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하노이에서 "비핵화 의지가 없었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비핵화 정의 문건'은 본인이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요구가 담긴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지난주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두 가지 관련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은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비핵화 문건을 건넨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2월 28일이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이틀째였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28일에 북한이 제안한 제재 완화 대 영변+알파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비핵화 정의 문건을 건넨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랬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부분적인 비핵화 조치가 아니었다.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북한의 대량파괴무기(WMD) 및 탄도미사일 포기 합의문에 명시, 우선적으로 WMD 및 탄도미사일 활동 동결, 이들 무기를 폐기하는 로드맵 합의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비핵화 자체도 쉽지 않은데, 다른 WMD와 탄도미사일 폐기까지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추가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그것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명시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답변을 들으면서 갑갑증이 몰려왔다. 문제를 풀고자 하면 해법을 찾으려 하고 문제를 피하고자 하면 구실을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내세워 구실을 찾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비핵화 자체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생화학무기 및 탄도미사일 폐기까지 포괄하는 미국식 '빅딜'은 '너무 커서 잡을 수 없는 것(too big to grasp)'이다. 비핵화에 선택과 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는 미국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북한의 생화학무기 및 탄도미사일 폐기 요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따져봐야 할 문제들도 있다. 먼저 이는 '비례성의 원칙'을 넘어선 것이다. 안보리 결의가 채택된 이유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및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에 있었지, 북한의 생화학무기 및 탄도미사일 보유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논리는 안보리 결의가 국제법이고 그래서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부권을 갖고 있는 미국도 동의했던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으로 따지면 미국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이란 핵협정 탈퇴, 골란 고원 이스라엘 점유 인정 등이 이에 해당된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미국의 이중 잣대를 거듭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안보리 결의는 얼마든지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며 선택과 집중을 주문했다. 너무 큰 것을 잡으려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반응은 엇갈렸다. 어떤 관료들은 제재라는 지렛대를 강조하면서 "낙관적"이라고 했고, 어떤 관료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며 여지를 두기도 했다. 혹자는 나에게 "그럼 북한이 생화학무기와 미사일을 계속 갖고 있어도 좋다는 뜻이냐"고 몰아붙이듯 묻기도 했다.
이에 나는 미국이 계속 비핵화의 허들을 높이면 북한이 경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다며, 생화학무기와 미사일 문제는 비핵화 이후에 다뤄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한이 판문점 선언에서 "단계적 군축"에 합의한 만큼 남북관계 차원에서 다룰 수도 있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다룰 수 있다는 취지였다.
결국 선택의 몫은 탄핵 위기를 넘긴 트럼프에게 있다. '비핵화+슈퍼 알파'를 고집해 비핵화 자체의 기회도 놓치고 말 것인지, 아니면 비핵화에 초점을 맞춰 실현가능한 '빅딜'을 모색할 것인지를 말이다.
김정은도 트럼프의 선택을 도와야 한다. 비핵화의 핵심인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를 뒤로 미루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한과 방식을 제안하면서 트럼프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의 핵심적인 상응조치들과의 '빅딜'을 시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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