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요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북한이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기고, 핵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생물무기 및 화학무기도 폐기해야 하며, 생화학무기 개발로 전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 시설도 폐기하라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여전히 이를 두고 '빅딜 문서'라고 하지만, 엄밀한 말하면 이는 '항복 문서'에 가깝다. 이는 곧 북한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도대체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미국이 일단 최대치를 제시해 협상 과정에서 이를 조율해 핵심적인 목표, 즉 북핵 폐기를 받아내겠다는 심사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반대로 미국이 상기한 내용을 모두 받아내겠다는 생각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는 대화의 시늉을 하면서도 북한의 거부를 구실삼아 다른 이익이나 목표를 추구하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신범' 볼턴과 '정치적 야심'의 폼페이오
주목할 점은 '비핵화 정의 문서'에 존 볼턴 백악관 안보 보좌관의 지론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것이다. 그는 작년 1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운운해 정상회담의 좌초시킬 뻔한 적이 있었다. 이에 분개한 트럼프가 그를 한동안 대북정책 결정 과정에서 밀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그가 2차 북미정상회담을 전후해선 전면에 등장했다. 볼턴은 일종의 '확신범'에 가깝다. 북한과의 협상은 불필요하고 또한 협상도 붕괴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의 영향력이 커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의 찰떡궁합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선 흔히 볼턴은 강경파로 폼페이오는 협상파로 일컬어지지만 이는 결코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하원 의원 및 CIA 국장 재직 시 폼페이오도 볼턴 못지않은 강경파였다.
하지만 국무장관으로 기용되어 북미협상 총괄 임무가 주어지면서 협상파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년 7월 방미 때부터 강경파로서의 본색을 또다시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한이 폼페이오를 줄곧 불신하면서 트럼프와의 담판을 원했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더구나 폼페이오는 정치인이다. 그는 202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캔자스주 상원의원으로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또한 2024년 공화당 대선 후보 하마평에도 꾸준히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대북 협상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월 18일 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그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직후에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정권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노이 회담이 볼턴 보좌관 때문에 '노딜(No deal)'이 된 것처럼 돼 있지만 사실 회담장에서 볼턴보다 폼페이오의 입장이 강경했다. 폼페이오는 향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는 데 북한과의 안이한 타협은 도움이 안 될 것으로 봤다"
행정적인 쿠데타가 벌어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워싱턴 소식통을 인용해, '비핵화 정의 문서'는 국무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재무부, 에너지부 등의 핵심 관계자들이 모여 누락 사안이 있는지 꼼꼼히 검토하면서 작성된 것이라며 "이 문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충동적으로 어정쩡한 타협을 하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 내용은 밥 우드워드의 책 <공포 : 백악관의 트럼프>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 9월에 출간된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놀랍게도 '북한'이다. 또한 이 책의 결론은 미국의 현직 관료들이 대통령을 상대로 "행정적인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전쟁도, 김정은과의 담판도 불사할 수 있는 트럼프에 대해 현직 관료들이 공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반도에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미국 관료들이 '비핵화 정의 문서'를 작성하면서 북한이 이를 수용할 것이라곤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트럼프에겐 제재를 비롯한 최대의 압박을 가하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코헨의 의회 증언이 하노이 정상회담 일정과 정확히 일치하고 만 것이다. 트럼프는 호텔 방에서 코헨이 자신을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칭하는 게 미국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고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노이에서 '노딜'을 선택해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바꾸겠다고 말이다. 동시에 김정은과의 노딜을 중국과의 무역협상 및 한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상업적 욕구도 작용하고 말았다.
하여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에 하노이 정상회담 결과에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따져 물어야 한다. 왜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이 거부할 것이 뻔한 문건을 들이밀어 협상을 결렬시켰냐고 말이다. 첫째 날(27일) 논의된 북미 양측의 제안을 조율하는 데 보냈어야 할 둘째 날을 왜 문건 들이밀기로 파탄시켰냐고 말이다.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그래서 당당해져야 한다. 미국에 사정하는 태도로는 결코 미국을 바꿀 수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