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응조치, 북한을 유혹할 수 있을까

'제재 해제 후 핵폐기 논의' 구조 흔드는 게 급선무

북한이 핵폐기를 위한 '초기이행조치'에 들어갈 경우 미국이 제공할 상응조치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미국은 19일 전체회의와 북미 양자회담에서 이를 북한 대표단에 전달한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이에 따라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날 알려진 미국 측 제안의 내용은 북한이 핵폐기 1단계인 동결(원자로 가동 중지, IAEA 사찰 허용)에 들어갈 경우 미국이 서면화된 체제안전보장이나 종전협정 서명 등 주로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조치를 제공하고, 2단계인 신고에 들어갈 경우 경제적·인도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에 앞서 미국은 지난 11월 28~29일 베이징 북미협의에서 △영변 원자로 가동 중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핵실험장 폐쇄 △핵무기와 핵물질을 포함한 핵 관련 프로그램의 성실한 신고 등을 북한의 핵폐기를 위한 초기이행조치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는 통상적인 핵폐기 4단계인 '동결-신고-검증-폐기' 중에서 앞의 두 단계인 동결과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가 20일 오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그에 대해 미국이 제공할 상응 혹은 보상조치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북한이 핵을 폐기할 경우'라고 뭉뚱그려진 전제조건이 해소되면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서면 약속을 하는 한편, 경제적 지원과 북미 관계정상화를 추진한다고만 알려져 왔다.

따라서 이날 알려진 상응조치는 이처럼 모호했던 내용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동결에는 안전보장' '신고에는 경제적·인도적 지원'이라는 '짝짓기'를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6자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이에 대해 "새로운 제안이라기보다는 정식의, 자세한, 구체적인 제안을 해 온 것"이라고 평했다.

서면 안전보장은 '행동'인가 '말'인가

이같은 소식이 전해진 후 외교가의 반응은 양분됐다.

하나의 시각은 북한이 '금융제재 해결 없이 핵폐기 논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핵폐기 논의에 들어가더라도 동시행동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북한을 설득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핵폐기의 첫 단계로 들어가는 원자로 가동 중단과 가동 중단 여부에 대한 사찰 허용은 북한의 엄연한 '행동'인데 비해, 미국이 주겠다는 서면 안전보장은 '말'에 불과할 수 있다. 이는 동시행동원칙은 물론이고 9.19공동선언에서 표현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북한의 행동 대 미국의 말'로 규정이 가능하다.

북한이 동결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 조치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1단계 상응조치의 한계로 볼 수도 있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18일 기조연설에서 핵 프로그램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경수로 문제를 들고 나온 마당에서 북한을 움직이기에는 더더욱 힘이 부치는 제안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이 북한에게 줄 '당근'을 부각함으로써 북한이 수용을 거부할 경우 대북 비난의 명분을 쥐기 위한 언론플레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제안에는 북한이 그동안 원하는 것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는 한 소식통의 말은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미국의 상응조치가 북한의 태도를 어느 정도라도 변경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북한이 이행조치와 상응조치의 짝짓기에 불만이 있더라도 미국이 제시한 상응조치에는 뿌리치기 어려운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면 안전보장과 경제적·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그간 줄기차게 말해 왔던 핵폐기의 조건이었다. 미국은 그같은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북한의 최종 목표인 북미 관계정상화에까지도 다다를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할 것으로도 알려졌는데, 이는 북한이 핵실험까지 감행하며 위기를 고조시켰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또 원자로 가동 중단이라는 '행동'에 상응하는 '서면 안전보장'도 6자회담 참가 4개국이 보증해 준다면 얼마든지 '일종의 행동'으로 규정될 소지가 없지 않다는 것도 긍정적인 전망을 뒷받침한다.

한·중 중재안은 이미 나와 있다

이같은 제안에 대해 북한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북한이 진지하고 실무적이었다"는 회담 관계자들의 전언과, 6자 본회담에서 북미 양자회담에 이틀 연속 임했다는 사실 등으로 미뤄 볼 때 무작정 거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계관 부상은 이미 지난 달 말 장장 15시간에 걸친 베이징 북미접촉 후에도 '돌아가서 답을 주겠다'고 했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아 미국의 제안에 대해 장고(長考)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왔었다. 미국의 상응조치가 뚜렷이 전달된 건 19일이었지만 베이징 북미접촉에서도 대략적인 밑그림이 이미 전달됐을 터다.

이에 회담장 주변에서는 북한이 미국의 상응조치에 어느 정도의 수정을 가해 최대치의 '수익'을 얻으려 할 것이고, 따라서 6자 본회담에서의 쟁점은 거기서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9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북한이 제시할 '수정안'은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우선 1단계 '동결'에 대응하는 서면 안전보장에 중유 지원이나 식량·비료 등 인도적 지원을 추가시키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는 북한의 에너지·식량난이 당장 급한 문제이고, 가동중단이라는 '행동'에 대응하는 명백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결에 대한 보상으로 중유를 제공하는 아이디어는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의 핵심으로 클린턴 행정부의 북핵 정책을 거부하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중재 역할이 거론된다. 9.19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4~6개의 워킹그룹(실무회의)을 만들자는 중국의 제안과, 이행조치 대 상응조치를 1 대 1로 짝짓거나 행동의 순서를 지나치게 세분화하지 말고 몇 단계의 큰 '패키지'로 묶어 이행하자는 한국의 제안이 중재안에 해당한다.

중국 측 안은 미국이 요구하는 초기이행조치는 9.19공동성명에 있는 핵폐기 과정에 이미 포함됐기 때문에 공동성명 이행의 길로 우선 진입시켜 불필요한 선제행동 논란을 잠재우자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국의 제안은 미국의 '경직된' 상응조치에 신축성을 부여해 나중에 줄 것을 먼저 줄 수도 있는 여지를 만들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중 양국은 북한을 향해서도 1994년에 비해 많은 플루토늄을 보유한 상황에서 동결 자체에 너무 많은 보상을 요구하지 말라고 설득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은 북한이 1단계 동결조치를 이행할 경우 7월 미사일 발사 이후 중단한 쌀·비료 지원을 재개하겠다는 우회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없는 것도 아니다' '없지 않다'의 숨은 뜻은?

문제는 핵폐기에 대한 미국의 제안과 한중 양국의 중재 내용이 아무리 '유혹적'이라도 북한이 금융제재 해결을 이번 회담의 선결조건으로 못 박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이 제시한 상응조치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금융제재 해결 후 핵폐기 논의'라는 커다란 논의 구조를 흔들고, '핵폐기는 동시행동으로'라는 원칙을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0일 "국면타개를 위한 노력에서 전혀 융통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고 보도했다. 또 "지금도 미국의 언동에는 9.19공동성명에서도 확인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들이 없지 않다"고도 전했다.

금융제재 해제가 선결조건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융통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없지 않다' 같은 유보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상응조치를 흔들며 북한을 유혹하는 미국에 대해 '핵폐기의 값을 더 쳐 준다면 움직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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