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①]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됐다.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과 이같은 부당한 공권력에 굴복해 동아일보사가 134명의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113명의 투위원 가운데 14명이 작고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속 해직 기자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국가 상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기자 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프레시안

1. 들어가는 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인 필자 이부영은 나의 삶에 관한 이 글을 동아투위의 성립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술하려 한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투위원 모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이후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배의 투위원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던 시기에 부닥쳐야 했던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격리, 이단자(아웃사이더)의 굴레는 우리들의 삶을 한 순간에 '체제의 금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1975년에 시작된 동아투위원들의 스산한 삶의 역정은 무려 35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 세월은 일제 식민지배 35년과 같은 기간이다. 6명의 대통령 치세를 지냈고 더욱이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 2명의 치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 14명의 동료들이 그 동안 유명을 달리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판정에 근거해서 민사소송이 뒤늦게나마 진행되는 것에 만시지탄의 희망을 걸어 본다.

나는 동아투위의 민사소송 제출용 참고자료로서는 지나치게 장황한 글을 제출한다. 나는 담당 재판부가 이 글을 인내심을 가지시고 진지하게 읽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쓰고 있다. 1975년에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가 해직되어 언론으로부터 축출된 한 기자가, 자기가 쓸 지면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한 기자가 그 이후 세월 동안 부딪치며 살면서 겪어온 일들을 재야 활동가나 정치인이 아닌 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으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 글을 읽게 되실 담당 재판부께서 글 쓴 이가 자신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나 정치활동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입장만을 편향되게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실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민주화운동과 정치참여의 길을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해직언론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나는 1975년에 독재정권이 저지르고 유신법원이 추인했던 '동아 자유언론 탄압행위'가 민주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서 복권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4·19 민주혁명 정신의 뿌리가 자유언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동료 위원들께서 동아투위의 자유언론운동에 관해서 그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 주었으므로 나는 될수록 지난 35년 동안 동아투위 소속 언론인 입장에서 내가 듣고 본 것 위주로 사실들을 서술하려고 한다.

2. 동아투위 성립 이전의 삶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학창생활을 보냈다. 서울 영등포의 외진 당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전 직후 용산중학교에 입학, 1961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고3 때 4월 민주혁명을 맞았다. 서울대 공대에 진학할 거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친구가 철조망을 넘어나가서 데모에 참여했다가 동대문서 앞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옳은 일에 나서서 죽은 친구 앞에, 공부한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학생들을 죽이는 정치라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대 기계공학과로부터 정치학과로 지원학과를 바꿨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석 달 전에 입학한 서울대 문리대의 분위기는 4월 혁명의 여진으로 용광로 같이 들끓고 있었다. 곧 밀고 들어온 쿠데타군은 5월의 라일락향기 짙은 캠퍼스를 무참히 짓밟았다. 선배들과 교수들도 사라져버린 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배회했다. 우리 세대들은 군사쿠데타에 대한 분노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문리대 학생회 일에 참여하면서 군정연장 반대데모 그리고 막 시작된 대일굴욕외교 반대데모에 참여하던 참에 나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중에 많은 학우들이 이른바 6·3 사태로 제적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1966년에 다시 복교한 대학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같았다. 2년 뒤에는 대학 문을 나서야 할 처지여서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학과의 교수 한 분이 공법을 전공해서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는 가라고 권했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심경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독점경제에 저항하는 현실적인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당시 6·3 학생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김도현 최혜성 김정남 등과 함께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세운 백범사상연구소(명동 소재)에 자주 들렀으며 장 선생님을 사숙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당시 가장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아일보에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수습 11기로 입사한 1968년은 3선 개헌을 앞둔 해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 대해 온갖 압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예를 들면 서울 봉천동 같은 달동네에서는 한겨울에 으레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업자들의 사재기 때문에 산꼭대기 동네에서는 아래 동네의 2~3배의 값을 내고도 연탄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사태를 보도하면 중앙정보부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연행해서 민심선동으로 대북이적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구타해서 내보냈다. 정치부나 경제부 등 핵심부서보다는 일선 경찰기자들에게 겁을 줘서 언론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서서히 퍼뜨리는 수법이었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언론은 완전히 침묵했고 오히려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로 전환했다. 당시 언론이 서서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간다는 자조적 탄식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동아일보에서는 최소한의 기자정신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신문사에서도 상사들에게 자주 불만을 말하다가 눈총을 받았고 다른 동료들이 기피하는 부서인 문화부에 자원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등 주요부서에서는 정부의 보도자료 이외에는 거의 기사를 쓸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도 문화부의 취재대상은 목사 신부 스님 인권변호사 작가 시인 예술인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어서 우회적 은유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신문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는데 있어서 문화부 기자들의 입지는 지식인 사회의 광범한 지지 성원을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형성한 지식인 네트워크는 이후 동아투위원으로 재야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일해 가는데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 1973년 4월 9일 이부영.손수향의 결혼식에서 천관우선생이 주례를 선 가운데 두 사람의 대부였던 장준하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부영


자유언론운동에서 우리의 중심인물은 천관우 주필이었다. 유신체제 선포 전후에 동아일보에서 퇴사와 복귀를 거듭했던 천관우 선생은 유신 직후 회사에 복귀한 뒤, 아예 '민주수호국민협의회'(약칭 민수협)대표를 맡아 재야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천 선생은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유진오, 이병린, 김정한 선생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낼 일이 있으면 나와 몇몇 기자들을 불러 성명서 원고를 주고 서명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내시곤 했다. 서울이 아닌 대전에 머물고 있던 유진오 선생 댁에 감시형사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들러 서명을 받아온 다음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근하기도 했다.

1973년 천관우 선생은 나와 손수향 양(장준하 선생의 비서)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다. 아버지가 없었던 두 사람에게 장준하 선생은 대부가 되어 주셨다.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두 차례 언론자유선언 사건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언론의 숨통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언론자유운동에 열심이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하루아침에 편집부서가 아닌 광고국으로 전보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대형화하기 시작한 재벌기업들이 사원들에 대한 처우를 비약적으로 올리자 언론사들의 급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생겼다. 이때부터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언론인들이 재계나 관계로 자리를 옮겨갔고 또 일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장래에 깊은 회의를 품고 유학길을 떠나기도 했다. 언론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으면서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젊은 언론인들은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독립운동 하는 심경으로' 자유언론운동에 매달렸다.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언론화형식 시위를 벌일 때, 후배들에게 그 같은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특종기사를 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논설을 쓰는 일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고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시국을 맞아 동아일보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유능한 기자가 되어도 쓸데없는 노릇이었다. 체계적인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개인 재능이 아니라 집단 지성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대응방안이 언론노동조합의 결성이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의 언론인들은 당시에 언론노조가 없었으므로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 분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사주측은 즉시 대량해임, 무기정직 처분으로 대응했다. 당시 박 정권은 노조결성 사태를 다소 복잡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조의 간부진이 유신체제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아일보 경영진과는 대립적 입장이었으므로 동아일보 사주 측과 노조 측이 내부 갈등을 벌이는 것이 정권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노조 측에서 부당해고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법리적으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한 사주측은 1개월 뒤 해임 등 징계를 일괄철회하고 복직조치를 취하되, 노조설립에 대한 신고필증이 교부되지 않았으므로 노조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조 측은 노동조합의 성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조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아일보사에서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던 1974년 4월초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었고 수백 명의 학생, 지식인, 종교인, 작가, 예술인들이 구속되었다. 무더기 구속에 따른 고문조작수사 의혹이 제기되었고 종교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서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지에서 열리는 민청학련, 인혁당 구속인사를 위한 기도회는 문화부 기자가 담당하는 행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들은 아예 행사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만 나타나 열심히 취재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취재해 송고하는 기사들도 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시국사건 기사들은 중앙정보부 등 정보수사기관의 간섭과 통제로 철저히 보도되지 못했다. 그런 현장에 나가 취재하는 동아 기자들에게도 구속자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나가지도 않을 기사를 왜 취재하느냐", "너희들 중앙정보부의 하청받고 대리 정보수집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항의를 하면서 취재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했다. 유신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징역, 20년~15년 징역형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법정에서 변론하던 변호사가 변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아 동아노조는 다시 결단의 시기를 준비해야했다. 우리가 언론노조를 만들어 조직을 확대.강화했던 것도 단지 신분보장 받고 월급 몇푼 더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다.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고 고문수사를 통해 사형, 무기징역형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맞서 자유언론의 책무를 다하려고 언론노조를 결성한 것이었다.

▲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에서 홍종민기자가 선언문을 읽고 있다. ⓒ이부영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 국제연합 창립일(유엔데이)인 공휴일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 이전에 몇차례 있었던 언론자유선언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동아 언론인들 입장에서는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유신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은 정말 뜨겁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동아의 지면과 전파를 통해 오랫동안 보도가 통제되었던 수많은 시국사건들이 제대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동아가 앞장서서 자유언론을 실천하자 다른 신문 방송들도 따르려했다. 그러나 1974년 연말에 다가서자 동아일보의 지면에서는 점차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의 동아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성탄절 임박해서는 완전히 광고가 사라졌다. 사라진 백지 광고지면에는 민주주의 회복, 구속자 석방, 유신헌법 개정, 학원의 자유 등을 기원하는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지광고 지면에는 민주주의의 성찬(盛饌), 축제가 벌어졌다. 세계 언론사에 전례가 없는 백지광고 탄압사태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노조의 대변인(섭외부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동아일보사로 찾아오는 국내외의 외신기자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다. 기자 자신이 취재원이 된 것이다.

1975년에 들어서자 동아일보사 내외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사주 측을 압박하여 자유언론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이 백지광고탄압의 공공연한 의도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주 측은 2월에는 기구축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기자들이 소속된 부서를 없애면서 해임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 해임.징계했다. 동아의 언론인들은 제작거부를 하면서 사내 농성에 들어갔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사주 측은 폭력배들을 동원, 농성하던 남녀 언론인들을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외로 내쫓았다. 유신정권과 이에 야합한 동아 사주가 합작하여 동아언론인들을 축출한 것이었다.

동아언론인들의 35년에 걸친 거친 들판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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