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통킹만, 그리고 9.11

[전쟁국가 미국·2강-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하)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영국 보수당 내각의 올리버 리틀턴 생산부 장관은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미국의 심각한 도발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가져왔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장관이 해명에 나섰고, 얼마 후 리틀턴은 미국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해명성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경위에 대한 의혹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즉 미국은 일본의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라면, 미국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수정주의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

미국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년 12월 11일 해군의 자체 조사를 시작으로 1995년 국방부 조사까지 무려 10차례 이상의 조사를 벌였지만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확실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에 관한 논란이 이후 케네디 암살에서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유다.

진주만 기습 후 열흘 남짓부터 미 의회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12월 19일 야당인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 원내대표는 "아마도 진주만 기습의 책임이 현지 사령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톰 코널리 민주당 상원의원은 행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일본 기습 공격의 눈부신 성공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고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공화당)은 하원 해군위원회와 함께 진주만 사태에 대한 전면 조사를 촉구했다.

루스벨트는 의회가 아닌 자신이 임명한 위원회(위원장 오웬 로버츠 대법관)에 조사를 맡겼으나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2년 1월 24일 발표된 1만 3000쪽의 위원회 보고서는 진주만 기습을 방어하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허즈번드 키멀 제독과 월터 쇼트 장군 등 현지 군사령관의 직무유기 탓으로 돌렸다. 루스벨트, 스팀슨, 마셜 등 정부와 군부 지도자에게는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에 대해 키멀의 전임자였던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이제까지 발표된 정부 보고서 중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하며 부정직한 문서를 본 적이 없다. 조사위원들이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최대한의 유감과 최대한의 수치를 느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옮긴 이유는?

그는 1940년 5월 미 해군 함대의 본거지를 본토의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긴 데 대해 반대하다 퇴역 당한 인물이다. 태평양함대는 1940년 4월 연례 합동 훈련을 위해 진주만으로 이동한 이래 샌디에이고로 귀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5월 15일 태평양함대의 상당 기간 하와이 체류를 결정했는데 이때는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을 공격할 때였다.

이후 리처드슨 제독은 루스벨트와의 두 차례 독대(7월과 10월)에서 함대의 샌디에이고 귀환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해 2월 예편 당했고 후임에 키멀 제독이 임명됐으며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은 공식화됐다.

10월 면담에서 리처드슨은 자신이 지난 5개월간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에 반대한 이유로 진주만의 훈련시설 부족, 탄약 및 연료 저장 시설 부족, 인양함 수선함 등 지원 함정 부족,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 건조 도크 등 수리시설 부족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그러나 현지 사령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앞서 7월 8일 루스벨트와 백악관에서 오찬을 하고 난 후 그는 "(대통령의 참전하지 않겠다는) 공식 발언과는 달리 (11월 대선에서) 3선을 이룰 때까지 영국이 버틴다면 참전할 각오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버츠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리처드슨 제독의 분노는 이러한 루스벨트의 이중플레이를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1940년 대선 과정에서 '해외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도 측근들에게는 "하지만 우리가 공격 받으면 우린 싸우게 될 걸.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하면 그땐 해외 전쟁이 아니잖나?"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미국 국민은 자국이 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유럽 전쟁 참전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루스벨트는) 전쟁 상황으로 떠밀려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으며 해럴드 이케스 내무장관도 "오랫동안 나는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대일본전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중략) 확실히 우리가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한다면 불가피하게 독일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른바 '뒷문으로 참전(Back Door to War)'의 논리다. (<해럴드 아이크스의 숨겨진 역사>, The Secret History of Harold L. Ickes, 1954, p.20)

이처럼 루스벨트 행정부는 참전의 명분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던 반면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미 국민의 80% 이상은 참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전후 미국 정책담당자들의 언행을 보면 일본의 전쟁 돌입을 예상하고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만 기습에 '안도감'을 느낀 스팀슨과 루스벨트

예컨대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다음 날 헐 국무장관은 미일 교섭에 관한 최후통첩(헐 노트)을 일본 측에 발송하기 직전 스팀슨 전쟁부 장관에게 '이제 나의 업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녹스(해군부 장관)의 업무'라고 말했다. 27일에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에게 '미일 외교가 사실상 종료하여 사태는 이제 미 육군과 해군에 위임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날 전군에 전쟁 경보를 내리면서 "만일 전쟁을 회피할 수 없다면 미국은 일본이 먼저 도발하기를 원한다"고 지시했다.

특히 스팀슨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이 확정된 직후인 12월 9일의 일기에 "이제 일본 놈들이 하와이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중략) 내게 처음으로 든 느낌은 우유부단의 시기가 끝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 할 수 있는 형태의 위기가 왔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이날 대국민 방송을 한 루스벨트에 대해 "이제 오랫동안 묵혔던 모든 것이 마침내 운명에 따라 그리고 일본의 공격 덕분에 결정적으로 무르익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큰 짐을 덜어내고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가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된 데 대한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고대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일본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 책략을 쓴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11월 15일 루스벨트를 대신해 백악관에서 7개 주요 언론사에 대해 극비 브리핑을 가졌다. <뉴욕타임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타임>, <뉴스위크>, 그리고 AP, UPI,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등 3개 통신사 대표들에게 마셜은 "며칠 안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설명했다. 마셜 장군은 자신의 전쟁 예측은 일본에서 유출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은 이러한 (미국이 일본 측 사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나아가 "미일 전쟁이 12월 첫 열흘 안에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 극비 브리핑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가 로버트 스미스 톰슨은 브리핑 내용이 일본에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즉 "루스벨트의 대리인으로서 마셜 장군은 누군가가 자신의 발언을 유출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언론인들에게 브리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공격당하기 전에 차라리 선제공격에 나서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또한 <기만의 날>의 저자 로버트 스티네트는 전쟁 계획을 군사지도자가 아닌 언론사 대표에게 브리핑한 데 대해 두 가지 도덕적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언론인 상대로 기자회견을 여는 대신 감청을 통해 얻은 (12월 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월터 쇼트 중장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닌가? 둘째, 언론인들은 이러한 정보를 현지의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닐까?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 진주만이 일본군에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 ⓒUS archives

진주만 수정주의

'진주만 수정주의'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이다.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영국 네덜란드와의 준군사동맹, 그리고 일본에 대한 가혹한 경제 제재 등이 그 논거다. 둘째는 루스벨트가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았으나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참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현지 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통 역사학계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각오했고 이왕이면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것을 원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했거나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은폐했다는 점은 부정한다. 수정주의자 중에서도 전자는 주장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진주만 기습 은폐'는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에 속한다. '진주만 수정주의'는 정계든 학계든 미국의 제도권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관련 기록 등 나름 탄탄한 근거를 바탕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본 근해 미 군함 파견 이유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첫째, 루스벨트가 경제 제재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군사 대응을 촉발하기 위한 군사적 도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미국 전함을 일본 영해 내 또는 인근 해역에 파견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들 군함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할 것이라면서 "나는 이들 군함의 출몰로 일본 놈들을 혼란시키길 원한다. 군함 대여섯 척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두 척 정도 잃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키멀 제독은 반대했다. 그는 1941년 2월 18일 스타크 해군 작전본부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계획이며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1941년 3월부터 7월 사이 3차례에 걸쳐 일본 인근 해역에 미국 군함을 보냈다. 예컨대 7월 31일 두 척의 미군 순양함이 분고 해협(혼슈와 시고쿠 사이)까지 진출했다가 일본 구축함이 출동하자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본 해군은 이 배들이 미국 순양함인 것으로 믿고 있다"며 항의했을 뿐 무력으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기만의 날>, Day of Deceit, 로버트 스티네트, p.9-10)

이어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전운이 감돌던 1941년 12월 1일, 루스벨트는 마닐라 주둔 아시아함대 토마스 하트 제독에게 '작은 함선 3척으로 일본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미군 장교가 지휘하고 선원은 필리핀인으로 하며 대포를 탑재해(군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본 군함이 동남아로 나아가는 해역에 진출하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이처럼 사소한 군사작전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면서 "게다가 항공기 정찰이 일반화된 마당에 18, 19세기에나 있을 법한 함선에 의한 정찰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루스벨트의 지시는 일본의 군사 대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첫 번째 함선 이사벨은 12월 1일 출항했으나 무사 귀환했고(하트 제독은 군사 충돌을 우려해 루스벨트의 명령과는 달리 도발적 행동을 자제토록 했다), 두 번째 함선 라나카이가 마닐라 항을 떠나기 직전 진주만 기습이 시작됐다. 역사가 해리 엘머 반스는 만일 당시 미국 군함이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면 진주만 기습을 피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진주만보다 작은 규모의 피습으로 전쟁을 시작하려던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암호 해독은 언제부터인가?

수정주의자들의 두 번째 주장은 미국이 1940년 가을부터 일본의 주요 암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의 전쟁 계획과 공격 지점까지 사전에 파악했으나 이같은 사실을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스티네트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은 1940년 9월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일본 측 암호 해독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 암호 전문인 '퍼플'은 해독 완료됐고, 29개 코드로 이루어진 '가이군 안고(海軍 暗號)'는 일부 해독에 성공했지만 이 또한 1941년 4월경에는 완벽한 해독이 가능해졌다.

스티네트는 2차 대전 당시 해군 병사 출신으로 전후 <오클랜드 트리뷴>의 기자로 일하면서 17년간 정보공개법에 따라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확보하고 암호 해독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확보한 문서에 따르면 로열 잉거솔 해군 작전본부 부본부장은 1940년 10월 4일 리처드슨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토머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 보낸 편지에서 "일본 주요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됐으며 외무성 전문도 해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미 해군이 일본 해군 보급함의 암호 코드를 '99% 해독할" 정도이며 1941년 4월경이면 전함 간 교신을 비롯한 해군 암호 전체를 해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1941년 1월 30일부터 해독된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을 보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정보기관은 진주만 기습 사흘 전인 1941년 12월 4일 미일 외교관계의 파기를 의미하는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핵심 구절을 포착한다. 일본 외무성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11월 19일 이른바 일기 예보 형식의 '기상 암호' 시스템을 도입해 재외 공관들에 일본 정부의 방침을 알렸는데 '동풍, 비'란 곧 전쟁을 의미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 전함 간 교신의 감청을 통해 항공모함을 비롯한 일본의 공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키멀 제독 등 하와이 현지 군사령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일례로 키멀은 진주만 공격 2주일 전 하와이 북부 북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항공모함에 대한 수색에 나섰으나 백악관 지시로 철수해야 했다. 그곳은 일본의 공격 함대가 항행하던 곳이었다.

한 수정주의 역사가는 당시 키멀과 쇼트에게 △외교적 협상에서 일본에게 전쟁 또는 굴복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미국의 행동 △수 백 통의 일본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루스벨트와 고위 보좌관은 전쟁을 각오했으며 곧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하와이에 있던 일본 첩자와 도쿄와의 비밀 전문 해독을 통해 진주만이 일본 공격의 목표물임이 드러났다는 사실 등 3가지 종류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키멀과 쇼트 장군은 이후 일련의 청문회에서 극도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증거 은폐

1944년 미 육군과 해군의 진주만 청문회에서 미 정보기관 감청 요원들은 1941년 12월 4일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메시지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1945-46년의 의회 청문회에서는 증언이 번복됐다. 당국자들은 어떤 "기상 암호" 메시지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으며 암호 해독을 입증할 서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한 메시지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한 많은 증인들이 이전의 증언을 철회했다. 오로지 로렌스 새포드 대위만이 이전의 증언을(즉 미국 정보기관이 '기상 암호'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했고, 미 정부 내에 널리 알렸다) 고수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이는 정부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 때문이었다. 미 해군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년 12월 11일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전문의 감청 내용을 기록한 서류의 파기를 지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2주일 후인 1945년 8월말에는 진주만 기습 이전의 모든 감청 내용을 극비(Top Secret)로 분류했다. 일반 공개를 차단한 것이다. 1945-46년의 의회 조사에서는 일본의 외교 전문만 공개했고 해군 교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메릴랜드 주 첼튼햄의 해군 통신기지에서 감청 요원으로 근무했던 랠프 브릭스 선임 준위는 1977년 해군보안국 인터뷰에서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했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상부로부터 "1946년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에서 그 문제에 대해 증언하지 말 것, 나아가 로렌스 새포드 대위와의 어떤 접촉도 중지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새포드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문제에 가장 관련이 깊은 사람은 아마도 선임준위였던 랠프 브릭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41년 12월 초에 '기상' 암호를 받은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미 해군의 대서양 연안 도청 시설인 M기지에서 일본의 메시지 도청 모두를 감독하도록 배치된, 유능한 실무자의 한 사람이었다. 가타가나 강사인 그는 그날 밤 "히가시노가제, 아메" 즉 "동풍, 비"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주만 기습 직전 24시간 동안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행적이다.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대응책 마련은커녕 하와이 현지에 경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워싱턴 시각 12월 7일 오후 1시에 선전포고가 담긴 외교 전문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며, 같은 시각에 진주만 기습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일본의 외교 전문은 모두 14개로 나뉘어져 앞의 13개는 6일 오전 6시 30분에서 10시 20분(이하 워싱턴 시각) 사이에 발송됐다. 선전포고가 담긴 마지막 조항은 다음 날인 7일 오전 3시와 4시에 두 라인으로 전송됐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2월 6일 이른 저녁에 일본의 답신 13개를 감청해 해독했고 이 내용을 대통령을 비롯한 각 군 지도자에게 보냈다. 이 내용을 읽은 루스벨트는 측근 해리 홉킨스에게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This means war)"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전포고가 명시된 마지막 14항이 해독된 것은 7일 아침이며 미국 주재 일본 대사가 헐 국무장관을 만나 이 문서를 전달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20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이르면 12월 6일 저녁, 늦어도 12월 7일 아침에는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하와이에 경보를 보내지 않았다. 경보를 보낼 권한을 가진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이날 아침 내내 행방이 묘연했다(일요일이라 평소처럼 승마를 했다고 주장). 마셜 장군은 정오경, 이미 일본의 공격이 시작된 뒤에 쇼트 장군에게 경보를 보냈고, 해군부는 1시 50분 키멀 제독으로부터 진주만이 일본의 공습을 받았다는 특전을 받았다.

미국은 1940년 6월 사소한 징후를 이유로 하와이에 전면 경계경보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명백한 공격 징후에도 무사태평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12월 6일에서 7일에 이르는 동안 루스벨트를 비롯해 스팀슨, 녹스, 마셜 등 고위 지도자들의 행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조사에서 이들은 당시 행적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사태를 얼버무리려 했다. 그토록 중요한 순간의 행적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 측 메시지를 읽고 난 후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이라고 말한 대통령이 즉각 전쟁부와 해군부 장관을 비롯해 육군, 해군 지휘관을 소집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프랭크 녹스 해군부 장관의 절친한 친구인 제임스 스탈만은 1973년 켐프 톨리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녹스 장관이 1941년 12월 6일 밤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스팀슨 전쟁부 장관, 육군과 해군 주요 지휘관인 마셜 장군과 스타크 제독, 그리고 대통령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와 함께 있었다는 말을 녹스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이들 모두는 곧 다가올 사태, 그들이 이미 예견했던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주만 기습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년)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제도권, 또는 정통 학계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한다.

첫째, 미국이 일본 측 암호를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은 1942년 봄부터다. 즉 진주만 기습 이후, 스티네트가 주장한 1940년 10월보다 1년 6개월 늦은 시점이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폐의 여지도 없다.

둘째, 설사 일부 암호 해독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핵심 메시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Noise)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감청 요원에서 정보 책임자, 군 지휘관, 대통령에 이르는 명령계통에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일본의 명백한 의도로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9.11테러 직전 수많은 테러 징후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센터 공격을 예견하지 못한 것과 같은, 선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은 1999년 발간된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에 대한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엄청나게 많이 제시된 문서 증거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결정적 한 방(smoking gun)'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에 대해 스티네트는 2000년 5월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시켜 주는 4천 건 이상의 통신 정보 서류들을 발굴했으며, 이 서류들은 진주만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두 가지 쟁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서류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첫째,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이 일본의 해군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실패했다는 설과 둘째, 실제로 암호가 성공적으로 해독되고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진주만으로 항해하는 일본 전함들이 무선 교신을 자제했기 때문에 진주만이 공격 목표임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티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서류로 인해서 이 두 주장은 허물어진다. 2000년 정보공개법에 따라 기밀 해제된 서류들이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본의 해군력이 하와이를 향하고 있던 1941년 11월에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일본 해군의 주요 암호를 해독했고, 일본의 최고위 제독들이 일본 해군 전파로 교신했으며, 일련의 전파메시지에서 진주만이 공격 목표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과 의회에 거의 60년 동안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이 문서들은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고위 해군 제독들은 북태평양을 횡단해 진주만으로 가는 동안 무선 통신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적한 미군 측에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략) 미군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1941년에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 밖의 정황 증거들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는 1941년 초부터 여러 차례 미국 정부 고위층에 전달됐다. 1941년 1월 도쿄의 페루 외교관 리카르도 슈라이버는 미 대사관의 한 외교관에게 일본의 공격 계획을 알렸고 이는 조셉 그루 대사를 거쳐 코델 헐 국무장관과 해군 정보당국에도 알려졌다. 당시 그루 대사는 이 첩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반면 해군 정보당국은 가능성을 일축했다.

또 1941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길수가 조선과 일본의 정보원들로부터 일본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 정계와 언론계 등에 이승만과 맞먹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한길수는 10월 하순 가이 질레트 상원의원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국무부와 육군 및 해군 정보기관,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 당시 국무부의 3인자였던 스탠리 혼벡 차관은 헐 장관에게 한길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한편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진주만의 공격 대상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일본 영사 기타 나고아와 스파이 모리무라 타다시를 밀착 감시했고 이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루스벨트가 막았다. 당시 아돌프 벌 차관보는 "그들을 어떤 혐의로 추방하든 일단 추방하게 되면 미국이 일본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바깥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추방은 불가능하다"며 이들의 체포를 저지했다.

스티네트는 "FBI의 고위 관리들은 1941년 12월 7일 이전의 모리무라 타다시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50년 이상 주장해 왔다. 이 같은 부인은 진주만에 대한 도 하나의 커다란 은폐 공작"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해군 정보 책임자인 앨런 커크 대령은 1941년 10월 하와이에 (일본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전보되었다. (<진주만 수정주의의 사례, The Case for Pearl Harbor Revisionism, 스티븐 스니고스키, )

마지막으로 1941년 11월 하와이에서 적십자사의 전쟁 관련 활동을 지휘하던 돈 스미스가 루스벨트로부터 '일본이 곧 하와이를 공격할 테니 비밀리에 대비하라. 그러나 하와이 군 지휘관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1995년 키멀과 쇼트 장군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방부의 재조사 과정에서 돈 스미스의 딸 헬렌 해먼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이 중요한 이유

진주만 기습으로 미군 2355명이 전사하고 1143명이 부상했다. 민간인 사망은 68명 부상은 35명이다. 이 기습 공격으로 미국은 전격적으로 2차 대전에 뛰어들었으며 그 결과 독일, 일본 등 군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를 회복했다. 미국의 참전이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의 해방도 가능했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 자체는 문제시 될 이유가 없다. 당시의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참전은 불가피했다. 또한 만주, 중국 침략 등을 통해 동아시아를 무력으로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시도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저지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참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모종의 공작이 있었다면 이는 전쟁의 정당성과 관련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수정주의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평화를 지향하던 미국이 일본의 불의의 일격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인식은 '2차 대전은 좋은 전쟁(Good War)'이라는 미국인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미국의 세계 경영에서 군사력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제도권은 진주만의 진실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이후 미국의 '전쟁 만들기(War Making)'와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베트남전쟁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경우가 그러하다.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의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했고, 2001년 9.11테러를 빌미로 (이번에는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를 무릅 쓰고) 이라크를 비롯한 대중동지역의 평정에 나섰다.

그러나 통킹만의 경우 미국과 남베트남의 도발이 먼저 있었고, 이라크는 9.11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직적인 정보 조작에 의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됐다. 즉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과 2000년대의 대중동전쟁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임이 분명하다. 이 두 전쟁이 미국 국력의 쇠퇴와 국제사회의 신뢰도 저하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2차 대전으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대중동전쟁을 통해 쇠락했다.

특히 지난 2000년 미국의 네오콘 집단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가 '미국의 방위를 재건함(Rebuilding America's Defenses)'이라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진주만(New Pearl Harbor)'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PNAC는 탈냉전 이후 미국 패권의 영속화를 위해 어떤 지역에서건 미국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 패권의 등장을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대폭 증강해야 하는데, 이는 '새로운 진주만'과 같은 충격적 사태가 일어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들은 1년 후 9.11테러를 '새로운 진주만'으로 삼아 대중동전쟁에 나섰다.

이들 네오콘은 진주만을 미국 패권 형성의 계기로, 새로운 진주만은 미국 패권 영속화의 기회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의 진실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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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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