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 "속는 사람은 사물로 바뀐다"

[최재천의 책갈피]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속는 사람은 사물로 바뀐다(미하일 바흐친, 1943)."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은 세 단계를 거쳤다. 단계마다 미국의 취약성에 의존했고 러시아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첫째, 러시아인들은 파산한 부동산 개발업자인 트럼프를 러시아 자본의 수령인으로 바꿔 놓았다. 둘째, 파산한 부동산 개발업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해 성공한 사업가로 연기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2016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성공한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가공의 인물을 지지하기 위해 트롤과 봇으로, 의도적으로 개입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방식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국에 개입해 성공했던 수법의 재현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가공의 세계로부터 대통령 후보가 나타났을 때, 러시아인들은 익숙한 양상에 주목했다. 하지만 미국 우파나 좌파에서는 귀를 기울이는 이가 거의 없었다. 미국은 패배하고 트럼프가 당선됐다. 공화당은 눈이 멀고 민주당은 충격에 빠졌다. 정치적 허구를 제공한 건 러시아인들이었지만 요청한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통치자로서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푸틴 대통령은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이때, 그가 재발견한 인물이 바로 이반 일린. 일린은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예외로 취급했다. 러시아의 순결함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극단적인 민족적 예외주의다. 그렇게 창조된 푸틴의 통치 이념은 "러시아는 제국으로 만들고 다른 모든 나라는 민족 국가로 두자는 것이었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2010년대에 세계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변해 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특한 개념인 '필연의 정치학'과 '영원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필연의 정치학은, 미래는 단지 더 많은 현재이고 진보의 법칙이 밝혀졌으며, 다른 대안은 전혀 없으므로 실제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다. 영원의 정치학은, 전체론적, 순환론적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보란 일시적이고 역사는 순환하며, 유기체로서의 전체인 민족만이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필연과 영원의 정치학이 현대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괴기한 사상, 독특한 민족주의, 전체주의적 권력, 그리고 검증이 불가능한 거짓 정보들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위협한다.

표현의 자유,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 이에 근거한 합리적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원리라는 민주주의 뿌리가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시민은 이를 모른다. 위기다. 우리가 그렇다.

▲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유강은 옮김)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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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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