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속 고종 아닌, '만민공동회'를 기억하자

[장석준 칼럼] '민심 그대로 국회' 향한 긴 민주 혁명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서울 종로에서는 오늘도 시민들이 모여들어 집회를 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종로 거리는 어느새 사람들로 꽉 찼다. 한 사람씩 앞에 나와 연설을 하기도 했고, 무리 곳곳에서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즉석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결론은 정부가 시민들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받아들일 때까지 싸움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때는 11월, 계절은 이미 겨울을 향해 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일찍 졌고, 바람이 자못 매서웠다. 그런데도 밤늦도록 시민들은 흩어질 줄 몰랐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거리에서 밤을 새우려는 모양이었다. 어둡기도 하려니와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이곳저곳에서 땔감을 모아 불을 피워 올렸다. 이 불은 어느덧 이 시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서울 한 복판에서 며칠 동안 계속되는 철야 시위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밤거리에 남은 시민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게 어둠과 추위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종로에서 집회가 열리면,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정부 전복 음모라 비난하는 집회였다. 그 집회에서는 종로 쪽 시위꾼들을 때려잡자는 둥 온갖 험한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저들이 조만간 종로로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저쪽 집회에서는 정부 모처에서 나온 돈이 참가자들에게 수고비로 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들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과 초조함에도 불구하고 철야 시위 분위기는 단호하고 완강했다. 이번이 이 나라를 뜯어고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비장한 느낌이 좌중을 지배했다. 그러니 날이 졌다고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흩어질 수는 없었다. 끝장을 봐야 했다. 자정이 가까워오며 내리기 시작한 무심한 가을비조차 이 의지를 꺼뜨릴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묘사한 장면은 우리 역사의 어느 순간일까? 아마 많은 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느낄 것이고, 하나 이상의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2016~17년 촛불 항쟁을 떠올리는 이들이 가장 많을 테고, 2008년 촛불 시위를 상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혹은 1987년 6월, 1980년 5월, 더 거슬러 올라가 1960년 4월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60년 4월조차 충분히 거슬러 올라갔다고는 할 수 없다. 위에 묘사한 사건은 1898년 11월에 전개된 만민공동회 운동이다. 그리고 올해 2018년은 한국사 최초의 도시형 민주화 투쟁이었던 이 운동의 12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원형,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야 다들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국사 교과서에서 독립협회를 다루는 대목에 잠시 나오는 이름 정도로만 아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복습 삼아 만민공동회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만민공동회의 출발은 관민공동회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는 시민만의 집회가 아니었다. '관'과 '민'이 함께 하는, 그러니까 정부 각료와 시민이 만나는 자리였다. 아직 의회가 없는 나라에서 각료가 시민을 직접 만나 쟁점 현안을 보고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참석한 각료는 독립협회에 호응한 일부 인사(초기에는 이완용도 여기에 끼어있었다!)뿐이었지만 말이다.

관민공동회의 주요 의제는 열강에 넘어간 각종 이권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대사관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간(아관파천) 덕분에 일본의 손아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고종은 마치 이 해법에서 길을 찾은 듯 했다. 한 열강의 지배를 피하려면 여러 열강들에게 동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부는 경제적 이권을 각국에 고루 나눠줬다. 광산 채굴권, 철도 개설권, 항만 이용권 등등이 줄줄이 러시아와 일본, 미국과 유럽 강대국들 수중으로 넘어갔다.

관민공동회에 몰려든 시민들은 이들 이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성한 민중은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단상의 대신들에게 따져 묻는 수준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달아오르자 당장 관리들이 발길을 끊었다. 독립협회도 집회를 더 개최하지 않으려 했다. 만민공동회의 본격적인 역사는 바로 이때 시작된다.

1898년 3월, 서울 시민 수만 명이 독립협회와 상관없이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관민공동회와 달리 곧바로 군대가 출동해 해산하려 했지만,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이후 100년 넘게 이어질 가두 투석전 역사의 첫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정한 승리였다. 군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시민들의 결의에 정부는 부랴부랴 일부 이권을 회수했다. 이 승리 경험이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여름이 지나고 10월 들어 정부 안에서 수구, 개혁 파벌들 사이의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독립협회도 여기에 개입했다. 관민공동회가 다시 개최됐고,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귀족 의회(상원)를 창설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헌의6조가 결의됐다. 이때부터 그해 연말까지 궁궐에서는 어지러운 음모극이 이어졌다. 고종 황제는 처음에는 헌의6조를 받아들일 것처럼 둘러대다 돌연 수구파 내각을 구성해 독립협회를 탄압했다. 그러다가도 시민들의 시위가 거세지면 다시 유화책을 꺼내들었다. 물론 끝내 의회 비슷한 것은 소집하지 않았다.

이 시기 역사를 여기에서 자세히 복기할 수는 없다. 독자들께는 나 역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책인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의 공저 <1898, 문명의 전환: 대한민국 기원의 시공간>(이학사 펴냄, 2011)을 추천한다. 다만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잡한 궁정 드라마를 넘어 거대한 독자적 흐름으로 떠오른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 운동이다.

시민들은 이번에도 독립협회와 상관없이 거리에 나섰다. 11월 5일 새벽에 독립협회 간부들이 전격 체포됐지만, 시민들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이날부터 무려 19일 동안 무기한 철야 시위에 나섰다. 이 글 첫머리에 그린 모습이 다름 아니라 이 열 아흐레 중 어느 날의 풍경이다. 매일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정부가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고 애초에 하기로 한 의회 설립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시민들의 주장에 일부 장교나 병사들까지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풀었다가 도리어 병사들이 시위대에 합세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어용 단체의 맞불 시위였다.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가 조직됐고, 이들도 집회를 열었다. 철야 시위 열기가 수그러들 줄 모르자 급기야 보부상들은 만민공동회 대회장을 습격했다.

난투가 벌어졌고, 만민공동회 쪽 시민 한 사람이 사망했다(11월 22일). 신기료 장사, 오늘날로 치면 제화공이던 김덕구였다. 사망 당시 그의 옷에서 나온 것은 신 깁는 도구 몇 가지와 전당표 열아홉 장뿐이었다. 한 가난한 노동자가 최초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백색 테러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이후 이 땅에서 비슷한 시위와 항쟁 와중에 목숨을 잃게 될 열사들의 긴 목록이 이렇게 시작됐다.

시민들은 김덕구의 시신을 지키며 투쟁을 완강히 이어갔다. 그러다 11월 26일 고종 황제가 여론에 밀려 상당히 누그러진 어조의 칙유를 발표하자 김덕구의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12월 1일에 김덕구 열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사회장 혹은 시민장 형식으로 거행됐다. 이 또한 1980년대~1990년대에 숱하게 반복된 열사 투쟁(가령 1991년 5월 투쟁)의 원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위에 말했듯이 만민공동회 운동 자체는 끝내 패배로 끝났다. 12월이 돼도 민주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자 고종 황제는 드디어 군대를 움직였다. 12월 24일 서울 시내가 요즘 말로 하면 '계엄 상태'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결국 의회 같은 것은 없는 상태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별개

한데 만민공동회 운동은 그 역사적 의의에 비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느낌이다. 만민공동회의 시작과 긴밀히 연관된 조직, 독립협회 때문이다.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독립협회를 연구할수록 이 단체의 실상이 옛 국사 교과서 속 긍정적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음이 드러났다. 서재필이나 윤치호 같은 핵심 간부들은 민주주의자도 아니었고, 민족주의자조차 아니었다(이후 더 많은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이상재나 남궁억은 논의로 하고).

또한 1898년 가을에 헌의6조를 제기하는 데 앞장선 안경수 같은 급진파 간부는 박영효 세력과 깊이 관련돼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박영효는 고종 치세 내내 주로 일본과 손잡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작위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해석하기에 따라 만민공동회 운동 배후에 친일 세력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실제 이런 입장에서 만민공동회 경험을 폄훼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만민공동회 같은 진정한 근대적 대중운동의 생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운동에서 대중은 늘 특정한 정치적 대표 집단의 이념이나 노선, 실천을 넘어서 존재하며 움직인다. 따라서 운동 전체를 그런 대표 집단으로 환원해 설명하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독립협회 간부들 없이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이어간 1898년 서울의 대중이 정확하게 보여준 것처럼, 대중은 늘 가장 중요한 독자적 주인공이다.

가령 100년쯤 뒤에 후대 역사가가 2016~17년 촛불 항쟁을 연구한다 치자. 정당의 공식 발표문들과 신문 정치면 더미 속에서 이 역사가는 정의당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장한 것이 안철수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역사가가 이를 근거로 안철수의 정치 행보에서 촛불 항쟁의 지향과 색깔을 찾으려 한다면, 그 결론이 어떻겠는가? 촛불 시민 중에 미래 의학의 도움으로 이때까지 생존한 이가 있다면, 너무나 황당해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행보를 촛불 항쟁과 동일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항쟁 기간 내내 민주당은 촛불 시민들의 요구를 몇 주 뒤에야 등 떠밀려 쫓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우상호 의원(당시 원내대표)은 이게 다 계산된 작전이었다는 듯이 술회했다. 후대 역사가가 이런 증언만 믿고 촛불 시민들이 민주당 작전대로 움직였다고 평가한다면, 어떻겠는가? 지금 이 문단을 보고 뒷목을 잡을 촛불 시민들이 부지기수이리라.

촛불 시민이 그러하다면, 만민공동회의 시민이라고 달랐겠는가? 120년 전의 대중이라고 달랐겠는가? 독립협회는 독립협회였고, 만민공동회는 만민공동회였다. 둘은 서로 관련됐지만, 또한 별개였다. 특히 1898년 11월에 매일 시내에 모이고 거리에서 밤을 새우며 황국협회 깡패들에 맞서 싸우고 김덕구 열사 장례식에 기꺼이 성금을 낸 대중은 그러했다.

그 안에는 평양 출신의 청년 연설가 안창호가 있었고, 성균관 학생 신채호가 있었으며, 미래의 항일운동가 양기탁이, 박은식이, 이회영이, 이동녕이 있었다. 만민공동회를 경험한 이 세대를 통해 망국의 바로 그날부터 왕조 부활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독립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1919년 3월에 서울에서 시작된 저 거대한 대중운동은 또 어떠한가? 그 안에 21년 전 경험이 살아 꿈틀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오직 2016년 겨울의 거리에서 29년 전인 1987년 여름이 어떻게 기억됐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 만민공동회 운동은 1894년의 농민혁명 운동과 함께 1919년 3월, 1960년 4월, 1980년 5월 광주, 1987년 6월, 2008년 촛불 그리고 2016~17년 촛불의 직계 선조다. 이후 거의 모든 세대마다 반복된 혁명적인 민주주의 운동의 첫 세대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긴 민주 혁명'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민주 항쟁의 반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굵은 선으로 쭉 이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최근 내가 참여하는, 민주 항쟁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한 공부 모임에서도 이런 구상이 진지하게 논의됐다. 한국 현대사를 꿰뚫는 '긴 민주 혁명'을 상정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각 항쟁은 얼핏 보기에 패배나 미완성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장기 민주 혁명의 한 계기들이었다고 본다면, 평가가 달라진다. 어느 사건도 단순히 실패였다고만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미 촛불과 1987년 6월을 1980년 5월에서 시작된 흐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익숙해 있다. 1980년 광주에서 시작된 거대한 제헌적 과정 안에 지금 우리가 존재함을 거듭 실감해왔다. 이제 이 시각을 더 확대해보자. 1960년 4월, 1919년 3월은 물론이고, 1894년과 1898년으로 말이다.

120년도 더 전의 이 두 항쟁은 민중 대표가 참여하는 정치적 결정의 장을 만들려는 열망으로 끓어올랐다. 제대로 된 의회 말이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촛불 항쟁의 다음 과제로 국회 개혁, 선거제도 개혁과 마주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의회를 만들려는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렇듯 장기 민주 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며, 결말은 열려 있다. 갑오년 농민, 만민공동회 시민이 승리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아직 미결정이다. '민심 그대로 국회'를 만들려는 것과 같은 우리 세대의 노력 속에서 이 물음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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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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