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의 광주' 하마, 30년 만에 유혈 사태 재연

반정부 시위 진압으로 이틀간 최소 116명 사망

시리아에서 40여년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바사르 알아사드 대통령 일가에 대한 반대 시위와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이 계속되면서 이슬람의 '성월'(聖月)인 라마단이 피로 물들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현지 주민들의 말을 인용해 2일(현지시간) 3명의 하마시(市) 주민이 탱크의 포격과 저격수의 총격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주민들은 라마단 야간 기도가 끝난 이후 정부군이 북쪽과 동쪽 등 다양한 방면에서 공세를 재개했다며 포격으로 1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전날일 1일에는 시리아 전역에서 24명이 숨졌으며, 그 전날에는 최소 140명이 정부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210km 가량 떨어진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로 시위대가 장악하고 있는 하마에서는 탱크를 앞세운 정부군이 네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최근 며칠 간 무려 100명 이상이 숨졌다.

인권단체들은 지난 3월 시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약 17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라마단을 앞두고 알아사드 정권은 강경 대응을 천명했고, 실제로 전국적으로 탄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라마단 기간에 이슬람교도들이 낮 동안 단식을 하고 저녁에 기도를 드리러 이슬람 예배당(모스크)에 모이는데, 밤 기도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시리아 국영 TV는 저격용 총과 곤봉, 단검을 소지한 반정부 시위대의 모습을 방영하며 '파괴 공작원'들이 하마를 휩쓸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영 TV는 이 영상이 지난 31일 하마 시내에서 찍한 것이라면서 방탄 조끼에 AK-47 소총을 든 남자의 모습을 내보내며 이들 '공작원'이 법원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하마 주민은 법원에 불이 난 것은 정부군 탱크의 포격 때문이라고 영국 <BBC> 방송에 말했다.

국제사회는 한목소리로 시리아 정부의 유혈 진압을 비난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가 대응 방침을 논의하고 있으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거듭 촉구했다. 미 의회도 조지프 리버만 상원의원 등을 중심으로 시리아 제재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 정부 당국자들은 국제사회의 폭넓은 동참 없이는 알아사드 정권에 압력을 가할 방법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고 2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 중국, 브라질, 남아공 등은 시리아에 대한 비난에는 동조하면서도 결의안 채택에는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그러한 결정은 우리가 원하는 바, 즉 '적은 피와 많은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좋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 시리아 현지 TV방송은 2일(현지시간) 희생자의 장례식 장면을 내보냈다. ⓒAP=연합뉴스

하마는 '시리아의 광주'

이틀간 최소 11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 하마는 1982년에도 정부군에 의한 대량학살이 저질러진 피의 땅이다. 현지 주민들을 실제로 이번 사태를 30년 전 상황과 비교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 당시 대통령은 시리아 제4기갑여단의 전신인 방위군 여단들로 하마를 포위하고 군을 투입해 반대 시위를 진압했다. 최소한 1만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공식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마는 당시 시리아 제3의 도시였다.

당시 반정부 시위는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주도됐다. 하마와 알레포 등 북부에 기반을 둔 이슬람주의자들은 1963년 등장한 집권 바트당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초기부터 보여 왔다. 무슬림형제단은 70년대 말까지 반대 시위를 벌였을뿐 아니라 주로 지주들로 구성된 바트당원들을 습격해 살해하고 심지어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한 알아사드 정권의 대처는 가혹하고 잔인했다. 정권으로서도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1982년 2월 일단의 반정부세력들이 하마를 장악하고 '해방구'로 선언했을 때의 탄압은 전례없을 만큼 극심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도시 외곽에는 전차와 포병부대가 배치돼 포격을 가했고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남자들과 15세 소년까지도 총으로 쏘았다. 공군 전투기가 출동해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길을 폭격했다.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까지 나왔다. 희생자 규모나 기독교 교회까지 불탄 것을 보면 당시 정부군의 목적이 단순히 무슬림형제단을 몰아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신문은 하마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1982년의 사태를 기억하고 있으며 거의 집집마다 그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하마 주민 모하메드(54. 가명) 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며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만약 보안군이 나에게 왜 시위를 벌이는지 묻는다면, 당신들이 1982년 내 아버지와 형제를 죽였다고 답하겠다"면서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가?"라고 신문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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