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종전 선언'보다 더 큰 것이 나온다

[정욱식 칼럼] 한반도 문제, 쟁점과 해법 (4) 종전 선언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종전 선언 채택 여부이다. 그런데 하노이는 한반도 종전 선언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공식적인 석상에서 미국 대통령이 종전을 언급한 최초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최초 핵실험 40일 후이자 6자회담 복귀 의사 표명 3주가 지난 2006년 11월 18일,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부시는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백악관도 "우리는 한국전쟁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자 국내 언론은 미국이 북한에 '종전 선언'이라는 새로운 유인책을 제시했다며 이를 '부시의 하노이 선언'이라고 명명했다. 청와대 역시 남북미 종전선언이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큰 추동력을 부여할 수 있다며 상당한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부시의 하노이 선언'은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사실 새로운 선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부시 행정부가 밝힌 종전 선언은 평화협정, 혹은 평화조약과 같은 말이었고, 그것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후에 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부와 대다수 언론은 이를 오독했다. 부시가 말한 종전 선언을 평화협정의 예비단계이자, 비핵화 완료 이전에 하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부시의 제안이라며 종전 선언을 북한에 전달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이에 동의하면서 '3자, 혹은 4자 종선 선언'이 선언문에 담기게 되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종전 선언은 평화협정과 동일한 것이고,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입장을 밝혀 한미간에 큰 혼선이 빚어지고 말았다. 하노이 한미정상회담부터 평양 남북정상회담까지 11개월 동안 한미 양국이 가장 기본적인 외교 문법에서조차 한 목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뭐가 준비된 걸까?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4주 앞둔 1월 31일,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인 스티븐 비건은 비상한 관심을 끌 만한 발언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다. 준비는 끝났다"고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대다수 언론은 종전 선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으로 보인다. 비건의 발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제안에 대한 화답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종전 선언을 언급하지 않은 채,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 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 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남북미중 4자 평화협정 협상을 개시하자는 취지이다.

그리고 김정은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일행이 트럼프를 면담했을 때, 이러한 제안을 전달했을 것이다. 트럼프 역시 이에 대해 흔쾌히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전해들은 김정은이 트럼프의 "비상한 결단력"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이러한 행간이 깔려 있는 것이다. 비건이 "트럼프 대통령은 준비 완료"라고 힘주어 말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 지난 1월 18일(현지 시각) 워싱턴을 찾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협상 담당자들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 측 담당자들이 도널드 트럼프(왼쪽)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댄 스카비노 트위터

"다른 미래는 비핵화보다 큰 것"

추측건대, 하노이 정상회담에선 "한국전쟁을 종식한다"는 명시적인 종전 선언보다는 사실상의 불가침 선언과 평화협정 협상 개시 선언이 담길 공산이 크다. "미국은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혹은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확인하면서 "양국은 정전협정 당사자들과 함께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을 조속히 개시하기로 했다"는 형태의 문구가 담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평화체제 없는 비핵화는 맹목이고, 비핵화 없는 평화체제는 공허하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이미 작년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지극히 당연한, 하지만 오랫동안 미국이 거부했던 이러한 명제에 드디어 합의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합의된 서론이 이젠 하노이에서 각론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일단 고무적인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미래지향적인 현실인식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비건은 "북한에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비핵화를 위한 외교 계획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다른 미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른 미래는 비핵화보다 큰 것"이라고 하면서 비핵화와 조응해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북한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이는 가히 지난 25년 간의 미국의 대북 협상의 '적폐'가 청산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이전 미국 행정부들은 대북 협상에서 오로지 북핵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평화체제 구축에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비핵화 이후의 일로 상정하곤 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평화체제 구축이 단순히 비핵화의 유인책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미래지향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이야말로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징후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은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읍소에 가까운 표현으로 평화협정 협상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무시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이는 김정은의 '명예로운 비핵화'가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요와 핍박에 의한 비핵화(이건 가능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가 아니라 자유의지와 공동의 이익 창출을 통한 비핵화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번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선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합의가 나올 공산이 크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도 있다. 비건이 말한 "비핵화보다 더 큰 다른 미래"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현상변경을 의미한다. 그래서 통 큰 합의가 나올수록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의 저항과 반격도 커질 것이다. 하노이 선언이 "다른 미래"의 시작이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쟁'의 본격화가 될 것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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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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