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러한 입장 표명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문 대통령의 취지는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하겠다는 것이지만, 오히려 비핵화 자체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 핵심적인 배경에는 한미연합전력에 비해 큰 열세에 있는 재래식 군사력을 핵무장을 통해 상쇄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는 북한이 핵포기 이후 한미연합전력과의 재래식 군사력 격차가 여전하거나 더 심각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여기면 핵포기를 주저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현 단계에서 재래식 군축을 본격 추진하기는 어렵더라도 과도한 수준의 군비증강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국방부는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 유럽 순방 중에 2020년 국방예산안을 공개했다. 올해보다 8% 늘어난 50조 4000억 원을 제출한 것이다.
정부 및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조정될 가능성은 있지만, 정부가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 이 정도 수준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50조 원 정도로 결정될 경우 북한 GDP의 약 1.5배, 북한 군사비의 30배 안팎에 달하게 된다. 이에 따라 '남한은 대규모로 국방비를 늘리면서 북한에 비핵화를 촉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작년 4.27 판문점 선언 및 9.19 군사 합의에는 "단계적 군축 추진"이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대규모로 국방비를 늘리려는 것은 이러한 취지에 맞지 않는다.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가 촘촘하게 짜여진 현실에서 군사 분야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할 수 있는 유력한 분야이다. 대규모 국방비 증액은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책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방비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남북관계 발전이 국가 전략 차원의 목표라면 국방비가 최소한 이러한 목표에 장애를 조성하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안정적인 국방 태세 유지 및 급여 인상을 비롯한 사병 처우 개선도 중요하다.
이러한 점들을 두루 고려할 때 내년도 국방비는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병 처우 개선은 예정대로 추진하면서 방위력개선비 및 운영유지비를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이 내년도 국방비를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더라도 이건 군축은 물론이고 군사력 동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국방비를 동결하고 영역별 조정을 하더라도 약 15조 원의 방위력개선비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순방 기간 동안 대화와 신뢰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형의 가치는 유형의 실천으로 뒷받침되어야 힘을 가질 수 있다. 비핵화는 북한이 취해야 하는 가장 큰 물리적인 실천에 해당된다.
이에 따라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대화"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울림을 가지려면 우리 역시 '군사력에 의한 평화'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급격한 전환이 어렵다면 최소한 그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둘씩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방비 동결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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