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터넷 언론 <악시오스>는 7월 2일(현지 시각) 비건이 "북한과의 협상에 유연성을 암시했다"며, 그 근거로 "북한이 대량파괴무기(WMD)의 완전한 동결을 취할 경우 인도적 지원과 외교 관계의 개선 등 양보 조치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는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수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전용기 안에서 비건이 기자들에게 밝힌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당시 비건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브리핑을 했고, 그 자리에 없었던 <악시오스>는 참석자들을 후속 취재해 보도한 것이다.
이 보도가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북미, 그리고 남북미 정상들의 판문점 회동 직후 나온 미국의 구체적인 입장이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미국이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여전히 경직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 적어도 <악시오스> 보도 내용은 그렇다. 왜 그럴까?
하노이 노딜 때와 비교해보면
유연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내놓은 요구 사항과의 비교에 있다. 내가 3월 하순 미국 국무부 관료들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비핵화의 정의이자 최종 상태로 북한의 핵·화학·생물 무기 및 탄도미사일 폐기 포함, 우선적으로 모든 WMD의 완전한 동결, 그리고 로드맵 합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데 비건이 6월 30일에 밝힌 미국의 요구 사항도 이와 동일하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미국의 요구에 대해 "강도적이고 일방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해왔다. 사실상의 "무장해제" 요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적 셈법"을 바꾸고 "온전한 대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비건은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북미실무회담을 낙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유는 또 있다. 비건은 "완전한 비핵화"에 앞서 "미국은 WMD 프로그램의 완전한 동결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이 동결 조치를 취해도 비핵화 이전에는 제재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비핵화 과정에서" 미국은 "인도적 지원과 인적 대화의 확대, 그리고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치"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트럼프 행정부가 또다시 '선 비핵화, 후 제재 완화·해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미국이 유연해진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 경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전 및 회담 때에는 북한의 비핵화 초기 조치에 따라 일부 제재의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WMD 완전 동결과 제재 완화를 제외한 일부 상응조치의 교환'이라는 미국의 요구는 북한의 입장과 천양지차이다. 우선 미국은 북한이 화학무기와 생물무기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북한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면 검증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데, 생화학무기 검증은 핵 검증보다 훨씬 까다롭고 오래 걸린다. 여기에 미국이 동결 및 폐기 대상에 탄도미사일까지 포함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완전한 핵 동결도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일종의 '선언적 핵 동결'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동결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완전한 동결이 되려면, 핵무기를 더 이상 만들 수 없도록 관련 핵시설과 핵물질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초기에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이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을 고수할 경우 그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게 된다.
입구도 출구도 안 보이는데
정리하자면 비건의 발언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물론 이는 <악시오스>의 보도가 정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한 비건이 밝힌 입장은 미국 행정부 내부 검토 및 북미 협상 과정에서 조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판문점에서 연출된 명장면에 도취되어 시야가 흐려지거나 실력을 배양하는 데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낙관적인 시나리오가 언급되고 있지만,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아직 북미간에는 합의된 비핵화의 정의도 최종 상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첫 단계 행동 조치에 대한 이견도 너무나도 크다. 입구도 출구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