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예감에 불을 지핀 것은 9일 보도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미 간 완전한 비핵화의 최종 단계(end state)나 로드맵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 재확인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며 "대화의 모멘텀과 톱다운 방식, 제재의 틀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가 미국 국무부 관리를 통해 확인하고 국내외 언론 보도를 종합한 결과 트럼프 행정부가 정의한 "완전한 비핵화의 최종 단계"는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시설들, 그리고 핵탄두가 장착된 미사일의 폐기라는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 모든 탄도미사일과 화학·생물 무기, 그리고 이중용도 시설의 폐기까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로드맵이란 북한의 완전한 신고와 사찰단의 완전한 접근 보장뿐만 아니라 북한이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기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요구가 '너무 커서 잡을 수 없는 것(too big to grasp)'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핵심적인 과제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에 두어야 한다고 주문해왔다.
'최종 단계'의 합의가 불가능해지면
이른바 '하노이 노딜' 이후 한미 간에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협의가 있었다. 이도훈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현종 안보실 2차장 등의 잇따른 방미를 통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한미 간에 의견 조율이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서 소개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은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에 사실상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한국이 중재자든, 운전자든 한반도 비핵평화 협상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미국이 제시한 '비핵화 정의 문건'에 대해 "강도적 요구"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미국은 제재의 위력에 도취된 나머지 '비핵화+슈퍼 알파'를 고수하려고 한다.
이렇듯 북미간의 교집합이 희미해지고 차집합이 커질 때, 한국이 해야 할 역할은 한국식 해법을 만들어 교집합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한국의 선택이 미국의 범위에 갇히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범위에 갇히는 순간, 남북한의 신뢰마저 크게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과연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해온 '최종 단계'가 합의 가능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의 압박과 톱다운 방식을 혼합해 최대의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이지만, 이는 전형적인 과유불급에 해당된다.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문재인 정부가 생각해온 '포괄적 일탈타결과 단계적 이행'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적인 합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식 해법에 쉽게 동의하지 말고 이견을 솔직히 얘기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자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2월 28일 하노이 기자회견에서 비핵화는 "핵무기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에 근거해서 말이다.
한미 공동의 제안을 만들어야
사실 한국의 대북정책의 힘은 대미정책에서 나온다.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북한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클린턴 때의 페리 프로세스가 그랬고, 노무현-부시 말기에 나온 한미 공동의 해법이 그랬다. 안타깝게도 전자는 미국의 정권교체로, 후자는 한국의 정권교체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한미 관계에 갖는 함의는 여전히 크다.
모쪼록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한미 공동의 제안'을 만들기로 합의했으면 한다. 여러 전문가들과 참모진들의 도움을 받되 양국 정상이 직접 챙기는 '톱 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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