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신부였다

[최재천의 책갈피] <파란>

1836년 2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세상을 떴다. 부고를 들은 처가 쪽의 먼 친척 홍길주가 말했다. "그가 죽다니, 수만 권의 서고가 무너졌구나."

다산은 가톨릭 신부였을까. "그렇다." 저자 정민의 답이다.

1786년 조선, 가톨릭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이승훈은 10명의 신부를 직접 임명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인 없이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제도라 하는데, 가는 '임시'라는 뜻.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공식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등 5인뿐이고, 별도의 기록에 두 사람이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세 사람은 누구일까.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 다산은 신부였다."

저자는 어쩌자고 이런 '과격한' 주장을 드러냈을까. 서문을 인용하는 것이 유용하다. "지금까지 다산 연구에 중간은 없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다산이 한때 배교했지만 만년에 회개해서 신자로 죽었고, 국학 쪽에서는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로는 온전한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했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은 일반적인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배교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진실은 중간에 있는데 전부냐 전무냐로 싸우면 답이 없고, 다산의 정체성만 흔들린다.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있어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

사람들은 다산에게서 완전무결한 지성을 보려 하고, 일말의 흠집조차 용인치 않으려 든다.

10년 전 강진에서 열린 다산 학술 행사에서 저자가 겪었던 일화다. 발표 중에 '다산초당 시절 다산이 풍을 맞아 마비가 왔을 때 두었던 소실댁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딸 이야기'를 잠깐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어떤 이가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그만 좀 해두시지요. 뭔 좋은 소리라고 그런 말을 합니까?" 저자는 신화화된 미신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는 살아있는 다산, 우리와 같은 인간적 흠결을 지닌 다산을 만나고 싶어 한다.

다산은 세 차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천주교와 정조, 그리고 강진이다. 다산의 생애는 유배 이전과 유배 시기, 그리고 해배 이후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청년 시절, 강진 유배, 해배 후가 각각 18년이다. 책은 다산의 청년 시절, 천주교와 정조를 만났던 열여덟 해를 치밀하게 직조했다. 고맙도록 멋진 책.

▲ <파란1, 2>(정민 지음)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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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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