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장석준 칼럼] <1991, 봄>, '87년의 사이비 승리'와 진실의 순간

보고 싶은데, 아직 못 본 영화가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아니다. 상영관이 이쯤 됐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관람하지 못했을 리 없다. 상영관도 얼마 안 된데다 그마저 하루에 한, 두 차례 밖에는 틀지 않았고, 지금은 내렸다. 다큐멘터리라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바로, 1991년 5월 투쟁을 다룬 권경원 감독의 <1991, 봄>이다.

그나마 독립영화 전용관에서 내년 봄까지 상영한다 하니 다행이다. 또한 각 지역에서 영화관을 빌려 공동체 상영을 하는 진보 단체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경로로든 꼭 봐야겠다. 게다가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이 <경향신문>에 쓴 글("87년이냐 91년이냐", 11월 16일)을 읽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박근혜와 보수의 몰락 후 이제 자신들이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믿고 있는 '86세대'는 이 영화를 꼭 보시라. 87년의 혁명이 91년에 어떻게 소멸했는지 기억이 살아날 거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신들이 어떻게 세상에 타협했고 또 어떻게 더 끔찍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갔는지가 또록또록 기억날 거다. 그래서 2018년의 세상은 영광스러운 87년의 연속이기는커녕 헬조선의 씨앗이 뿌려진 91년의 연속이라는 점도 느껴질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오늘날의 이 끔찍한 야수적 자본주의에 고삐를 채우는 게 이제부터 할 일이라는 점도 느껴질 거다.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서슬 퍼런 문장이다. 이 글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꾸준히 전진해왔다는 신화, 비록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에 일시 후퇴하기는 했지만 촛불 항쟁 덕분에 본궤도로 돌아왔다는 신화가 1991년 5월의 망각을 통해서만 지탱하는 모래성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1991년'이야말로 "민주 혁명이 승리했다"는 익숙한 서사를 턱 밑에서 위협하는 예리한 칼날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1991년은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억 속에 그다지 자주 소환되지는 않는다. 1987년, 1997년(외환위기)에 밀려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 탓에 우리는 아직도 그때의 패배를, 지금도 우리 삶을 규정하는 그 심대한 의미를 제대로 곱씹지 못하고 있다.

이후 한국 사회 행로를 결정한 91년의 패배


1991년 5월 투쟁. 1987년조차 역사책 속 한 장면으로만 어렴풋이 아는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 낯설지 모르겠다. 대략의 경과는 이렇다. 1991년 5월은 마치 1987년 6월이 어느 순간 정지했다 4년 뒤에 갑자기 다시 깨어난 듯 시작됐다. 시위 중에 한 대학생(강경대 열사)이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했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오랜만에 시민들도 박수를 보냈다. 6월 항쟁 때와는 달리 그새 곳곳에서 민주노조운동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깃발 아래 시위에 함께 하기도 했다. 민주자유당 창당 1년이 되는 5월 9일에는 서울 종로가 10만 시위대로 꽉 찼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지만, 다수의 상식 속에서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는 달랐다. 어쨌든 대통령 직접선거로 출범한 정부였다. 분노의 표시는 이 정도로 됐으니 이제 다음 선거를 기다리자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이런 가운데 분신 자결이 잇따랐다. 투쟁을 촉구하는 분신이었지만, 새로운 이름이 명단을 채울수록 이는 절망의 몸짓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보수 언론은 분신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선동에 착수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분신한 이의 유서를 다른 이가 대필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가 강기훈 씨가 그 장본인이라 지목됐다. 유서 대필을 기정사실화하는 언론 보도의 홍수 속에서 애초에 시위 정국이 왜 시작됐는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반전은 한 장의 사진으로 완결됐다. 이번에도 언론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대학생들이 항의의 뜻으로 신임 국무총리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투척한 장면이 '패륜', '폭력' 등등의 큼지막한 활자를 달고 대서특필됐다. 여론은 급반전했다. 가뜩이나 기세가 약해지던 시위대는 이후 완전히 위축돼버렸다. 학기말 시험 기간이 왔고,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뒤늦게 1987년을 완결하려던 투쟁의 참담한 종말이었다.

5월 투쟁은 이렇게 철저히 실패했다. 하지만 그 역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1987년의 어정쩡한 승리(?)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1991년의 분명한 패배가 이후 한국 사회의 행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해 5월의 사건들만으로 역사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 전개되던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압축하고 선명히 상징하는 사건들이 이때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첫째, 5월 투쟁을 거치며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개될 민주화의 폭과 깊이가 확정됐다. 군부 독재 시기에 구축된 체제와 '단절'하는 민주화의 길은 닫혔다. 오히려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길만이 당장은 민주화의 유일한 경로로 남았다.

사실 5월 투쟁이 폭발하기 전까지 상황은 더 암울했다. 1987년 대선을 거쳐 재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일파를 흡수했지만,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밀기로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다. 계속 다른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김영삼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 일환으로 1991년 초까지 공안 정국이 이어졌고, 강경대 열사의 희생은 이런 상황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그나마 5월 투쟁 덕분에 궁정 암투극은 최악의 결말을 피했다. 민주자유당 내 군부독재 잔당도 김영삼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국은 피했더라도 남은 길 역시 "그날이 오면"이 노래하는 '그날'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은 군부독재 세력의 직접 집권이 끝났음을 뜻했지만, 또한 기존 체제와 단절하는 민주화의 길은 닫혔음을 뜻하기도 했다. 이제 이 나라에서는 구 지배 블록의 기득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민주화'만이 가능함이 분명해졌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구 세력과 연대함으로써 이 길을 충실히 따랐다.

1987년에 두 김 씨 중 누구라도 집권했더라면, 기존 체제와 충돌하는 거의 혁명적인 민주화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의 성향과는 상관없었다. 시대의 논리가 그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초한 대선 패배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둘의 집권은 전혀 다른 민주화 경로의 출발점이 됐다. 오랜 지배 세력과 단호히 결별하길 겁내는 민주주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민주주의다.

아직 우리는 '제6공화국'의 시간을 살고 있다

둘째, 5월 투쟁은 1987년에 날개를 단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이후 전개와도 깊이 관련되었다. 5월 투쟁 중의 중대한 사건들 중 하나였던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는 아주 상징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특히 대기업(당시 표현으로는 '대공장') 민주노동조합에서 어떤 가능성이 어떻게 차단됐는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노태우 정부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등장한 민주노동조합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자동차나 조선 업종의 대공장에 들어선 민주노동조합들을 그 싹부터 짓밟으려 했다. 대공장 노동조합들은 초기에 전투적인 파업으로 이에 맞섰다. 대학생들보다 더 격렬하게 전투 경찰과 싸우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 무렵 민주화 투쟁의 새 국면을 상징하는 듯했다. 대기업 노동조합이라면 '노동 귀족'이라는 말부터 떠올리는 지금 세태와는 너무나 다른 광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급기야 1991년 5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위원장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박창수 열사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노태우 정권이 강요한 것은 한진중공업 같은 대공장 노동조합의 전노협 탈퇴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포괄하며 연대 투쟁을 벌이던 새로운 노동조합연맹, 전노협과 거리를 두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지배 세력은 투쟁력-협상력을 지닌 대기업 노동자들이 다른 부문 노동자들과 연대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지배 세력의 노력은 실제 결실을 맺었다. 노동조합위원장이 자칫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이런 상황 속에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하나, 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편한 길로 나아갔다. 스스로 선택해서든 상황에 내몰려서든 결국 이 길에서 다들 만났다. 연대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기대됐던 이들이 어느덧 기득권자라 지탄 받는 신세가 됐다. 그러면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연대가 아니라 그 반대, 즉 경쟁과 차별, 질시와 혐오로 온통 물들어갔다.

다만 현실이 이렇더라도 누구나 다 마음껏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자본과 보수 언론은 그럴 수 없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바로 이런 올가미에 갇히길 진심으로 바라며 온갖 폭력과 술책으로 이를 성사시킨 게 그들이니 말이다.

셋째, 5월 투쟁에 찬 물을 끼얹기 위해 기획된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1980년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불길한 상징이 됐다. 이 사건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시되는 시대, 진실을 향한 열정이 비웃음 당하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지난 21일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노태우 정권의 압력에 따라 검찰이 수사 방향을 기획하고 증거를 조작한 결과라 규정하고, 검찰총장이 강기훈 씨에게 직접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이미 3년 전인 2015년에는 대법원이 강기훈 씨의 무죄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이로써 무려 24년만에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은 유서 대필 '조작' 사건임이 확인됐다.

그 24년 동안 진실은 무참히 농락됐다. 한 인간의 삶이 국가기구가 연출한 거짓에 유린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세태가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아니, 유린당한 것은 강기훈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희망의 광채와 해방의 열기를 띠게 만들었던, 그 전까지의 시대정신 또한 만신창이가 됐다.

1980년대의 시대정신이란 진실을 향한 열정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죽은 자와 죽인 자를 가르며 악의 핵심에 육박하려는 집단적 의지였다. 그것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로 요약돼 민중의 머리와 가슴에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러나 대통령 직접선거로 들어선 첫 정부 아래서 이 시대정신은 1990년대로의 입장을 거절당했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연출한 수사 당국과 이를 진실인 양 떠벌린 언론은 이제는 진실 또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당당히 천명했다.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려는 목소리에 조소를 퍼붓고, 세상의 토대는 그런 진실 따위가 아니라고 훈계했다. 이런 토대 아닌 토대 위에 풋내기 한국 '민주주의'가 두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 보면 가짜 뉴스의 범람은 결코 요즘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그 뿌리는 1991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짜 뉴스의 최초 발명자 또한 시민사회 안의 별 볼 일 없는 극우파 한량 따위가 아니다. 뼈대 있는 대한민국 국가기구가 그 특허권자다.

지금껏 이야기한 것들 말고도 1991년 5월 정국에서 읽어낼 수 있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는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논의만으로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시간이 1991년 5월과 곧장 이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큰 틀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 시간의 연장 속에 있다.

즉, 우리는 아직도 '제6공화국'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물론 1987년에 헌법이 크게 바뀌고 나서 헌법을 다시 개정한 적이 없으므로 누구도 현재 대한민국이 '제6공화국'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이후 '제6공화국'은 정권 주역들이 기피하는 명칭이 됐다. 그래서 애써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내며 거리를 뒀다. '87년 체제' 같은 건조한 대체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제6공화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해 5월의 거리에서 나는, 우리는 패배자였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패배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그때 대결했으나 결코 이겨내지 못한 상대가 여전히 우리를 노려본다. 심지어는, 촛불 이후에도 말이다.

노회찬의 꿈 '제7공화국'

문득 고 노회찬 의원이 2007년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하며 제시한 비전이 떠오른다. 그때 노회찬 의원은 '제7공화국'을 설파했다. '제7공화국'이라 하니,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헌법 개정부터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제6공화국'의 시간에 짙은 그림자로 남아 있는 1991년 5월을 시야의 중심에 둔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이 경우에 '제7공화국'이 상징하는 바는 과감한 단절이고,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내딛는 한 걸음이다. 어정쩡한 타협의 틀에 갇혀 발육이 멈춘 민주주의를 다시 성장시키는 일이고, 강제로 차단당한 연대의 가능성을 되살리는 일이며, 식어버리거나 길을 잘못 든 열정을 새롭게 불러내는 일이다.

나는 2016~2017년 촛불 항쟁이 이러한 '제7공화국'의 시작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아직은 촛불을 87년의 사이비 승리와 연결하는 서사가 91년이라는 진실의 순간과 대조하며 다음 과제를 채근하는 몸부림을 압도한다. 그렇기에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칼럼의 도발적인 제목은 지금 더없이 유효하다. "87년이냐, 91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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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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