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사고의 원인 조사와 개선책을 내놓는 방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두 개의 강연을 마련했다. <프레시안>은 안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제대로 된 사고조사 제도 및 절차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두 강연을 2회에 걸쳐 보도한다. 첫 번째 강연에서는 인간/시스템 공학을 연구하고 있고, 영국 사고조사기관에 자문을 하고 있는 전규찬 러프버러 대학교 교수가 우리보다 긴 역사를 거쳐온 영국의 사고조사 경험을 설명했다.
1999년 10월 5일 런던 패딩턴 역 근처에서 막 역을 출발한 열차와 시속 209km로 달리던 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29명의 승객과 양쪽 열차의 기관사 2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도 258명 이상으로 파악됐다. 영국 역사상 최악의 열차 사고로 꼽히는 패딩턴 열차 충돌 사고다.
사고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2000년 공개조사(Public Inquiry)가 진행됐다. 조사를 통해 신호의 가시성, 운전자의 교육 등이 직접적인 사고요인으로 지목됐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영국의 철도 민영화가 지적됐다. 충돌 등이 예상될 때 자동으로 비상브레이크를 거는 ATP(자동 열차 보호, Automatic Train Protection) 도입이 민영화 이후 비용 문제로 가로막혔다는 게 밝혀졌다.
공개조사 보고서는 사고 원인 파악을 넘어 철도 안전과 관련한 각종 제도 정비 대책을 권고했다. 조사 결과에 기반해 2003년 철도 안전 관련 법이 정비되고 철도안전표준위원회(Rail Safety and Standards Board)가 신설됐다. 2005년에는 철도 사고에 대한 독립적 조사기관인 철도사고조사부(Rail Accident Investigation Branch)가 설립됐다.
이 같은 대처는 영국 사회에서 축적된 경험에 의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국에는 이미 1915년 설립된 항공사고조사부(Air Accident Investigation Branch)와 1989년 설립된 선박사고조사부(Marine Accident Investigation Branch)가 있었다. 패딩턴 열차사고 조사와 권고는 이런 기관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다. 대응은 지속되고 있다. 2017년에는 또다시 의료사고조사부(Healthcare Accident Investigation Branch)가 설립됐다.
분야별로 독립적인 조사기관이 설립되어 안전과 관련된 대형 사고에 대처하는 영국과 달리 한국은 이제 막 첫발을 떼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3년도 더 지난 2017년 12월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이 시행됐고, 2018년 4월 이 법에 기초해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중심으로 사회적참사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
전규찬 교수는 100년이 넘는 영국 사고조사기관의 경험과 방법론을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사고조사기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이다. 이 때 독립성은 조직 편제는 물론 사법기관으로부터의 독립, 즉 수사와 조사의 분리를 의미한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사고조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또 전 교수는 영국의 사고조사 사후관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단추는 사고조사기관의 독립성
전 교수는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사고 경험으로부터 학습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사 과정에서 사고 관련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3년에 이탈리아에서 3000여명 정도가 탄 크루즈쉽이 쓰러져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어요. 영국에서 선박 안전과 관련해 오랫동안 활동한 분이 감옥에 있는 선장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어요. 저도 워크샵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분이 하고자 하는 말은 '진실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사고 관련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죠"
전 교수가 사고조사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사기관의 독립성이다. 이때 독립성은 조직 편제 면에서 독립적인 조사기관을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사법기관과의 분리도 중요하다.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는 수사와 사고원인을 찾아 대책을 마련하는 조사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조사기관이 인터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독립성이에요. '당신들이 공개하는 자료나 이야기는 범죄조사에 활용되지 않는다. 오직 개선안을 찾기 위한 거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공간(Safe Space)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자료를 내놓죠."
영국에서도 수사와 조사의 분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사고조사기관에 대한 신뢰를 넘어 법률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고 관련자들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다는 신뢰를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영국에서도 사고조사기관이 확보한 자료를 수사기관이 요구한 적이 있어요. 사고조사기관은 끝까지 안 된다고 버텼죠. 결국 대법원에서 사고조사기관이 이겼어요. 그로 인해 사고조사기관의 완벽한 독립성이 보장될 수 있었죠."
전 교수는 일단 조사기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공간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영국에서도 사고 관련자들이 사고의 원인을 숨기려 하고 이런 게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사고조사기관에 내가 말을 해도 보호받는다는 신뢰가 있고, 좋은 일을 한다는 목적이 있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나와요. 그게 장기적으로는 더 이득이 되죠."
사고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제대로 끌어내기 위한 전문성도 중요
자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자료를 모은다고 끝은 아니다.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을 정확하게 조사하고, 효과적인 개선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고조사기관이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조사자들이 사고조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방법론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전 교수는 먼저 사람을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보거나 영웅으로 보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옛날에는 사고가 일어나면 사고를 일으킨 사람 탓이라고 봤어요. 혹은 사고를 막거나 미비한 시스템을 극복하는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사고조사와 관련해 인간을 볼 때) 인간이 미리 작성된 매뉴얼이나 설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복잡한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안전을 유지한다는 관점이 힘을 얻고 있어요. 이런 적응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개선안이 나올 수 있죠."
또 전 교수는 사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원인을 넘어 사고의 뿌리를 찾는 조사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4년 이라크전 때 아군 헬리콥터끼리 총을 쏴서 추락한 사고가 있었어요. 스눅(Snook)이라는 사람이 이 사고에 대한 기존의 조사를 보고 너무 제한적인 조사라면서 다시 조사했어요. 그 조사를 하면서 1991년 소련의 붕괴부터 연결해서 왜 사고가 발생했는지를 파악했죠."
사고의 뿌리는 다양하다. 때로는 정부 정책이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점점 느슨해지는 안전 규율이 문제가 된다. 이들이 모두 작용해서 발생하는 사고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규찬 교수는 다양한 조사방식을 숙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많은 경우 사고는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해요. 복합적인 원인을 파악하려면, 정부, 규제기관, 관리자 하는 식으로 수직적인 구조도를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서 사고의 원인을 찾아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애시맵(AcciMap)이나, 사고와 관련된 요인을 평면에 배치하고 플러스, 마이너스로 상호작용을 표시하는 인플루언스 다이어그램(Influence Diagram) 같은 시스템 방법론의 분석 도구를 알아두고 적절한 때에 꺼내 쓸 필요가 있어요."
올바른 관점과 방법론이 갖추어질 때 개선안도 제대로 나올 수 있다.
"의사들이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을 과잉 처방한 사고에 대한 조사를 자문한 적이 있는데요. 시스템적 방법론을 활용해 단순히 의사들이 잘못했으니 훈련을 더 잘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뇨병 환자에 대한 인슐린 처방 과정 개선 등의 권고안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영국 사고조사기관의 사후관리
영국 사고조사기관의 업무는 사고조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권고안을 마련하는 것까지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고를 일으킨 기관과 긴밀하게 소통한다.
"권고안이 나왔을 때 단순히 보고서를 던지면서 이야기하지 않아요. 소통도 중요한 문제죠. 영국 같은 경우는 1차 보고서(Intern Report)를 들고 피조사 기관과 먼저 이야기를 해요. 그런 다음에 최종 보고서(Final Report)를 내죠. 물론 피조사 기관이 1차 보고서에 담긴 권고안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라서 이에 대해서는 고민이 있어요."
최종 보고서가 나오면 사고조사기관은 공개조사 사이트에 해당 보고서를 공개하고 사고를 일으킨 기관이 보고서의 권고안을 이행하는 상황을 공유한다. 국민과 언론이 사고조사의 사후 처리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장치를 둔 것이다.
이러한 영국에 비한다면 한국은 의식면에서도 제도면에서도 아직 뒤쳐져 있는 게 현실이다.
* 영국의 공개조사 사이트
https://www.instituteforgovernment.org.uk/explainers/public-inquiries
* 사고조사 애니메이션 등 안전 관련 영상이 올라와 있는 전규찬 교수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j282TzdSm-76D19QdTq4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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