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에 걸맞게 항일독립운동사가 뒤늦게나마 주목받고 있다. 유관순의 옥중 투쟁이나 청산리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TV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나 의열단을 다룬 드라마가 방영된다. 이 분위기가 한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관련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이어받고 되살려야 할 바가 무엇인지 잘못 짚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가 부활시켜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항일(抗日)'의 정신이다. 하지만 이를 '배일(排日)'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항일과 배일은 엄연히 다르다. 항거한다는 '항'자와 배척한다는 '배'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에 두 단어에서 '일(본)'이 뜻하는 바가 전혀 달라진다. 배척할 대상인 '일(본)'은 무차별적이다. 일본과 관련됐다면 모조리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항거할 대상인 '일(본)'은 그렇지 않다. 내포와 외연이 명확하다. 이는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한 일본 국가 혹은 체제를 가리킨다.
어떤 이는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일본 국가나 체제가 곧 일본 전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는 한국 사회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일제 잔재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 세기 전에 다수 일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체제와 시민/민중이 하나라는 사고방식이 이 땅에 아직도 잔존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배일의 대상에 속하는 이들 중에 항일의 주체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배일의 적이지만 항일의 동지였던 이들, 즉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저항한 일본인들 말이다.
항일의 동지였던 일본인들
많은 이들이 이미 영화 <박열>을 통해 이런 일본인들이 실존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3.1운동을 목격한 뒤에 천황제와 가부장제에 항거하며 인간 존엄성의 당당한 증인으로 나선 가네코 후미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박열을 비롯해 숱한 '불령선인'들의 변호를 맡았고 그래서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 역시 그런 인물이다(후세 간지, <나는 양심을 믿는다: 조선인을 변호한 일본인 후세 다쓰지의 삶>, 황선희 옮김, 현암사, 2011).
또한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가운데에는 민족해방을 꿈꾸는 조선인 제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비밀 결사를 조직한 경제학자 미야케 시카노스케가 있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 노동조합운동을 위해 지하 활동을 벌이던 이재유를 자기 집 마루 아래 숨겨주었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3년형을 언도받기까지 했다.
대학교수나 변호사 같은 지식인만이 아니었다. 자국 지배자들보다는 조선 민중에게 동지애를 느낀 일본의 무산계급도 있었다. <우리 청춘의 조선>(김계일 옮김, 사계절, 1988)이라는 감명 깊은 회고록을 남긴 이소가야 스에지가 그런 일본인 노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흥남 비료공장에서 일하다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적색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했고, 이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10여년을 복역했다. 감옥에서 그는 "살아서 투쟁하자"며 조선인 동료들과 서로를 격려하면서 함께 '대일본제국'의 패망을 열망했다(변은진, <자유와 평화를 꿈꾼 '한반도인' 이소가야 스에지>, 아연출판부, 2018).
조선 안에서만이 아니라 중일전쟁 전장에서도 조선인들과 전선 같은 쪽에 선 일본인들이 있었다. 작가 김사량이, 그리고 국문학자 김태준이 부인 박진홍과 함께 동아시아의 항일 거점 옌안을 찾았을 때 그들을 환영한 것은 약산 김원봉이 키운 조선의용군의 젊은 장병들만이 아니었다. 전후에 일본 공산당을 이끌게 될 노사카 산조 같은 반파시스트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가 아니라 오로지 파시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의 선택만이 중요했다.
지금까지 든 것은 모두 조선인 투사들과 직접 연대한 일본인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교류하지 않았더라도 '항일' 전선에 함께 한 일본인들이 있다. 일본 본토에서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이다. 최근 바로 그런 투쟁에 말 그대로 생을 바친 한 인물의 작은 전기가 우리말로 나왔다. <야마센 홀로 지키다>(우지 야마센회 지음, 황자혜 엮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9)가 그 책이다.
제목에 '야마센'이라 나오지만, 이것은 별명이고 본명은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1889~1929)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 역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왜 그러한가? 그가 맞서 싸운 괴물이 한국 사회와도 징그럽게 얽혀 있는 치안유지법이기 때문이다.
치안유지법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하는 근거가 된 법이다. 이른바 '국체'라 불린 천황제를 거스른다고 당국이 판단하기만 하면 마음껏 고문하고 투옥하고 처형할 수 있게 해 준 법이다. 한데 이는 결코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이미 지나가 버린 악몽만은 아니다. 치안유지법의 자식뻘 되는 악법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헌법 위에 군림해왔고, 지금도 법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치안유지법의 DNA를 충실히 이어받은 그 법은 다름 아닌 국가보안법이다.
1928년에 일본 정부는 이 치안유지법을 더욱 개악하려 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자의 최고형을 10년 이하 징역에서 사형으로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일찍 맞은 경제 공황 속에서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 침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본토와 당시 점령 지역(조선, 대만)을 파시즘 체제로 만들려 한 것이다. 천황제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천황제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곧 치안유지법 개악이었다.
이는 다이쇼 시기에 어렵사리 좌파정당과 노동조합을 건설하던 일본 민중에게 닥친 거대한 난관이었고, 3.1운동 이후 10여 년만에 신간회를 결성해 대중적인 항일운동을 펼치려던 좌우파 독립운동가들이 마주한 절망의 장벽이었다. 이 장애물을 향해 일본, 아니 동아시아 민중의 첫 번째 주자로서 몸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일본의 첫 좌파정당 소속 국회의원 8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야마모토 센지다.
야마센 홀로 지키다, 등 뒤에 민중이 있기에
야마모토 센지는 정치가이기 전에 과학자, 정확히는 생물학자였다. 대학 생물학 강사였던 그는 피임법 보급을 통한 산아 제한 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일본 정부 방침은 출산율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었다. 일본 국내의 빈부 격차가 심각했음에도 인구가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었다. 한반도로, 중국 대륙으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으로 제국을 확대할 심산이었기에 노동력과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인구가 최대한 증가해야만 했다.
센지가 주도한 산아 제한 운동은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고도의 정치 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제국을 위해 희생할 인구가 늘어나야 한다는 국가의 논리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소중하다는 인간 존엄성의 논리를 대립시켰다. 특히 국가가 재생산 도구로 삼으려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려 했다.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의 약자들이 벌이는 무의식적인 '출산 파업'과도 맥이 닿는 사회운동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본 정세 속에서 센지는 자기 전문 분야에만 힘을 쏟을 수 없었다. 본래 기독교 집안 출신이지만, 이미 청년기부터 그는 사회주의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일본과 캐나다를 오가며 천황제 사회의 실상을 통감하고서 일본의 변혁을 열망하게 됐고, 다이쇼 시기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성장에 고무돼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2년에 미국의 저명한 산아 제한 운동가 마가렛 싱어를 만났을 때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소개했다(<야마센 홀로 지키다> 74쪽).
이 무렵 일본 민중운동 세력이 한 목소리로 요구한 것은 보통선거제도 도입이었다. 지배자들도 이를 더는 무시할 수만은 없어 1928년 최초로 보통선거제에 따라 총선을 실시했다. 좌파는 처음에 단일정당을 만들어 이 기회를 활용하려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노동농민당(약칭 노농당)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노선 논쟁이 벌어져 온건파들이 사회민중당과 일본노농당으로 갈라져 나갔다. 노농당에는 야마모토 센지 같은 급진파만 남았고, 당시 불법 상태였던 일본공산당은 이런 노농당을 합법 정치에 개입할 통로로 삼았다.
센지는 애초에 정치의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신생 노농당에게 민중운동 거점 중 하나인 교토 선거구는 너무나 중요했고, 이 지역 농민운동의 가장 신실한 벗이었던 야마모토 센지만큼 적격인 후보감도 달리 없었다. 그는 경찰의 노골적인 탄압에 시달리고 지병 때문에 병석에 누워 선거운동 기간을 보냈음에도 1928년 2월 총선에서 당선됐다. 그를 포함해 세 좌파정당의 의석은 총 466석 중 8석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당선 직후 그가 토한 말이다. 그는 "오늘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제군들에게 빌려 온 것, 제군들의 것"이며 "이제부터 나는 민중이 움켜쥔 한 자루의 창"이라고 말했다(위의 책, 91쪽). 이 다짐을 시험이라도 하듯 총선 끝나고 몇 달 안 돼 정부는 위에서 말한 치안유지법 개악안을 제출했다.
8명의 좌파 의원들은 처음에는 이 법안을 저지하려고 한 몸이 돼 치열하게 싸웠다. 그 결과, 법안 통과를 1년 이상 지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천황 긴급칙령이라는 형태로 개정안 내용을 기정사실화한 뒤에 1929년 3월 국회에서 사후 인준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좌파 의원들 사이에서도 "대세는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사회민중당과 일본노농당은 투항 입장으로 돌아섰고, 노농당의 다른 한 의원도 당론 사수를 포기하며 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야마모토 센지 의원만은 홀로 전선을 지켰다. 그는 국회 개원 직전인 3월 4일 오사카에서 열린 농민조합 대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실로 지금 계급적 입장을 지키는 것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야마센, 한 사람이 마지막 보루를 지킵니다. 뒤에는 다수의 동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 99쪽)
야마모토 센지는 국회에서도 같은 발언을 하려고 개원 첫 날 발언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날 밤, 그의 숙소에 웬 남자가 하나 찾아왔다. 그 남자는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더니 야마모토 센지를 칼로 무참히 살해했다. 극우 단체에서 보낸 자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가 토하려던 외침이 진압됐다고 할 수 있을까. 야마센의 장례식 날, 교토의 수많은 노동자, 농민이 운구차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의 발언을 비석에 새겨 기억했다.
"야마센 홀로 보루를 지키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다. 등 뒤에서 지지하는 대중이 있으므로"(위의 책, 127쪽).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비문을 훼손했지만, 그때마다 이는 민중의 힘으로 복구됐다. 이제 이 문장은 야마센 한 사람의 외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승리를 염원하는 모든 일본 민중의 구호로 메아리치고 있다.
항일 정신 –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정신
야마모토 센지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야마센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항일' 투사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만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항일' 정신으로 이어받아야 할 바가 무엇인지도 다시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배타적이기만 한 민족주의-국수주의는 그 답이 될 수 없다.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 이소가야 스에지, 야마모토 센지 같은 일본 민중의 대표자들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때 늦은 민족주의-국수주의 열풍으로 들끓고 있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의 폭발은 아직 연약하기만 한 동아시아 각 나라 민주주의의 싹과 양립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지배자들의 우경화-군비 강화 책동 속에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하는 현 일본 사회가 그 극명한 증거다.
동아시아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려면, 다른 짝이 필요하다. 작지만 소중한 책 <야마센 홀로 지키다>는 우리에게 그 짝이 어디에 있는지 가리킨다. 그것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 민중사를 가로지르는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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