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결국 '선을 넘었다'. 반도체 소재 3개 핵심 부품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뒤 한 달 만인 지난 8월 2일, 일본이 각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가 1194개 품목의 전략물자 수출에 대해 그 동안 포괄적으로 허가해 왔던 것을 개별적으로 심사해 허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경제에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산업 분야를 겨눠 일본 정부가 생사여탈권을 갖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무역전쟁'을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조치에 대한 일본의 공식 설명은 안보상의 신뢰를 이유로 무역관리체제를 재검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출규제로 인해 자국 수출기업이 입게 될 직접적인 피해와 글로벌 밸류 체인을 교란함으로써 예상되는 간접적인 피해까지도 감수한 일본의 조치가 단지 '무역관리체제의 검토'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일본의 의도에 대한 분석이 분분하다.
크게 두 가지 배경과 두 가지 원인이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국민 정서라는 배경이다. 일본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군불처럼 달아오르던 혐한 논리가 조선멸시로 번지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BTS와 트와이스 등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로 표현되는 제3차 한류 속에서 비록 대중 수준에서는 잦아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베 총리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내재화한 조선멸시 정서가 한국 특수론의 형태를 빌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조선멸시의 핵심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적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약속 체계인 만국공법의 선생이 되어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조선이 먼저 교화의 대상이 되었다.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실천의 장이었다. 이후 우리의 정당한 주권 행사를 약속 파기로 문제 삼아 야금야금 침탈해 들어온 것이 한반도-일본 관계의 근현대사였다.
둘째는 구조적 배경으로, 국력의 수렴이라는 현실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의 1인당 GDP 차이는 9배에 달했다.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제공한 무상 3억 달러는 당시 한국 정부예산 31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일본은 1964년 이미 OECD 가입을 마친 상태였고, 1968년에는 독일을 제치고 GDP규모 세계 2위 국가로 올라 선 반면, 한국은 1960년대 내내 1인당 GNP에서 세계 60위권을 맴돌았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것은 일본에 32년 뒤진 1996년의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제품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한국이 일본을 따라 잡으려면 30년 걸린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한국이 2000년대에 들어 철강, 조선, 반도체 등 일본이 오랜 기간 독점적으로 우위를 점하던 분야에서 일본을 제치고 선두 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이 강세를 보이던 소재 부품산업에서도 점차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이에 따른 사회보장비의 급증으로 재정 적자와 제로 성장이 만성화되었다. 현재는 한국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긴 하지만, 이 조차도 한·일의 수평적인 관계를 확인하는 저울이 되고 있다. 이번 조치의 배경에 경제산업성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번 조치는 액면 그대로 무역전쟁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저항
위의 두 가지가 최근 10여 년의 긴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아래의 두 가지는 지난 2018년의 한 해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급변사태를 이유로 한 것들이다.
먼저 지난 한 해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개시로 정전체제 종식의 역사가 시작된 한 해였다. 이에 일본은 시종 무대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평화프로세스를 방해했다. 평창올림픽의 개막을 축하하러 온 아베 총리는 한·미 연합훈련 재개를 요구하며, 세계의 평화 축전을 배경으로 막 시작된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반도 질서의 전통적 이해당사자 의식이 부활하는 장면이었다.
미국 워싱턴의 주류인 미·일 동맹주의자들을 동원해서 이에 저항하던 일본은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자 갑자기 북·일 정상회담을 기획하고 나섰다. 납치 일본인 문제가 가시가 되어 북·일 정상회담의 진행이 난망하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지분을 주장하며 일본이 내놓은 압박카드가 이번 수출규제조치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며 내 놓은 근거로 북한으로 전략물자가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을 예시했으며, 안전보장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전략물자 수출의 규제를 강화한다는 논리였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10월 30일의 대법원 판결이야말로 일본의 도발 행동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이 판결이 청구권 협정 2조 위반이라며 여러 경로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요구했고, 청구권 협정 3조에 따른 외교 협의와 중재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그것이 사법부의 판단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하여 거부해 왔고, 피해자들은 일본의 가해 기업을 상대로 재산 압류와 현금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해 포괄허가에서 개별적 허가로 바뀌게 되면서 걸리는 시간이 대략 90일이다. 압류 재산의 현금화에 걸리는 시간이 또한 그 정도로 예상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일본의 조치가 이 시점을 노린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오히려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일본은 이번 수출제한조치가 안 그래도 WTO 위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정치적 이유를 달 수 없는 입장이다. 그 경우엔 명백한 WTO 위반이 되기 때문에 일본은 그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고 있을 뿐, 일본의 속내는 우리 대법원 판결의 무력화에 있다.
경제 도발의 본질과 복합대응 전략
그렇다면 일본은 왜 이렇게 대법원 판결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피해자 몇 사람의 배상액이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도발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한·일 기본조약과 배상 원칙을 비켜서 체결된 청구권협정에 기초한 '1965년 체제'에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라는 판결이, 역사적 층위와 지정학의 전선을 모두 건드리면서 한·일관계의 시공간을 총체적으로 변경하게 되는 임계점에 한국과 일본이 도달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1965년 체제' 종식의 역사가 개시된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한·일관계의 변화 양상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위상과 역할을 가늠질하며 이에 극력 저항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의 도발이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두 개의 배경과 두 개의 원인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를 물리칠 해법도 수준별 대응을 복합적으로 운영하는 데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선은 단기적으로 무역전쟁 도발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야 한다. 우리 정부가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강력한 응전을 선포한 것은 당연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우리 기업과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159개 품목을 관리품목으로 지정해 맞춤형 대응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설명한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일단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일본 입장에서 추가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것은 명백한 WTO 위반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쉽지 않아 보인다. 저강도의 위기가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서 정부와 기업이 그물망 같은 소통과 협조로 움직이며 미리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소재 부품 산업 분야에서 중견 중소기업을 육성하여 대기업 위주의 산업생태계를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의 생태계로 개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더욱 강력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카드로 쓰는 것은 그 유용성과 도덕성 여부와는 별도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의 우방이 아니라고 한 이상, 우방간의 신뢰를 전제로 한 군사정보보호협정의 필요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보다는 연장시한인 8월 24일까지는 일본의 조치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우리 쪽에서 서둘러 협정 파기론을 꺼냈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입장을 선회한다면 오히려 우리 정부의 운신 폭만 좁힐 수 있다. 설사 이번에 협정이 자동 연장되더라도 실질적인 군사정보 교류를 중단하면 되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한편 '저팬 보이콧'의 움직임을 조직화하고 있는 시민사회도 우리 정부의 강력한 대응에 호응하고 나섰다. 구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부근에서 시민사회단체 600여 곳의 연합행사로 열린 '아베 규탄 시민행동' 3차 촛불 문화제에는 열대야에도 주최 측 추산으로 1만 5000명이 모여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사과를 전제로 한 새로운 한·일관계 수립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올해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임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주장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우리 국민이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5년 체제 종식의 역사적 전환에 서서
그래서 우리 정부가 앞으로 적극 대응해야 할 일은, '국제법 위반'을 둘러싼 법리 싸움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서 번지고 있는 조선멸시의 배경에 '국제법 위반'이라는 딱지 붙이기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이에 대해 적극 대응해 오지 않은 정부에 문제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집중해 있던 상황에서 투입 가능한 외교력의 한계가 있었을 수 있고,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에 대해 적극 반격해야 할 시점이다.
대법원 판결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불법으로 보는 우리 헌법에 합치할 뿐만 아니라,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대한제국과 일본의 모든 협약 및 조약을 원천 무효로 해석하고 있는 1965년 기본조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에도 합치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동안 이 조약에 대해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한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과 이를 용인한 관습법에 따라서도 국제법 위반일 수 없다. 오히려 가해 전범기업에 대한 외교보호권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이야말로 청구권협정 2조 위반임을 지적하고, 협정 3조에 입각해서 일본이 요구해 온 협의와는 별도의 새로운 협의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무역전쟁 도발은 '1965년 체제' 종식의 새로운 역사가 개시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이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게 하고, 청구권 문제와는 별도로 배상 책임의 소재 여부를 분명히 확정하는 외교전이 개막됐다. 일본의 이번 도발로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한·일 불평등조약 체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개정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그로부터 해방되어 1965년 새로 국교를 맺는 과정에서도 애초의 불평등성을 확실히 불식하지 못했다. 이제야말로 이를 시정하는 외교 대장정에 나설 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0년의 해에 한일 1965년 체제의 종식을 위한 여정에 나서는 것은 결코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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