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사건과 6월 항쟁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③]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됐다.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과 이같은 부당한 공권력에 굴복해 동아일보사가 134명의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113명의 투위원 가운데 14명이 작고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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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 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 2편 : "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다. 민통련과 3차투옥, 박종철, 6월항쟁

나는 석방되자 말자 다시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당주동에 있는 고교 동기생의 음악출판사 한구석에 책상과 한글타이프라이터를 놓고 번역 일에 매달렸다. 한길사에서 부탁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론'과 두레 출판사가 의뢰한 해롤드 라스키의 '국가론'을 82년 중반까지 끝냈다. 역자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출판사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냈다.

내가 1975년부터 잇따라 투옥되는 동안에, 어린 두 아이는 벌써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이르렀다. 민주화운동에 매달려있던 나는 아이들 성장에 아비 노릇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키워가면서 가정을 지키는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금은 부산의 부경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당시 한성여대 가정과 교수로 재직 중이시던 장모님(박기숙)은 토요일 오후에 기차로 상경하셔서 일요일 저녁에 부산으로 가시는 일과를 계속하셨다. 아이들과 한나절 놀아주시려고 그러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원들의 계속적인 감시에 시달렸다. 그들도 항상 우리 아파트 앞에 서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1층인 우리 집을 바로 지척에서 건너다 볼 수 있는 담배 가게주인에게 부탁하여 감시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담배를 피울 때여서 담배 가게로 담배를 사러 가면 그 주인은 이유 모를 증오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그 집에 가서 담배를 샀다. 바로 옆 아파트에는 동아투위의 조양진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 나의 아들 딸과 같은 또래의 두 딸이 있었다. 두 집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잘 놀았다.

81년 말부터 우리 부부는 10평에 큰 방 하나 뿐인 청운 아파트가 두 아이와 살아가기엔 너무 좁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연탄을 사용하던 그 아파트는 본래 청와대 경호원들의 주거용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이미 청와대 직원들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다. 먼저 조양진이 강동구 길동의 삼익파크 아파트로 옮겼다. 24평형의 6층 남향으로 옮겼는데 주거환경이 좋다는 것이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선 듯 결정하지 못했다. 청운 아파트를 팔아도 새 아파트의 반값도 될 수 없었다. 우리도 조양진의 옆동 동향 24평형으로 정해서 옮겨 가기로 했다. 마침 삼익 파크 아파트의 건설사가 삼익건설이었는데 이창수 사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내 친구 김선우와 막역한 사이였고 나와도 잘 아는 처지여서,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미분양분 아파트를 청운 아파트 판 돈에 800만원 20년 장기할부주택부금을 보태 구입할 수 있었다. 82년 여름에 옮겨온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28년이나 살게 되었다. 지금도 이창수 사장에게 감사히 생각한다. 이 집에서 딸 근하와 아들 도균은 초·중고·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근하는 시집가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도균은 이제 배움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할 채비를 갖췄다.

길동 삼익파크로 옮겨와서도 정보기관원들의 감시는 이어졌다. 아파트 입구의 복덕방에 진을 치고 감시했다. 1985년 여름엔가 서울에서 세계은행(IBRD)총회가 열렸다. 그 총회를 저지하려는 시위를 우려한 전두환 정부는 주요 재야인사들을 가택연금하거나 지방으로 강제 여행시킨 일이 있었다. 강동 경찰서 정보형사 3인이 한 조가 되어 나를 끌고 승용차에 태워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충주호로 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수석광(壽石狂)이어서 나를 끌고 다니는 업무를 탐석(探石)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용차 트렁크에 무거운 돌을 지고 옮기는 도구들을 싣고 다녔다. 이른바 남한강의 검은 오석(烏石)을 수집하러 온 것이었다. 총회가 끝나는 사흘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다음 날에는 충주에서 강릉으로 달렸다. 낙산사 해안가로 가서 생선회도 시켜 먹었다. 고성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도 관광했다. 나를 핑계로 강산유람하자는 심산인 듯 했다. 호텔비, 식비, 승용차 연료비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독재정치를 하려면 정말 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기회를 봐서 빠져나갈까 궁리도 했지만 거의 매일 보고 살아야 하는 그들을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 못 된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1981년 초 두 번째 출옥한 이후의 삶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 사회 도처에는 광주 학살의 피 냄새가 배어났다. 학살자들은 밀리면 자신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폭력적 정책을 밀고 나갔다. 작가 한수산이 신문연재 소설이 문제 있다고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 여기저기서 공포정치의 흔적들이 과시됐다. 민주화운동 진영도 상황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우선 학생운동 지도자들로서 도피중인 장기표·심재권 등을 만나 그들을 돕고 다른 도피자들과의 연결도 시도했다. 독재정권 아래서도 비교적 안전지대로 여겨지던 개신교 천주교계와도 접촉했다. 특히 광주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던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만나 뵙고 김지하·박재일·이창복과는 만나 전반적 상황을 점검했다. 원주에서는 이창복 선생을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도록 합의해 주었다. 1983년에는 야당의 양축의 한 사람인 김영삼 씨가 정치범 석방과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면서 23일 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장기표와 나는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양김 공동성명을 내도록 추진했다. 문익환 목사와 안병무 교수를 움직였다. 이른바 동교동계 쪽에서는 아무 투쟁도 하지 않았던 YS 측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른바 YS-DJ 양측의 미래의 분열을 미리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공동성명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1983년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8·15 양김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 성명은 그 후 이른바 유화국면을 만들어내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 성명의 파급은 이어져서 동교동·상도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그 이듬해 결성했고 재야에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결성되었다. 민민협의 공동대표에는 천주교의 김승훈 신부, 개신교의 김동완 목사 그리고 재야의 내가 맡았다. 구성 부분에는 천주교 개신교 문화예술계 언론계 노동 농민 청년 등이 합류했다. 민민협의 구성 부분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부분은 김근태가 의장을 맡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함께 한 것이었다.

민민협은 1985년 2.12총선에서 민추협을 기반으로 김영삼·김상현을 중심으로 탄생한 선명야당 신민당을 지원했다. 민정당과 둘러리 야당인 민한당 후보들을 공격하는 유인물을 대량 제작하여 해당 지역들에서 살포했다. 선거 결과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정권은 당황했지만 다시 강공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민민협은 70~80년대에 등장한 수많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고 주로 부문 조직운동의 활동가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런 흐름은 광주학살 이후 민주화운동 전반에 나타난, 조직 중심이 아니면 군부의 탄압을 견디어낼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탄압이 가해질 경우, 공개운동 조직으로서 대단히 취약한 방어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들이 활동가들과 결합하여 민주화운동을 벌여 나가야 방어력도 있고 폭발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따라 장기표·이창복이 문익환·계훈제·백기완 등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민주통일국민회의를 1984년 연말에 창립했다. 이런 흐름은 어차피 민민협과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12총선 이후 강화되는 전두환 정권의 공안탄압도 두 단체 통합의 당위성을 뒷받침했다. 여기에는 80년대 내내 불붙었던 시민민주주의(CD)-민족민주주의(ND)-민중민주주의(PD) 논쟁, 이른바 사회구성체론에서의 CNP논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끈질긴 이 논쟁은 지금의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는 것으로 대략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개 조직의 통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탄생했다.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백기완 선생이 나서시고 나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상임위원장에 이창복, 정책실장에 장기표가 나섰다. 그러나 운동의 핵심인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다. 그것은 큰 흠결이자 약점이 되었다.

▲ 1985년 12월 9일 민통련 제2차 중앙위언회를 마치고 간부진이 함께 했다. ⓒ이부영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어도 민통련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부문과 지역을 아우르는 최대의 재야 민주화운동단체가 탄생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신민당의 등장과 더불어 범야권도 1980년의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학살 이후 최초로 전열을 정비하고 전두환 집단과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1983년 이후 유화국면에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집단 시위를 제외하고는 재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구류로 대응했다. 나는 1975년부터 86년말 세 번째 구속당하기 전까지 12차례의 구류처분을 당했는데 10차례가 84년부터 86년초까지였다. 구류 기간은 일주일에서 30일까지 다양했다. 20일이나 30일 구류처분에 대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1주일 만에 석방됐다. 1주일 구류 사는 것을 우리는 격무 중에 1주일 휴가 간다고 했다. 정식재판으로 쌓인 잔형(殘刑)은 정식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으면 거기에 얹어서 살고 나와야 했다.

민민협과 민통련의 등장과 궤를 함께 해서 민주언론운동도 기지개를 켰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송건호 선생을 의장으로 모시고 만들어졌다. 동아·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들이 주요구성 멤버들이었다. 동투의 윤활식 성유보 박종만, 조투의 신홍범, 80년 해직언론인 가운데 김태홍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통련에도 동투의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등이 참여했다. 민언협에서는 독자적으로 '말'지를 냈고 거기에 발표된 5공 정권의 '보도지침'사건으로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이 구속되었다.

신민당은 국회에서 간선제 대통령제를 직선제로 개헌을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전두환은 호헌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국의 양상은 한 순간에 호헌 대 직선제 개헌으로 바뀌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민정당 측과 협상에서 내각제를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양김 측은 즉각 신민당으로부터 탈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민우 체제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야권의 친구 정치인으로부터 전두환의 청와대 정무수석 허문도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다. 원주의 김지하 시인으로부터도 보안사의 처장급 인사가 찾아와서 나를 비롯한 민통련의 몇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고 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허문도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의 의도, 즉 직선제 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민통련 같은 재야단체에 대해 탄압을 하지 않고 공존할 의사가 있는지 등을 타진해볼 생각이었다. 강남의 조그만 카페 양주 집이었다. 두 사람만 마주 앉았다. 조선일보 출신인 허 수석의 성향은 조선투위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고 81년의 '국풍'행사 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수로 나왔다. "민통련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험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일방적인 협박이었다. 서울에서도 광주 같은 일을 겪어내지 않으려면 소수의 희생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 마시면서 김지하 시인의 건강 이야기, 문화 부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이미 저들은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을 남영동에 끌고가서 살인적인 고문을 했다는 것이 공개되어 있었다.

▲ 1986년초 민통련의 사무처장이었던 이부영이 집회장에서 연행되고 있다. ⓒ이부영

1986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통일민주당·민통련의 범야권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놓고 일대 공방에 돌입했다. 1986년 봄 마산을 기점으로 시작된 통일민주당의 개헌현판식은 야당과 민통련이 함께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이는 마당이 됐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개헌현판식에 민통련의 박계동 조직국장은 민첩하게 지방의 재야단체들을 연계하고 홍보물을 배포하여 정보기관으로부터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을 비롯해서 야당과 재야세력을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 경찰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최루탄을 무차별로 쐈다. 각 대학들에서도 80년대 초에 활성화된 학생회가 직선으로 총학생회장을 선출, 대규모의 학생시위대를 동원하게 되었다. 각 대학에서는 총학생회장이 구심점이 되어 자연스럽게 연합시위로 발전시켰다. 노학연대, 농학연대 시위가 이뤄지기도 했다. 야당과 민통련의 직선제 투쟁은 바로 학생들과의 연대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던 PD(민중민주)계열의 노동운동이 직선제 개헌운동에서 급진적 '노동해방의 기치'를 들어 올리면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운동을 이념적으로 몰아세울 구실을 찾게 되었다. 직선제 개헌보다 노동해방 기치를 자극적으로 앞세운 예가 5·3인천개헌현판식이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거리시위로 현판식은 무산되었고 민통련 간부들은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배 당했으며 민통련은 해산명령을 받아 기능이 정지상태에 빠졌다. 나도 수배 당했다. 서울의 개헌현판식이라는 대회전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인천대회를 과격화하도록 방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대회 막을 구실을 인천에서 만들었다는 추론이었다. 나는 김정남의 주선으로 고영구 변호사 댁에 피신하고 있었다. 이미 나를 비롯한 민통련 간부들은 마산대회 이후 수배 상태에 놓여 있었다. 대전대회 때는 현장에 나가 대회 진행 상황을 살피다가 당시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이던 이해구씨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도 상황을 살피러 나왔던 모양이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마주쳤으므로 순간적으로 서로 외면하고 헤어졌다. 뒷날 국회의원이 되어 다시 만나 당시 얘기를 하면서 웃고 넘어간 일이 있다.

1986년 가을에 접어들어 건국대 사태가 벌어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1천5백명이 넘는 학생들을 검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통일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어야 한다'고 원내발언을 한 유성환 국회의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나도 민통련의 활동 재개를 위해 수배 중에도 지원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잡혀갔다. 당시 내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고영구 변호사댁은 노모가 80여세로 노환을 앓고 계셨고 부인 황국자 여사도 위경련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고 변호사가 나 때문에 구속되기라도 하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었다. 김정남과 이 문제를 상의한 결과 그는 이돈명 변호사에게 이부영이 이 변호사님 댁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씀드려 그리 하도록 하자는 동의를 얻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계셨다. 그 직책은 교황청 직속의 공식기관이었으므로 이 변호사를 녹록히 대하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상의 범인은닉 혐의로 이변호사를 구속했다. 이미 60대 중반에 이르신 이 변호사의 구속사태에 직면해서 나에게는 자신의 구속은 관심 밖이었다. 고 변호사는 어떠했겠는가. 홍성우, 황인철, 고영구, 김정남 등 제씨들이 만난 자리에서 김정남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후회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1986년 겨울 내내 고영구 변호사는 불 때지 않은 냉방에서 지냈다고 했다. 이 변호사님은 민주화운동을 위해 일하던 사람을 숨겨주었다는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변호사로서 당신 댁에 머물지도 않았던 내가 머물렀다고 '거짓 진술'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적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징역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번 징역살이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이 곧 판명되었다. 뒤에 김정남은 내가 영등포교도소에 갇힌 것을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신의 오묘한 손길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1987년 1월 17일 자정 쯤, 내가 갇혀있던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두 명의 경찰관이 수감되었다. 그 사동은 본래 여재소자들을 수용하려고 담 안에 다시 담을 쌓아 지은 격리사동으로서 당시에는 여재소자들을 다른 교도소로 옮기고 출역하는 일부 모범수들과 나를 그곳에 수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모범수들이 출역하고 나면 나와 그 두 경찰관들만 담당 교도관들의 감시 속에 남아 있었다. 이틀째에 그들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하여 죽인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밖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고문살인 사건에 대해서 항의, 농성, 단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월 3일의 49재에 맞춰 나도 20일 간의 항의단식을 시작했다. 나는 창살을 통해 조한경, 강진규 두 경찰관들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입니다. 저 세상으로 간 박종철 군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어 줍시다"라고 권했다. 그들은 곧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한경 경위는 밤새도록 찬송가를 불렀으며 젊은 강진규 경사는 밤늦도록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토요일 늦은 시간에 한정해 가족면회가 허용됐던 두 사람은 몹시 괴로워했고 특히 강진규 경사의 부친은 "네가 정말 사람을 고문해 죽였느냐"고 확인했다는 사실을 내 사동에 들어온 어느 교도관이 알려주었다. 나는 일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하고 70년대부터 친분을 쌓았던 안유 보안계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안 계장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세상에 이럴 수 있습니까. 지난 며칠 사이에 두 경찰관을 남영동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치안감과 간부 몇 사람이 몇 차례 특별면회 하고 갔는데, 두 경찰관이 자기들에게 모든 혐의를 지고 가라는 것에 강하게 항의하더군요."라고 말했다. 몇 차례 특별면회에서 있었던 두 경찰관들의 항의와 상관들의 회유·협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두 사람 이외에 주요 고문 담당자 세 명이 더 있다는 것, 조한경 강진규는 심문실 안에 함께 있었지만 주심문관이 아니었다는 것, 두 사람이 이대로 혐의를 인정하고 재판을 받을 경우 각각 1억 원씩 입금된 통장으로 가족들과 본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자기들만 고문 살인자의 오명을 지고 처벌받을 수 없으며 자식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처원 단장과 간부들은 "빨갱이 하나 죽인 것 가지고 무얼 그렇게 고민하나"라고 회유하면서 조직의 결정을 배신할 경우 징역을 다 살고 나오더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만남은 그렇게 결렬됐다는 것이었다. 안 계장은 정말 분노하고 있었다.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와의 얘기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것은 뒷일을 위한 내 나름의 예방조치였다. 내가 사태를 전반적으로 파악한 며칠 뒤, 담당 부장검사와 검사도 두 경찰관을 교도소 안에서 있었던 검찰 신문에서 회유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성기 법무장관이 야간에 영등포교도소를 불시에 방문하여 보안을 철저히 당부했고 곧 두 경찰관은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됐다.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폭로 이부영 메모 첫공개 ⓒ이부영

나는 나와는 70년대의 서울구치소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인 한재동을 다른 교도관을 통해 불렀다. 그리고 이른 시일 안에 야간 당직 교대근무로 들어오도록 부탁했다. 이틀 뒤 한재동이 야간에 들어왔다. 그에게 대강의 사태를 이야기하고 심각성을 인식시켰다. 그는 나에게 볼펜심을 건넸고 나는 누런 갱지로 된 교도소 화장지에 전말을 적어 나갔다. "友村 보게..."로 시작되는 김정남에게 보내는, 감옥 밖으로 날리는 비둘기(비밀 서신)가 작성됐다. 이 서신은 장기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던 전직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역시 도피 중이던 김정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그 뒤 추가 취재된 내용이 있어서 다시 한재동을 불렀더니 아직 이전의 비둘기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병용도 도피 중이어서 만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한재동이 다시 찾아왔다. 문제의 서신 3통을 동시에 전병용에게 전했는데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전달한 이틀 뒤에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서신 내용이 수사기관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를 생각하자 식은 땀이 저절로 났다. 서신 내용은 김정남이 정리하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었고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린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사태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6월에 접어들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고문경찰관 3명이 추가로 구속되었고 박처원 대공수사단장과 강민창 치안국장이 구속되었으며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장관 등이 문책 경질되었다.

국민의 저항에 부닥친 전두환 정권은 다시 쿠데타로 대응하려는 듯했지만 그럴 경우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참극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 예상되어 집권세력 안에서 반대에 부닥치자 타협노선으로 선회했다. 그것이 6·29선언이었다. 나는 6월 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영등포교도소 안에서 초조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항쟁이 전두환에 의해 분쇄되어 정보의 역추적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항쟁이 6월 중순을 넘기면서 전국적 수준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했다.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도 특종기사를 써봤지만 이번 경우처럼 목숨이 걸린 특종기사를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당시 아직 언론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대 최대의 특종기사를 쓴 셈이었다. 죄 없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두환 정권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취재하고 알렸지만, 막상 전두환 정권이 그 사태를 계기로 어떤 형식으로든지 물러나게 되자 군부독재 이후의 과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박 군 사건 전말을 밝히는 여러 계기에 안유 계장의 공로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그 뒤 교정계의 고위직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나는 그가 그 일 때문에 직장생활에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최근 영등포교도소의 현직 교도관 황용희 씨의 수기 '가시울타리의 증언'에 최초로 안유 계장의 역사적 기여, 그리고 그의 공분(公憤)의 의미를 밝혔다. 나는 공무원도 영혼이 있는 사람, 공분을 느끼는 시민이 되어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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