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최재천의 책갈피] <법률가들>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던 1945년 8월 15일, 경성에서는 조선 변호사 시험이 진행 중이었다. 총 나흘 동안 이어지는 필기시험의 이틀째로 오전 상법 시험까지는 치렀지만, 오후의 경제학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6일과 17일의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시험 등은 자동으로 중단되었다. 요즘의 2차 격인 당시 필기시험 응시자는 200여 명. 그런데 시험을 주관할 국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1945년의 필기시험 응시자들은 조직을 만들어 이 위기에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교섭을 담당할 조직의 이름은 이법회 또는 의법회로 정해졌다.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하자는 의미였고, 의법(懿法)은 법을 기리고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자신들의 문제를 법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작명이었다."

시험위원회 측은 세 과목밖에 응시하지 못한 수험생들에게 합격증서를 교부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본국으로 귀환하겠다는 오직 한 가지 목표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에게 조선 변호사 시험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결국, 시험위원회는 이법회에 굴복했다. 106명이 합격증을 교부받았다.

이들의 실체에 김두식 교수가 주목한 이유는, 숫자 때문이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 변호사 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들의 '양'이 법조의 '질'을 구축했다. 이법회의 대표적 인물로 '전두환의 대법원장'이었던 유태흥이 있다. 유태흥은 공식적으로는 제2회 변호사 시험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법회 출신이다. '광주의 인권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시대의 의인 홍남순 또한 이법회 출신이다. 같은 관문을 거쳤지만, 두 사람의 삶은 전혀 달랐다.

이렇듯 김 교수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자 '불멸의 신성 가족'인 법조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 해방 후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 과정을 복원했다. "이들은 누구였고, 일제 시대 무엇을 했으며, 해방공간에서 어떤 꿈을 꾸었고, 그 꿈은 왜 좌절되었나? 초창기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 법조계의 기본 틀은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나?" 학자라기보다는 탐정에 가까웠던 3년이었다고 했다. 열정과 양심이 놀랍다. 나 또한 한국 사회에서 노력과 능력에 비해 가장 과분한 대우를 받는 특권 집단이 법조인이라고 생각한다. 로스쿨을 통해 우회할 듯했지만, 변한 건 전혀 없다. 뿌리부터 썩었다는 말이 있다. 법조가 그랬던 것일까.

▲ <법률가들>(김두식 지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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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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