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도넛 경제학'이다!

[장석준 칼럼] 도넛 경제학, 혹은 구명 튜브 경제학

언제부터인가, 아니 돌이켜보니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부터인 것 같은데, 정치 논쟁에 어려운 경제학 용어가 출몰하는 일이 잦아졌다. 요즘 풍경도 그러하다. 평화를 의제에 올린 남북미 정상의 잇단 만남에 잔뜩 골이 난 극우 언론은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구호를 난타하고, 극우 정당은 이를 그대로 따라 읊는다. 이름 난 대학 경제학과 교수들이 척탄병으로 동원되고, 공격은 사뭇 효과를 발휘한다.

오늘날 경제학의 위상이 이와 같다. 경제학은 단지 여러 사회과학 가운데 가장 위세가 드높은 분과 정도가 아니다. 경제학은 사실상 '유일' 사회과학이다. 다른 분과들에서 생산된 지식은 반드시 경제학의 최종 검열을 거쳐야만 공인된 지식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경제학이 이런 검열에 첫 번째 잣대로 내세우는 것이 경제 성장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내총생산(GDP) 성장에 기여하는지 여부다. '소득주도성장'론에서도 이 기준은 시뻘겋게 살아 있다.

지금껏 우리는 이런 지식 피라미드를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모두가 다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소리 높여 다른 대안을 내세우지도 못했다. 주류 경제학 체계가 자본가와 부유층의 이익을 편든다고 의심하면서도 GDP 성장이 절대적 기준이자 목표가 되는 피라미드 전체를 허물어뜨리려고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우물쭈물하며 끌려 다니는 모양새도 더는 편하게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올해 유례없이 뜨거웠던 게 소득주도성장 논쟁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씨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나마 기나긴 혹서기가 끝나고 한반도 주민에게 1년 중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계절(왜냐하면 봄은 이제 황사와 미세먼지의 계절이 됐으므로), 가을이 찾아왔건만, 이 또한 철모르는 태풍에게 일격을 당했다. 모두가 기후 변화의 심란한 광경들이다.

기후 변화가 인류의 화석 에너지 남용이 초래한 대기 중 이산화탄소 급증 탓임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어떤 명제나 공식보다 더 과학적인 진실이다. 달리 말하면, GDP 성장은 인간 경제 활동의 증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탄소 배출량 증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성 경제학의 안내에 따라 오로지 성장에만 계속 골몰할수록 기후 변화의 역풍은 더욱더 우주적 규모로 확대된다.

우리는 이 역풍을 점점 더 몸으로 실감하는데, 우리의 머리는 여전히 경제학이 지배하는 지식 피라미드 안에 갇혀 있다. 2018년은 보통사람들이 이 영육분리를 뼈저리게 느낀 원년이라 할만하다. 어느 쪽에 우선권을 줘야 하는가? 시들어가는 몸인가, 아니면 굳어버린 머리인가? 전대미문의 어려운 선택이 코앞에 닥쳐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권의 책이 우리를 찾아왔다. 영국의 한 비주류 경제학자(케이트 레이워스)의 저작 <도넛 경제학>(홍기빈 옮김, 학고재 펴냄)이다.

'도넛'이라기보다는 '구명 튜브'?

'도넛' 경제학이라니, 묵시록적 상황치고는 너무 천진하고 태평한 이름이다. 왜 하필 트랜스 지방산과 설탕 범벅인 이 음식을 앞에 내세웠을까? 입에 달다고 마냥 먹어대다가는 성인병을 줄줄이 불러올 이 음식은 차라리 경제 성장 만능주의의 상징으로 더 어울리지 않는가?

실은 책 제목의 '도넛'은 실제 도넛이 아니다. 도넛을 연상시키는 2개의 동심원이다. 종이에 2개의 동심원을 그리고 안쪽 원과 바깥 쪽 원 사이를 색칠해보라. 도넛 모양이 나온다. 레이워스는 이 도넛 모양 도표로 우리 머릿속의 오래되고 단단한 건축물을 무너뜨리려 한다. '도넛'에서 연상되는 목가적 이미지와는 달리 <도넛 경제학>이 의도하는 바는 우선은 파괴와 해체다.



레이워스가 그리는 첫 번째 원은 사회적 기초, 즉 모든 이가 누려야 할 최소 수준의 안녕(wellbeing)을 가리킨다. 인간 존엄성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준들이다. 구체적 목록으로 풀어보면, 물, 에너지, 식량, 주거, 보건, 교육, 소득과 일자리, 평화와 정의, 정치적 발언권, 사회적 공평성, 성 평등, 각종 네트워크 등등이다. 인간 사회의 경제 활동이 이 원 안쪽으로 오그라든다는 것은 곧 경제적 결핍 때문에 위기에 처함을 뜻한다.

레이워스의 도식에서 이 첫째 원을 감싸는 더 큰 원은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가리킨다. 인류가 생존하려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기준들이다. 레이워스가 정리한 목록에 따르면, 기후 변화,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 해양 산성화, 화학적 오염, 질소와 인 축적, 담수 고갈, 토지 개간, 생물 다양성 손실 등이다. 인간 사회의 경제 활동이 이 원 바깥쪽으로 뻗어나간다는 것은 곧 생태계의 혼란과 역습으로 또 다른 위기를 불러 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레이워스의 그림에서 바람직한 경제란 첫째 원과 둘째 원 사이를 채우는 면, 즉 도넛형 공간이 된다. 사실 이 도넛 면은 첫째 원 안쪽의 상당한 공간과 둘째 원 바깥쪽의 너른 공간에 포위된 형국이다. 그러니 결코 넓을 수가 없다. 첫째 원 안쪽으로 수축되지 않으려고 경제 활동 규모를 키우다가는 쉽게 둘째 원을 넘어서게 된다. 둘째 원 바깥쪽으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반대의 노력을 하다가는 또한 첫째 원을 넘어가는 후퇴가 되기 쉽다. 그야말로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그렇다. <도넛 경제학>이 주창하는 경제 활동의 목표는 이제 성장이 아닌 균형이다. 인간 존엄성을 보장할 사회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일정한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지구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이 발전의 방향과 수준을 조절해야 한다. 균형이라 하니, 흔히 이야기하는 '중도'니, '제3의 길'이니 하는 표어들처럼 미적지근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이워스의 그림에서 도넛 면 안의 어떤 점일 이 균형은 도달하기 쉽지 않은 균형, 참으로 역동적인 균형이다. 안쪽 원과 바깥쪽 원 사이 좁은 길목에서 방향을 잡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안쪽 원과 바깥쪽 원 사이의 이 협애한 면에는 저자가 붙인 '도넛'보다는 다른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구명 튜브'다. 거센 파도에 휩쓸리는 가냘픈 생명에게 생명줄이 되어주는 구명 튜브 말이다. 이쪽이 <도넛 경제학>이 담고 있는 시급하고 절실한 메시지를 더 잘 형상화한다.

아무튼 레이워스는 경제를 바라보는 세인의 시각을 확 바꿔야 한다면서 이 도넛 혹은 구명 튜브 그림에서 출발하자고 한다. 난공불락의 성채 같은 기존 경제학의 거대한 체계에 고작 그림 하나로 도전장을 내민다니 황당하다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은 주류 경제학 역시 그림에서 출발한다. 만다라나 아이콘은 종교에만 있지 않다. 자연과학 수준의 과학임을 자처하는 경제학 역시 의외로 간단한 몇몇 그림의 틀 안에 갇혀 있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을 지배하는 그 그림이란 끝없이 우상향으로 뻗어나가는 곡선 같은 것이다. 바로 경제의 무한한 성장을 나타내는 도형이다. 경제학 논문과 서적은 번잡하고 현란한 수학 공식들로 넘치지만, 경제학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이런 단순한 도상이다.

말하자면 레이워스는 경제를 둘러싼 상식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재구성하려 한다. 도넛 혹은 구명 튜브 도상을 통해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층위에서 경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재구축하려 한다. 어떤 경제적 사태든 도넛-튜브라는 결코 광활하지 않은 면 안에 그때그때 인간의 좌표를 찍는다는 마음으로 대하자고 제안한다. <도넛 경제학>의 도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도저하고 심각하다.

21세기 인류를 위한 실체경제학

<도넛 경제학>은 제1장에서 GDP 성장 대신 도넛 그림을 경제 활동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한 뒤에, 다음 5개 장에 걸쳐 우리의 경제관에서 바뀌어야 할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자기 완결적 시장이라는 도식은 사회와 자연에 묻어든 경제로 바뀌어야 한다.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인간관은 상호 의존하며 다양한 잠재력을 지닌 인간의 강조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기계적 균형이라는 19세기 물리학식 관념은 동학적 복잡성에 길을 내줘야 한다. 쿠즈네츠 곡선이라는 억측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면 모두 부자가 된다는 미신은 분배의 적극적 설계로 대체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환경도 정화된다는 미신 역시 재생과 순환, 회복력을 중심에 둔 경제의 설계로 극복돼야 한다.

이렇게 주류 경제학이라는 거대 건축물을 이루는 주요 기둥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새로운 기둥을 세운 뒤에 레이워스는 처음 논의로 돌아온다. 마치 도넛처럼, 이야기의 끝이 시작과 다시 만난다. 결국 이 모든 재구축 작업은 이제껏 경제 활동의 최대 목표로 군림해온 성장 맹신주의에서 벗어남으로써 완결된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비행기의 이륙에 빗대었던 월터 로스토우의 비유를 뒤집어 저자는 말한다. 이륙했던 비행기는 언젠가는 착륙해야 한다고.

이미 마르크스주의나 제도주의, 생태주의나 여성주의 같은 비주류 경제학 사조에 익숙한 독자라면, <도넛 경제학>의 각 장에 담긴 내용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 기발하거나 참신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레이워스의 장점은 그런 각론의 독창성에 있지 않다. 여러 이단적 경제학 흐름의 주장을 엮어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풀어내는 솜씨야말로 <도넛 경제학>의 미덕이다. 자칫 딱딱하고 건조할 수 있는 경제학설들이 저자의 손을 거쳐 어떤 독자든 단박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또한 모든 좋은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를 듣고 난 이의 삶이 그 전과 같을 수 없도록 새 지평을 열어준다.

이런 레이워스의 이야기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21세기 실체경제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실체경제학'이란 <도넛 경제학>의 지적 뿌리 중 한 사람인 칼 폴라니가 유작 <인간의 살림살이>(이병천, 나익주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폴라니는 대다수 현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란 '형식적' 경제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그들에게 경제 활동이란 희소한 자원으로 이뤄진 세계에서 최대의 산출을 거두는 일이다. 따라서 경제학의 관심 역시 산출량을 극대화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어떤 문제 상황이든 결국은 더 많은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경제 논리는 늘 더 많은 축적에서 길을 찾는 산업자본주의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폴라니가 보기에 본래 경제란 그런 것이 아니다. '형식적' 경제와 구별해 그는 이를 '실체적' 경제라 칭한다.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인간을 먹이고 기르며 살리는 일이다. 국역자들이 훌륭하게 옮긴 대로, 살림살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좋은 삶을 이루도록 사회 전체가 벌이는 다양한 활동들이다. 그리고 이때 '좋은 삶'이란 지금처럼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쌓아놓으며 그래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모든 인류는 오랫동안 이런 실체적 경제의 습속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대략 제1차 산업혁명이 전개되던 무렵부터 반역의 세월이 시작됐다. 산업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형식경제 논리가 부상했다. 이것이 20세기, 제2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서는, 폴라니가 대표작 <거대한 전환>에서 바랐던 바와는 달리, 완전히 전 세계 유일 표준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이 흐름이 지구 생태계와 충돌해 기후 변화 같은 재앙을 몰고 오는 국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물론 그 동안 실체경제의 복권을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개혁이든 혁명이든 사회주의의 여러 흐름이 추구한 바는 한 마디로 산업 시대에 맞는 실체경제의 재구축이었다 할 수 있다. 역사적 사회주의 세력들은 레이워스가 그린 두 원 중 작은 원(사회적 기초)에 주목해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이 원 바깥쪽으로 뻗어나가는 경제를 지향했다. 어떤 경우에, 아니 많은 경우에 이는 성장을 추구하는 기존 자본주의와 외관상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계나 모순은 차치하고라도 이 관성은 이제 더는 그대로 지속될 수 없다. 레이워스가 덧붙이는 또 다른 원(지구생태계의 한계) 때문이다. 21세기에는 사회적 기초를 충족시키는 노력뿐만 아니라 이 노력과 생태적 한계 사이의 쉽지 않은 균형을 찾아나가는 것도 실체경제 재건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한다.

덕분에 항상 "더 많은 생산”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형식경제 논리를 넘어서는 실체경제의 원리 또한 더욱 명확하고 풍부해진다. 산출량 증대 이상으로 분배나 재생이 중심 원리로 부상한다. <도넛 경제학>은 이렇게 21세기에 맞는 실체경제 재구축 방향을 명쾌히 제시한다.

녹색성장과 탈성장 사이에서

그럼 기후 변화 재앙과 성장 맹신주의의 반성 이후에 취해야 할 구체적인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혹자는 '녹색성장'을 말한다. 여전히 경제 활동의 일정한 확대는 필요하니(저발전 지역일수록 더욱) 에너지 전환처럼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노력 속에 일자리도 늘리고 분배 몫도 늘리자는 것이다.

반면 '탈성장'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지구 생태계를 더 파괴하지 않으려면 당장 인류 경제 활동의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러미 리프킨처럼 당분간은 녹색성장을 추진하다 어느 시점에 탈성장 국면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는 단계론(<3차 산업혁명>, 안진환 옮김, 민음사 펴냄)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레이워스는 녹색성장과 탈성장 사이에서 '불가지론'의 입장을 제안한다. 섣불리 어느 한 편을 정답인 양 강변하지 말고 어쨌든 GDP 성장 맹신주의에서부터 빨리 벗어나보자는 것이다. 분명한 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도넛 경제학>이 제시하는 '역동적 균형'이라는 새 기치에 가장 어울리는 해법이기도 하다.

이렇듯 <도넛 경제학>은 우리 세대 앞에 놓인, 두 낭떠러지 사이의 좁은 길을 정직하게 가리킨다. 그러면서 그 길을 함께 열어가자고 호소한다. 성공의 보장도 없지만, 다른 길도 없다.

"인류가 지구에 입힌 손상을 처음으로 깊이 자각한 세대이자 번영과 발전의 정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세대"(국역본 표지에 실린 문구)에게 달리 더 어떤 지적-도덕적 결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도넛 경제학'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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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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