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지배하는 사회, 노회찬 정신 이어가려면

노 전 의원 1주기 기념 학술제... "노회찬 정신 이어가려면..."

고(故) 노회찬 전 의원의 서거 1주기를 맞아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노회찬과 한국정치: 현실 진단과 미래 비전'이라는 이름의 학술제가 열렸다.

단연 화두는 삼성이었다. 노 전 의원은 생전 이른바 '떡값 검사 리스트'가 포함된 X-파일 사건의 핵심에 선 바 있다. 삼성이 민주주의 질서를 무력화한 그간 한국 현실을 짚으면 노 전 의원의 정치적 꿈의 중요성을 단연 쉽게 재정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핵심 발제 내용이었다. 토론자들은 노 전 의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정당 정치의 힘을 키워, 민주주의가 더 튼튼히 뿌리내리게끔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회찬재단이 주관하고 노회찬재단과 여야당 연구소들이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의 기조 발제와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의 발제문 발표 이후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여영국 정의당 의원,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학술제는 노 전 의원의 정치적 목표가 무엇이었느냐를 정의하는 데서 시작했다. 서복경 교수는 노 전 의원이 '더 좋은 시장에서 더 나은 노동'을 꿈꿨고, 이 꿈을 '민주정치의 방식'으로 '더 나은 시장'을 만드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고 정리했다. 그의 사후 한국 정치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노 전 의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현실은 삼성이 지배하는 사회

서복경 교수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노 전 의원의 꿈은 현실화하기 요원하다고 꼬집었다. 그 상징적 사례로 서복경 교수는 지난 4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꼽았다.

당시 나 원내대표는 "근로기준법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며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 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명 '노동자유계약법'이 근로기준법을 대체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서복경 교수는 이 발언을 두고 "현행 헌법과 노동법 체제를 뒤흔드는 발상의 전환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이 연설이 나오던 시점이 2018년 12월 유럽연합(EU)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여부를 가리기 위한 분쟁해결절차 개시를 선언한 때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고 지적했다.

기업에도 민주적 통제와 '착한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게 글로벌 표준이 되어가는 시대에 오히려 역행을 가속화하는 듯한 한국의 상황은 노 전 의원의 꿈과 거리가 먼 현실을 보여준다는 취지였다.

서복경 교수는 이 같은 현실을 삼성그룹 지배 체제의 역사를 짚는 데서 환기했다. 삼성그룹의 여러 반칙이 국회-사법부-관료 사회를 무력화하며 불법 승계를 합리화한 과정을 복기한다면, '다른 시장'을 꿈꾼 노 전 의원의 지향점이 여전히 달성되기 힘든 현실을 보여준다는 게 서복경 교수의 평가였다.

서복경 교수는 '독재정권-재벌-관료 연합으로 작동한 오랜 개발국가 시스템이 독재가 사라진 민주화 이후에도 강력한 관성'을 지녔고 '민주화한 사회에서는 선출된 대표와 검찰, 사법부, 언론이 민주주의 규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새로운 규범을 세우는 주체가 돼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정리했다.

즉, 우리 국민은 90년대 당시만 해도 재벌 총수가 독재자에게 상납금을 바치고, 독재 정부는 재벌 그룹의 성장을 비호하는 상황을 당연한 현실로 여겼는데, 실은 독재가 물러난 공간에 민주적 통제를 학습하지 못한 정치-관료 체제가 재벌 자본을 통제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이 같은 간극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서복경 교수는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에서 시장이 어떻게 재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며 "오늘날 헌법과 법률 위에 존재하는 삼성의 모습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불비(不備)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복경 교수는 따라서 삼성의 경영권 불법 승계 과정은 일견 삼성이 민주주의 시스템 전반을 포획해가는 과정으로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완전한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이 삼성과 시장을 어떻게 타락시켜 나갔는가를 보여주는 과정"이라며 "민주정치의 힘이 자본을 규제할 수 없을 때 자본이 그 스스로 약탈적 소성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정치권 포섭을 '불량배 같은 정치권력의 재벌 팔 비틀기'가 아닌 '재벌의 민주주의 매수'로 시민이 인식하게 된 계기로 서복경 교수는 노 전 의원의 'X-파일' 공개 사건을 꼽았다.

2005년 노 전 의원은 전 안기부 직원의 도청자료를 X-파일의 이름으로 공개했다. 이를 통해 대중은 삼성의 '떡값'을 받은 검사가 독재 체제 이후 줄곧 존재했음을 알았고, 그 관리의 힘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도 대중이 해당 검사들의 실명을 알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함을 깨닫게 됐다. 이 사건에서 이학수, 김인주, 홍석현 등 불법행위 공모 주체로 거론된 이들은 무혐의 처분됐고 노 전 의원과 이상호 기자,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 등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대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 삼성이 민주주의를 집어삼켰음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이 같은 상황은 지금껏 이어졌다. 시민사회단체 등의 끊임없는 저항이 이어졌으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건희 일가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마무리됐다. 2014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통한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 경영권 획득 프로젝트가 실행됐고, 이후 여러 단계에 걸쳐 이 작업에 온 국가 기구가 가담했다는 의혹이 연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7년 8월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구속 353일 만에 석방됐다.

삼성은 이 밖에도 여러 법리 문제에 얽혀 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회계 사기 논란이 터졌고 2018년 11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해당 회계 처리를 고의적 분식회계로 결론 내렸다.

삼성 그룹의 이른바 '전통'이라고 포장되는 노조 파괴 공작 사건도 여전히 법정 싸움의 대상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노동법을 대놓고 위반하겠다는 총수 일가의 의지가 이른바 '전통'으로 포장돼 왜곡된다는 데 있다.

▲ 노회찬 의원 1주기 추모학술토론회가 1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이 지배하는 사회' 극복하려면...

서복경 교수는 이처럼 강력한 재벌의 힘이 민주적 통제를 무력화하는 현실을 극복하려면 결국 정치의 힘, 더 정확하게는 정당 정치가 제 힘을 발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야말로 '노회찬의 꿈'을 현실화하는 요체라는 게 서복경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자본의 힘이 입법기구마저 무력화하는 현실에서 국회의원에게 "당선 후에도 집단적 정책 약속을 강제할 수 있는 장치는 정당"이라며 "정당의 이름을 걸고 집단적 정책을 약속하게 만들고, 그 약속의 이행 여부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의 제재나 이익을 집단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제도적 유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정치의 힘이 관료 집단을 통제 가능케 할 제도 변화도 필요하다고 서복경 교수는 지적했다.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집단은 관료 집단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행정부의 능력과 정보량은 막강하다. 실제 국회가 만든 법률의 구체적 이행 방향을 정리하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드는 이는 관료다.

서복경 교수는 "지난 30여 년의 민주정치가 시장을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기율하는데 실패한 한 원인은 (정치가) 관료의 민주적 통제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민주정치가 관료 조직을 감독하고 규율하는 힘을 갖제 못할 때 관료 조직은 정책집행과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시장주체들의 영향력에 쉽게 포획된다"고 강조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서복경 교수는 '김용균법'을 들었다. '김용균법'은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고 하청 노동자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시행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정작 고 김용균 씨가 사망한 해당 사업장은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 '김용균법'이라는 명명이 무색해졌다.

서복경 교수는 국회의 관료 조직 통제력 강화를 위해 △국회가 가용할 수 있는 지원 인력의 범위를 넓혀야 하고 △정당도 입법과 정책 집행 감독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더 폭 넓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정당의 인력 제한 등을 폐지해 자율성을 키우고 △국회가 일상적으로 행정부를 감독 가능하게끔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조합이 커야 시장 내 '민주주의'도 커진다

서복경 교수는 국회 바깥에서는 노동조합의 힘을 키워야 민주주의의 힘도 키울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복경 교수는 "분명한 것은 삼성이 제거된 시장이 아니라 삼성이 민주적 질서에 적응하는 시장"이 한국이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시장 모델이라며 "이를 가능케 하려면 시장에서 노동결사가 확장되고 정당이 안정적으로 원내에서 노동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질서를 뿌리로부터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도 민주주의에서 노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 관료제는 위계 체제(hierarchy)를 기본 원리로 하는 만큼, 이 속에서 민주주의를 (모두가 평등하다는)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며 "개개인 시민이 집단으로 투표할 수 없다면 평등한 시민권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박상훈 학교장은 따라서 "시민 기본권 보장을 위한 핵심은 '결사의 자유'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노동조합과 정당"이라며 "노동조합은 '민주주의 사회 학교'고 정당은 '민주주의 정치 학교'"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좋은 노사관계와 정당정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권력과 국가 관료제의 행정 권력이 지배할 뿐, 민주주의는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는다"며 현 한국 사회, 즉 재벌 권력과 관료 권력이 과두 대표하는 한국 사회 현실이 이 같은 상황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상훈 학교장은 노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느냐가 노 전 의원이 정치인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도 평했다.

그는 "노동문제를 계급 투쟁정 관점이 아닌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문제로 다루는 실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며 "정당과 정치가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 문제를 이해하고 다루는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기조발제에서 손호철 명예교수는 노 전 의원을 "비주류(민주화운동 세력)의 비주류(진보 세력)의 비주류(좌파)"로 칭하고 이후 우리 사회가 노 전 의원의 정당 정치인 활동뿐만 아니라, 2004년 국회 입성 전의 행적과 노력을 주목하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명예교수는 특히 노 전 의원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며 "그가 어려운 상황에서 택한 다양한 정치적 선택을 객관적이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꿈꾼 진보 정치가 한국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게끔 돕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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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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