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죄명도 없이, 심문 기록도 없이 소멸됐다"

[프레시안 books]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한반도 남쪽에 반쪽짜리 정부가 들어선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선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여수 신월동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군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일으켰던 봉기가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봉기군은 1948년 10월 19일 봉기 하루 만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다. 인근의 보성, 벌교, 고흥도 빠르게 술렁였다. 민족 분단을 낳는 남한만의 단독정권 수립과 친일파 경찰에 대한 거부감은 14연대 사병들과 지역민들이 봉기에 참여한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삶과 죽음 가른 '손가락 총'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주도로 출동을 앞둔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은 이런 명분을 내걸고 총을 잡았다. 14연대 병사들은 여수를 7일 동안, 순천을 3일 동안 점령했지만 2연대를 주축으로 한 진압군의 공세에 밀려났다. 문제는 정부군의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협력자' 혐의를 쓰고 죽었다는 점이다.

희생자들에겐 무죄를 증명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도록 했다. '협력자'란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운동장으로 나갔던 사람들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가른 것은 '손가락 총'이었다. "저놈이야"라고 가리키면 끌려나갔다. 제대로 된 심문도 없었다. "너 빨갱이지?"라는 윽박지름과 폭행이 이어졌다. 형식적이나마 재판 절차도 밟지 않은 채 운동장 한구석에서의 마구잡이 학살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즉결처형이었다.

▲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서 학살당한 희생자 앞에서 통곡하는 두 여인과 이들을 바라보는 미군 특수부대 고문관. ⓒ칼 마이던스

71년 만에 빛 본 마이던스 사진집

신간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칼 마이던스 지음,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역, 지영사 펴냄)은 여순사건 당시의 학살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사진집이다. 칼 마이던스(1907~2004)는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라이프(LIFE)>지 도쿄 지국장을 지낸 전설적인 포토 저널리스트다. 1944년 10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레이테 섬 해안에 상륙하는 모습, 1945년 9월 미주리호 함상에서 벌어진 일본군 항복 조인식 등이 마이던스가 남긴 사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마이던스는 현지 특파원으로서 살벌했던 현장의 모습들을 필름에 담아냈다. 그리고는 '한국의 봉기(Revolt in Korea)'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지에 실었다(1948년 11월 15일 발간). 지난 70년 동안 한국에서는 여순사건 관련 사진들이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들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알려져 왔기에 아쉬움이 컸다.

그런 아쉬움이 71년 만에 풀렸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사장 김병호)가 '라이프 타임'사와의 협의를 거쳐 마이던스의 여순사건 관련 사진 모두를 얻어냈고, 그 가운데 98장을 골라 사진집으로 펴냈다. 제주 4.3 사건과 더불어 여순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새로이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더불어 특별법 얘기도 나온 지도 여러 해가 됐다. 마이던스의 이 사진집은 국가 폭력의 민낯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여순사건을 제주 4.3처럼 민간인 희생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끌고 있다.

살벌했던 '협력자' 색출 모습들

마이던스의 사진집은 크게 2부로 이뤄져 있다. 제1부는 진압군의 이동과 전투 장면, 여수와 순천 현지에 와서 진압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던 미군 장교들의 모습들을 담았다. 제1부의 사진들 가운데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제2연대 병사들, △미군이 제공한 군수물품을 지게로 나르는 민간인들, △여수 14연대 본부를 점령한 뒤 포획한 연대기를 들고 웃고 있는 미군 장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논란거리는 국가 폭력에 따른 민간인 희생을 다룬 제2부다. 여기에는 민간인들이 피난을 가는 모습도 담겨 있지만, 더 많은 사진들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협력자' 색출과 마구잡이 학살 모습을 보여준다. △아기를 업은 채 두 손을 들고 걸어가는 아낙네, △공놀이하던 중에 봉기군에 협력했다는 오해를 받고 두 손을 든 채로 심문당하는 중학생들 △학교 운동장에 모여 불안에 떠는 여성과 어린이들, △남편이나 아들이 '협력자' 심사를 받는 모습을 멀리서 애타게 바라보는 부녀자와 노인들의 모습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파진다. 문득 나치 독일군 앞에서 두 손을 든 유대인 꼬마의 사진이 떠오른다.

사진집 후반부엔 죽음에 이르는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 보인다. △연행 과정에서 맞아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자 △혁대와 상의가 벗겨진 채 꿇어앉아 울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말하는 남자들 △등에 매질을 당한 상처가 뚜렷이 보이는 '협력 용의자' △두 손을 든 채로 심문을 기다리는 엄마 곁에 꼭 붙어선 꼬마가 인상적이다. 이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의 내면을 꿰는 공통점은 다름 아닌 절망감이다.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헬멧으로 부딪쳤다"

가해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연행자들을 내려다보는 경찰과 청년단원들 △헬멧으로 협력 의심자의 머리를 들이받는 경찰 △심문이 끝난 맨발의 '협력자'를 총으로 내몰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경찰 등이다. 마이던스는 기본적으로 사진작가이자, 기사를 작성하는 현장 리포터이기도 했다. 그는 순천농림학교에서 벌어졌던 협력자 색출과정을 이렇게 썼다.

"운동장에 흩어진 작은 집단 속에서 군인과 경찰들은 총대와 곤봉으로, 무릎 꿇려진 사람들에게 자백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한 경찰관은 어깨에 총을 늘어뜨리고 일본군 헬멧을 쓴 채 희생자들의 주위를 돌며 환상적으로 왔다갔다 춤추며, 그 사내가 기진맥진하여 드디어 '자백'을 할 때까지 그 사내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헬멧 쓴 머리를 얼굴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고 나자 그는 자백을 한 다른 사람 전부와 똑같이 운동장 저쪽에 있는 호 속에 쳐 넣어지고 총살되었다.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가도 기록되지 않고 그렇게 소멸되었다."

집단으로 처형된 희생자들, 아빠의 죽음을 확인하고 울부짖는 소녀와 넋을 잃은 채 앉아있는 아낙네, 특히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두 여인을 뒤에서 바라보는 미군 특수부대 고문관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이다. 사진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고 참혹하기에, 눈을 떼기도 다시 바라보기도 어렵게 만든다.

"또다시 이런 세기가 주어진다면"


좌와 우라는 이념의 잣대로 재려 든다면, 제주 4.3사건과 마찬가지로 여순사건도 좌냐 우냐의 경계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하다.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을 떠나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국가 공권력이 휘두른 마구잡이 폭력에 희생됐다. 내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까닭도 모른 채 '빨갱이' 낙인 아래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이들뿐 아니다. 유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이란 극단적인 반공 이념의 굴레가 씌워진 채 지난 70년 세월을 통한의 침묵 속에 슬픔을 삼켜야 했다.

"저놈이 협력자다"라고 가리키는 이른바 '손가락 총'에는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다고 알려진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청의 차석검사였던 박찬길도 억울한 희생자 가운데 하나다. 봉기군에 협력해 인민재판장을 지냈다는 혐의였다. 훗날 그 혐의는 그를 미워하던 현지 경찰이 조작한 것임이 드러났다. 여수여자중학교 교장 송욱은 '여순 반란군의 총지휘자'란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여순사건을 다룬 일부 책에는 이들의 혐의가 지금도 사실인 양 적혀있다).

검사나 교장처럼 그 나름으로 연줄을 찾아 구명운동을 펼만한 사람들조차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면, '협력자'로 찍힌 민초들은 어떠했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야말로 잡풀이 짓밟히듯 죽어갔을 것이다. 어찌 죽음의 무게가 휴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마이던스도 그의 리포트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
또다시 이런 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어찌해야 좋을 것인가?"

제주 4.3처럼 여순사건 특별법 바람직

여순사건의 민간인 희생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지역 사회단체에서는 1만 명쯤이라 말하지만, 정확한 규모는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을 거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순사건의 배경이었던 제주 4·3사건은 지난 2000년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4년부터는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다. 제주 4·3사건은 국가 차원의 지원 아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여순사건의 실체적 진상규명이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제16대, 18대, 19대 국회에서 특별법이 발의되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지금의 제20대 국회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개 특별법안이 발의되었지만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이렇다 할 논의 없이 잠자는 중이다. 여순사건의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지역민들은 특별법을 통해 오랫동안 응어리진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길 바라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국가 폭력을 다룬 마이던스의 사진집은 여순사건 특별법이 왜 필요한가를 거듭 말해주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칼 마이던스 지음,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역) ⓒ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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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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