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 우린 사회주의자요. 아직? 아니 지금이야말로!

[장석준 칼럼] '기회의 공정'은 허구, '보편적 평등' 외치자

2주 전에 조국 법무부장관 지명자를 둘러싼 논란에 글 한 편을 보탰는데, 법무부장관 임명 절차가 끝난 지금도 이 논란의 여진이 가실 줄 모른다. 그만큼 역사적인 논쟁이었다. 이 나라 시민이면 누구나 찬성인지 반대인지 답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고, 평소 사회과학자들이 내놓는 진단 못지않은 무게 있는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조국 지명자가 발단이 된 논란임에도 화제가 너무나 광범하게 확산됐다. 마치 대한민국의 문제라는 문제는 다 불거져 나오는 듯싶었다. 검찰 공화국의 어둔 속살이 새삼 조명됐고, 입시 논란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공정 경쟁을 향한 불만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는 '계급'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이야기 거리가 너무 많아 탈인 지난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기사와 분석, 담론과 행동들 속에서도 내게는 비어 있는 뭔가가 더 도드라져보였다. '있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인 시국이었지만, 도리어 '없는 것' 하나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없는 것' 한 가지 때문에 그 수많은 '있는 것'들이 전부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없는' 그것이 '있는' 모두를 텅 빈 존재로 만드는 꼴이었다.

생각만 해도 어지럽고 복잡했던 조국 지명자 논란에서 도대체 무엇이 비어 있었다는 말인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인 조국 논란

조국 장관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검찰 개혁 필요성을 앞세웠다. 검찰이 뜻밖에 법무부장관 지명자 가족 수사에 들어가고 언론에 수사 내용을 흘리자 이 목소리는 더욱 격해졌다. 이런 그들에게 조국 지명자 가족의 삶에서 드러난 중산층 지위 세습에 대한 분노는 검찰 개혁이라는 다급한 과제에 비하면 투정에 불과했다. 서울대, 고려대 등에서 벌어진 촛불 시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이 대체로 그러했다.

그런데 정녕 검찰이라는 비선출직 관료 권력을 개혁하길 바란다면, 엘리트 계층의 특권 세습에 반발하는 외침에 과연 그토록 거리감을 느껴야 했을까? 둘 다 민주공화국의 규범에 어긋나는 엘리트층의 존재 방식과 영향력에 맞서고 있지 않은가? 동일한 최상층을 조준하면서도 서로 동지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조국 장관 비판자들(자유한국당 열혈 지지자들은 제외하고)은 무엇보다 편법이나 반칙이라 생각되는 방식으로 자녀에게 학벌을 세습하는 행태를 참을 수 없어 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여기에서 자신들도 참여하고 있는 입시-취업 경쟁의 불공정성을 보았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던 문재인 정부의 약속이 정권 핵심 인물 혹은 주된 지지층에 의해 배반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급기야는 최순실-정유라를 상기하며 촛불까지 들었다.

그런데 불만의 목소리는 '공정성'이라는 한 단어만을 맴돌았다. 이와 겨룰만한 다른 말들은 좀처럼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최상위권 대학 입시 경쟁에 함께 뛰어들었던 이들만 불만의 주역인 듯 보였다. 그 경쟁에 아예 끼어들지 못한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공정한 경쟁'을 외치는 자리에서 왠지 낯설음을 느껴야 했다.

어느 쪽이든 뭔가 겉도는 것만 같았다. 전에 없던 말의 성찬이 벌어졌는데 정작 꼭 필요한 말은 빠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양편 모두 자신의 한계는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맹점만을 손가락질했다.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며 어지럽게 제자리를 돌기만 했다.

비어 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보편적 평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이념-운동이었다.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게 아니라 경쟁을 통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가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흐름이 안 보였다. 검찰 엘리트와 강남 중산층이 1등 시민이 되고 나머지는 2등 시민이 되는 현실을 뒤집는 게 진짜 개혁이라고 밝히는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런 이념-운동이 강력히 존재했다면, 이번 논란은 사뭇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실은 이런 방향의 문제제기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입시 경쟁 공정성이 아니라 대학 서열 구조를 문제 삼는 눈 밝은 이들이 있었다.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실은 사이비 평등주의인 능력주의의 표현일 뿐이라는 시원스런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주장이 거대한 흐름으로까지 대두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지난 한 달 우리의 언어는 지나치게 풍성한 듯싶으면서도 실은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자본주의의 당연한 광경일지 모른다. 돈만 많으면 타인을 마음껏 지배해도 되는 사회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명제만큼 허망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시험만 잘 보면, 학력(=학벌) 증서만 갖추면, 돈 많은 자들 대열의 꽁무니에라도 낄 수 있는 사회에서 평등을 외치며 가장 약한 이들과 함께 하자는 게 얼마나 가당치않은 주장인가. 그러니 평등을 주장하는 흐름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전제하는 민주공화국이란 조만간 빈 껍데기로 전락하고 말 운명이다.

한데 놀라운 일이 있다. 곧바로 무너졌어야 마땅한 민주공화국들이 아직도 그런 식으로 무너지지는 않고 있다. 그것도 우리보다 훨씬 먼저, 더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질서 아래 있는 나라들에서 그렇다. 세대 간 계급 재생산을 거의 처음 경험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이미 몇 세대를 계급 사회에서 살아온 대서양 양쪽 나라들 말이다. 물론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삐걱대고 있지만, 그래도 드러내놓고 귀족 지배 체제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존재하는 게 더 이상할 그 이념-운동, 즉 보편적 평등을 요구하는 흐름이 이상하게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노동조합을 결성해 이미 안정된 지위를 얻은 노동자들이 그런 권리의 확대를 요구하기란 힘든 일이다. 우리도 겪어서 아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운동이 자라났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장을 갖춘 지식인들이 가장 취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삶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란 힘든 일이다. 우리에게도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이념이 확산됐다. 이런 뜻밖의 이념-운동이 출현한 덕분에 민주공화국들은 속절없이 후퇴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이념-운동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진정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길은 체제가 가르쳐준 바와는 달리 경쟁이 아님을 터득했다. '경쟁'의 자리에 들어가야 할 다른 말은 '연대'였다. 경쟁이 지배하는 시장도 아니고 명령의 세계인 국가도 아닌 사회 연대 속에서 마침내 대중의 상당수는 결코 낙오됨 없이(평등하게) 자신일 수 있는(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이념-운동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름 하나가 붙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주요 정치세력 중 오직 자유한국당만 쉽게 내뱉는 말,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일상어가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치부되는 말,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보편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이념-운동의 부재

이번 논란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맨 처음과 마지막에 잠깐 출몰했다. 조국 지명자의 전력을 들먹이는 극우 언론 지면에 잠시 나타났고, 인사청문회 끝 무렵에 자유한국당 의원과 지명자 사이에 오간 공방에서도 언급되고 지나갔다.

그러나 논란의 중요한 쟁점들과 섞이지 못한 사회주의란 지나간 옛 추억의 어휘에 다름 아니었다. 누군가 이 네 음절을 발음하더라도 관료 권력 해체나 특권 세습 타파 같은 현안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치부되는 죽은 언어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이 어찌 이 모양이 됐을까? 따지고 보면, 여기에 86세대 지식인-운동가 상당수가 이 사회에 남긴 가장 커다란 잘못이 있다. 이른바 세대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지성사다. 한국 지성사에서 86세대에 속하는 한 무리의 지식인-운동가들은 이후 한국 사회의 숱한 가능성을 제약하게 될 커다란 구멍 하나를 남겨놓았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부재라는 구멍이다.

1980년대에 일단의 젊은이들은 어쩌면 너무 쉽게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들은 그보다도 더 쉽게 사회주의를 폐기해버렸다. 그들은 소련, 중국, 북한의 국정 교과서에 정리된 교조적 체계를 정통 사회주의라며 수입했다. 그러더니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자 자신들이 받아들인 교과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전체를 내다 버렸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주의'라면 여전히 대중의 살림살이와는 거리가 먼, 한물간 외국 이론을 뜻할 뿐이다. 이것은 결코 유서 깊은 반공 교육만의 업적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이런 어두컴컴한 구멍으로만 남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이 말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이 오래도록 무장 해제 상태에 있어야 했다. 그들은 가장 뚜렷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표어 없이 자신들의 요구를 정리해야 했다. 그것은 저마다의 권리 확대가 어떻게 사회 전체의 전진으로 이어지는지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기다란 목록에 불과했다. 잘못 읽으면 그것은 어느 항목이 더 위에 있어야 하는지를 놓고 끝없이 다퉈야 하는 화근 덩어리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저항자들은 그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독자적 세계관을 박탈당했다.

물론 '사회주의'라는, 어쩌면 역사의 온갖 피딱지와 오물이 덕지덕지 붙은 네 음절에 지나치게 집착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평등한 자유의 실현과 그 기본 전제인 사회 연대를 표현할 다른 말을 고안해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대체 용어가 아직 준비돼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감히 이 오래된 표지를 내세우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멍은 메꿔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던 말들은 재정리돼야 한다. 다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1단계 혁명이니 2단계 혁명이니 하는 번잡한 논의를 되살리자는 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전위정당이니 하는 낡은 개념들을 다시 시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재정 확장을 통해 기초연금을 지금 당장 최소한 50만원은 넘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고, 입시제도나 끝없이 뜯어고칠 일이 아니라 대학 평준화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학력과 성별, 고용 형태와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하고 있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반문하기도 한다. 86세대에 가까운 지식인-운동가일수록 더욱 강한 어조로 반문한다. "뭣 하러 이런 구체적 요구들에 '사회주의'란 딱지를 덧붙여 논란이나 공격만 자초하려 하는가?" 심지어는 진보정당 안에서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표지'다. '이름'이다. '깃발'이다. 상징 자원이 빈곤한 이들일수록 이런 자신만의 상징은 참으로 소중하다. 당장에 다른 표지를 내놓지 못할 바에는 이미 있는 표지를 내세우려는 노력을 뒤로 미루거나 가로막아선 안 된다. 경쟁의 공정성이 아닌 평등 사회 실현을 대변할 표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한 마디로 요약할 표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부자와 권력자들보다 더 민주공화국에 어울리는 존재임을 자부할 뒷심이 되는 표지. 지난 200여 년 동안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런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가 대한민국에서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더는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자. 헬조선은 자본주의의 과잉 탓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결핍이 지옥을 더욱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부재다.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 아직도? 아니 지금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조국 대전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에 인터넷에는 한 유명 저자의 신간 광고가 떴다. 금융화 이후 전 지구적인 자산 격차 심화와 그에 따른 불평등 구조를 비판한 <21세기 자본>(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2014)의 저자 토마 피케티가 새 책을 냈다는 것이었다. 제목은 '자본과 이데올로기'. 국내 언론도 이 책이 기본소득제를 넘어 기본자산제 같은 정책 제안을 담고 있다며 발 빠르게 소개 기사를 냈다.

그런데 내년 출간이 예정된 영역본의 소개글을 보면, 피케티는 새 책에서 자신의 정책 제안들을 아울러 "참여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라 제시한다 한다. 책을 직접 읽지 않았으니 단정하기는 이르나 소개글에서 이 점을 강조한 것 자체가 시대 정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두 세기 동안 민주공화국들의 죽음을 저지한 힘은 이 표지 아래 모였던 보통 사람들의 불굴의 노력이었음을 세계 곳곳에서 다시 환기하고 있다는 징표이고, 신자유주의의 쇠퇴 이후 역사의 후퇴를 저지하려면 이 힘을 부활시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징표다.

이제 한국 사회도 이 보편적인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구 자본주의라는 보편성만 받아들인 채 그에 맞설 사회주의라는 보편성과 한사코 거리를 둔다면, 우리는 검찰 공화국, 강남 공화국, 삼성 공화국이라는 가장 보편적이지 않은 현실을 대대손손 등에 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 더 많은 '우리'도 같은 생각이리라 믿는다. 그래서 이제껏 어리석게 참아온 만큼 앞으로는 더욱 시끄럽게 떠들려 한다. 한국 사회에도 드디어 거대한 흐름이 되어 나타나도록 지겹게 외치려 한다. 보편적 평등의 약속, 경쟁이 아닌 연대라는 출구, '사회주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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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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