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월 31일 스탠퍼드대학에서 한 연설과 일문일답 중 가장 눈에 띈 부분이었다. 이 대목을 주목한 이유는 개인적인 희망 및 활동과 맞닿아 있다.
나는 북한이 주장했던 "단계적" 해법으로는 문제 해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왔다. 이게 틀려서가 아니다. 단계를 하나씩 밟으면서 정상으로 가는 방식은 당사자들의 변심과 교체, 한반도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의 반격과 저항, 예기치 못한 변수들의 개입 등으로 정상 정복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난 25년간 북핵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 해결에 실패한 핵심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톱다운 방식을 제안해왔다. 이건 정상회담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협상 당사자뿐만 아니라 의제도 톱다운 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로 간주되어온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의 폐기를 최종적인 상응 조치들인 대북 제재 해제, 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와 동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로드맵에 합의하는 것이 2차 북미정상회담의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유력한 방식으로 제안한 것은 이랬다.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이 북한 땅을 떠나 제3국으로 반출될 때 상기한 상응 조치들을 취하고, 이러한 상응 조치들이 완료될 때 제3국에서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에 돌입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제3국은 러시아나 중국을 유력하게 검토할 수 있다고도 봤다. 이 방법밖에는 희망이 없다고 여긴 나는 이 방안을 졸저 <비핵화의 최후>에 담았고, 국내외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북미 간 공감대 형성?
경로의존성을 경계하면서도 이러한 해법이 조금씩 가시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우선 앞서 소개한 비건의 발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그는 "마지막 핵무기"의 처리 방안을 두고 '폐기하다(dismantle)'가 아니라 '떠나다(leave)'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북핵 폐기 방식으로 외부 반출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 하나는 제재 해제, 대사관급 관계 수립, 평화협정 체결 등 핵심적이고도 최종적인 상응 조치를 "마지막 핵무기가 북한을 떠나는 것"과 "같은 시간"에 이뤄져야 한다고 밝힌 부분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선 비핵화, 후 상응 조치'가 아니라 동시 이행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건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이 먼저 하면 우리는 나중에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병행적으로 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비건의 발언이 북한 측과 얼마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 주목할 점들도 있다. 우선 비건은 최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최선희 외무성 부상, 그리고 그의 새로운 파트너가 된 김혁철 외무성 대미정책 특별대표를 두루 만났다. 그 직후에는 중국 및 러시아의 대표단과도 회의를 가졌다. 이들 두 나라는 북핵 외부 반출시 유력한 접수국들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는 미묘하지만 중대한 변화의 조짐도 담겼었다. 이전까지 북한이 고수한 "단계적 조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 대신에 "빠르게"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국제사회가 환영할 만한 결과"를 내놓겠다는 자신감도 피력했다. 그 직후 김 위원장은 시진핑 주석과의 4차 정상회담을 갖고는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북중 공조 의지도 다졌다.
그리고 1월 중순 김영철 부위원장을 만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우 좋은 만남"이었다고 했고, 김영철 일행으로부터 방미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문제 해결을 위한 비상한 결단력과 의지를 피력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예단키는 어렵지만, 두 정상 사이에 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 관련 기사 : 트럼프와 김정은이 고무된 까닭은?)
결승점에 합의하면
정리하자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선 '스몰딜'보다는 '빅딜', 특히 북핵 폐기 방안 및 근본적인 상응 조치들을 두고 통 큰 합의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러한 결승점에 합의하면,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디테일 속의 악마들"도 수두룩하고 비건의 연설과 질의응답에서도 북미간의 여전한 시각 차이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평화적으로 한반도 질서를 변경하려는 '작용'은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의 '반작용'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반작용을 이겨내려면 김정은과 트럼프의 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중재자로, 때로는 당사자로 역사적 기회를 포착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다. 비건의 표현처럼 "70년 묵은 한반도의 전쟁과 적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거보(巨步)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불가역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저서 <비핵화의 최후>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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