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세대보다는 여전히 '계급'이나 '계층'이 중요하다는 반론이 곧바로 제기됐다. 또한 20대 남성의 정부-여당 지지 철회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단순히 '우경화'로만 바라볼 수 있느냐는 이견도 잇따라 제출됐다. 모처럼 한국 사회 불평등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갑자기 봇물처럼 터진 논의가 좀 어지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출간된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생각의힘, 2020)는 이런 산만한 논의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반가운 저작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20대(90년대생)에게 유독 무겁게 다가오는 불평등이, 그럼에도 왜 세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계급-계층과 세대, 역사와 구조를 교차시킴으로써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미 <프레시안>도 <세습 중산층 사회>의 이런 기여에 주목하는 서평 기사를 실은 바 있지만("세대론은 거짓, 중산층 세습이 진짜 문제다", 2020. 1. 18), 이에 더해 이 지면을 통해 이 책을 읽고 든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 싶다.
<세습 중산층 사회>가 그리는 '세습 자본주의'의 총체적 모습
<세습 중산층 사회>는 지금의 20대가 한국 사회에서 유례없는 불평등을 체감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 전체가 앞 세대가 만들어놓은 불평등의 희생자가 됐다는 서사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 이 책은 오히려 최근 각종 언론 특집 기사들을 통해 익숙해진 이러한 서사를 비판하고 해체한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 불평등에 대한 보다 정교한 진단을 내놓는다.
20대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20대가 다른 어떤 사회 집단보다 더 불평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이는 20대가 이전 어느 세대보다 더 현격하게 양극화돼 있기 때문이다. 도식화한다면, 안정된 중산층의 삶이 보장된 10%의 G(글로벌)세대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안정된 삶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체념하는 90%의 N포(이른바 '3포'의 무한 확대)세대로 나뉘어 있다. 과거에도 물론 세대 내 격차는 존재했지만, 문제는 격차가 유례없이 확대됐다는 것이고 이후 생애에서 역전을 꾀할만한 출구가 모두 닫혔다는 것이다.
아니,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습 중산층 사회>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20대 내부의 격차가 실은 그들 부모 세대인 50대(60년대생)의 격차를 고스란히 세습한 결과라는 점이다. 흔히 '86세대'라 지칭되는, 현 20대의 부모 세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기를 살았다. 이 과정에서 이 세대 중 일부는 대졸 학력을 취득하고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으로 장기근속하며 '똘똘한 한 채'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상위 10% 중산층' 대열을 형성했다.
지금 이 중산층이 자녀 세대에게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불과 10여 년 전에 사회에 진출한 30대와도 크게 비교될 정도로, 20대는 사회 진출 시점에 이미 부모의 지위(10%냐, 90%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세습의 주된 통로는 집중적인 교육 투자를 통한 학력=학벌 자본 획득과 수도권 소재 부동산 상속이며, 이런 토대를 갖춘 이들이 이중 노동시장에서 일찌감치 '내부자(정규직-대기업/공공부문)'로 진출해 앞으로도 이를 독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내놓은 병명이 '세습 중산층 사회'인 것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를 손에 든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저자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 불평등을 다룬 최근의 수많은 연구들이 이 책에 망라되어 있고, 저자는 이 모든 연구의 성취와 한계를 꼼꼼히 짚으면서 각각의 시야만으로는 그릴 수 없었던 전체상을 그려낸다. 세대를 주제어로 삼은 언론 특집이나 학술등재지에 논문 한 편으로 발표된 연구 결과에는 부분이나 파편으로만 존재하던 진실이 저자의 손길을 거치며 '세습 자본주의'라는 총체적인 모습에 가까워진다.
이런 예외적인 노력을 거치기 전의 대다수 분석이나 해명은 자칫 그릇되거나 헛된 정치적 시도로 이어지기 쉽다. 가령 '불평등의 세대'만을 지적하는 논의는 두 가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는 선의에서 비롯된 공허한 대안이다. 세대 간 불평등이 문제이니 기득권을 누리는 세대가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정작 중요한 세습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젊은 세대 중 '10% G세대'에게만 없던 기회까지 더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도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80년대 학번-60년대생이 세대 차원에서 양보를 하고, 기득권을 떼어내 아래 세대에 준다 할지라도 지금의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사회가 20대를 배려해 번듯한 일자리를 늘린다 할지라도, 그 기회는 대부분 세습 중산층의 자녀들이 차지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양보는 그들 중 일부가 노동시장에서 몇 년 앞서 은퇴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자녀들이 노동시장에 안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세습 중산층의 첫 세대인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60년대생의 자녀들에게는 '합법적'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 290쪽)
물론 이런 대안의 공허함도 요즘 정치권이 벌이는 쇼와 비교하면 공허하다 하기 뭣할 정도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은 '청년들'을 위한답시고 젊은 변호사, 스타트업 기업 대표, TV에 몇 번 출연해 이름을 알린 인사들을 '인재'라며 영입하고 있다. 이런 행태야말로, 20대의 절대 다수가 그런 '인재'들이 뚫고 들어간 비좁은 출구를 딴 세상 이야기인 양 쳐다만 봐야 하는 게 문제의 본질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푸닥거리다.
그런가 하면 더 심각한 또 다른 위험이 있다. 악의에 바탕을 둔 파괴적인 선동이다. 만악(萬惡)의 근원인 86세대에 맞서 젊은 세대가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담론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은 예외 없이 '민주주의'나 '노동조합'처럼 새 세대가 자기 무기로 바꿔 사용해야 할 역사적 자산들을 오히려 적들의 무기로 몰며 파괴하라 다그친다. 아마도 21세기 한국형 파시즘의 맹아가 이런 모습일 것이다. 다만 이를 추진할 극우 세력이 아직은 낡고 무능하기만 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 모두는 한국 사회 불평등의 전체상을 시야에 담지 못하는, 혹은 애써 이를 회피하려는 논의의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오직 세습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형상을 대중에게 명확히 제시하려는 노력만이 이런 불길하고 심란한 흐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습 중산층 사회>는 참으로 제 때에 우리에게 도착한 지적 성취이자 정치적 안내도(案內圖)다.
세습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 - 생태 전환과 평등 실현은 하나다
그럼 어떻게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벗어날 것인가? 저자는 교육을 중심으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함과 동시에 10%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대안]은 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최소 수준에 대한 합의와 그에 따른 적극적인 세원 확보다. 노동시장의 변화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부조하자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도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중요하다. 또 재원 마련을 위해 현재 노동시장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상위 10퍼센트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 (위의 책, 292쪽)
세습 자본주의를 뒤집을 방안으로는 너무 소박하다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출발점으로는 정확하다 생각한다. 우선은 '10% 중산층'에게 더 많이 과세해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지게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롭게 마련된 재정 기반을 세습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 구조를 구축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가령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해 그 세수로 사회주택 부문을 확대함으로써 주거 구조를 개혁해야 하며, 법인세에 부가하는 형태로 고등교육세를 신설해 그만큼 늘어난 재정으로 평준화, 무상화의 방향에서 대학을 개혁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재정 기반이 확대되면, 산업-복지 정책을 위해 더 공격적으로 적자 재정을 운영할 여지 또한 그만큼 더 커진다. 세습 중산층 사회가 굳어지는 꼴을 두고 보지 않으려는 어떠한 노력도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중산층 지위 세습이 이뤄지는 최종 관문인 노동시장부터 손보려는 시도는 늘 미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도 지적하듯이, 임금 피크제나 직무급제 도입 시도는 애초 목표와는 상관없이 노동시장의 최대 약자에게만 더 큰 피해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중 노동시장이야말로 세습 자본주의 체제의 중핵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다.
왜 그러한가? <세습 중산층 사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중 노동시장을 비롯한 세습 자본주의의 모든 구조는 한국 사회가 박정희 시대의 돌진적 산업화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지구 자본주의에 적응하며 누적해온 역사적 선택들의 결과다. 그 경로의 끝에 지금 세습 자본주의가 서 있다. 세습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이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 경로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실패'보다는 '성공'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10% 중산층'은 그 안에서 계속 자신들이 이기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슬프게도 이 경로는 안에서부터 뒤집어질 가능성이 없다. 그럴 가능성은 아마도 1980년대의 젊은 혁명가들이 꿈꾸던 '민중 민주주의 혁명'론이 기업별 민주노동조합의 현실에 추월당한 그때에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정규직이나 86세대가 양보해야 한다는 논의는 어쩌면 이렇게 영원히 사라진 기회(그런 게 있었다고 가정하면)를 향한 회한의 표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습 중산층 사회가 현재의 50대-20대 간 세습을 넘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자포자기하기는 이르다. 세습 자본주의로 치닫고 만 기존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로가 안에서부터 뒤집어질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의 한 쪽 얼굴이라면, 다른 쪽 얼굴은 그 산업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초래한 위기들, 즉 기후 위기, 장기 침체, 패권 격돌 속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이제껏 인류의 어떤 문명도 피하지 못했던 쇠퇴와 몰락의 숙명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구 자본주의의 일부인 한국 자본주의 역시 이 공동 운명의 한 당사자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기존 경로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그린 뉴딜' 등의 이름으로 기후 위기에 맞서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는 외침이 더욱 커지고 있다. 어쩌면 답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존 경로 안에서 기득권층의 사회적 책임을 압박하고 새로운 산업-복지 정책의 재정 회로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생태적 전환을 통해 기존 산업화와는 다른 역사의 경로를 열어나가는 것. 이것이 세습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우리 시대 변혁 전략의 큰 줄기가 아닐까. 또한 그렇기에 이제 생태 전환과 평등 실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목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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