 날이 하루 빨리 다가오길 기원해본다.

* 필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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