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전'에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중단 선언에 이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 중단으로 화답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한미연합훈련을 중단되어야 북한도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겠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는 지난해 완성을 선언한 "국가 핵무력"을 지렛대로 삼아 올해에는 기어코 북미 간의 적대 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선공후득에 나선 이유
이번에도 북한은 먼저 행동에 나섰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 시험장이 위치한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에 착수한 것이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약속한 바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그 이후 미국이 종전선언과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한 북한이 미국의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한 시점에 북한이 먼저 약속 이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과거 행태는 물론이고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강조해온 최근 입장과 비춰볼 때에도 파격에 가까운 것이다.
더구나 "북한이 평양 인근의 ICBM 조립시설도 해체한 것으로 보인다"는 미국의소리(VOA) 방송도 나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ICBM "생산중단"을 위해 엔진 시험장 해체와 더불어 물리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셈이 된다. 아울러 미군 유해 송환도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 이외에 이렇다 할 상응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앞서 가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먼저 공을 들이면서 취하고자 하는 이익은 북한 매체들을 통해 확인된다. 종전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은 7월 6~7일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이에 대한 합의를 기대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껄끄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에 따라 북미 공동성명 이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북한은 선제적인 행동을 통해 미국에 공을 넘기는 선택을 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김정은은 북한 정부 수립 70주년이 되는 9.9절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올해 신년사를 통해 "공화국 창건 70돌을 대경사"로 치르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런데 "국가 핵무력"을 잔칫상에 올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은 이미 "완전한 비핵화"를 다짐했고 주민들에게도 이를 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은은 잔칫상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싶어한다. 그건 바로 70년 동안의 남북·북미 간의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관계로 전환한다는 이정표이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
트럼프, 이번에도 화답할까?
북한의 ICBM 엔진시험장 해체 소식을 접한 트럼프는 "환영한다"고 했고 폼페이오는 "(북미정상회담에서 한) 약속에 완전하게 부합한다"고 말했다. 미국 주류로부터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얻은 게 뭐냐'는 힐난을 받아왔던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단비와도 같은 소식을 게다. 사정이 이렇다면 트럼프 행정부도 종선선언이나 이에 준하는 조치로 화답할 차례이다.
문제는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미 종전선언'을 언급한 지 4개월이 지나도록 미국이 이에 대해 명확한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이 비핵화를 유도할 유력한 수단을 미리 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든지, 종전선언이 사실상 불가침 선언에 해당돼 꺼려한다든지, 유엔사와 주한미군의 지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해석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분석 못지않게 따져봐야 할 점도 있다. '선 종전선언, 후 평화협정'이 한미간에 합의된 것이냐'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가 반문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정부 때에는 혼선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종전선언을 평화협정의 예비 단계로 상정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동일한 것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상이몽이 1년 넘게 존재했고 이에 따라 종전선언 아이디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일단 내가 알기로는 트럼프 행정부가 평화협정의 예비 단계로 종전선언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트럼프가 '종전'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이것이 평화협정의 예비단계로서의 종전선언을 의미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7월 13일과 7월 23일 <연합뉴스>의 서면질의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답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아태 담당 대변인은 종전선언에 대한 잇따른 질의에 대해 마치 동문서답 하듯이 "우리는 북한이 비핵화했을 때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평화체제 구축에 전념하고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이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관계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이, 그리고 한미간의 협의 결과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ARF에서 4자 외교장관 선언을
문재인 정부의 스텝이 꼬인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정부가 '남북미 3자 종전선언'을 추진키로 했다면 크게 두 가지가 전제되었어야 했다. 하나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공동의 안을 만들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전협정의 당사국인 중국의 이해를 사전에 구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을 조속히 하자는 북한과 이를 뒤로 미루려는 미국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위험마저 감돌고 있다. 한중관계의 오해도 여전한 채 말이다.
종전선언을 조속히 할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프레임에 갇혀서도 안 된다. 명칭에서부터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기실 종전선언은 명칭부터 혼란을 동반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종식했다"고 선언하면 그 성격과 구속력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한국전쟁을 종식하기로 했다"고 선언하면 이미 판문점 선언과 북미 공동성명에 그 취지가 담겼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한미간의 협의에 난항이 있는 이유도 이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안적인 명칭으로는 '종전과 평화를 위한 평화협정 개시 선언'이 아닐까 한다. 즉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 협상의 개시를 선언한다'는 합의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때마침 8월 초순에는 싱가포르에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예정되어 있고, 이 자리에는 남북미중 외교장관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4자 간 외교장관 선언을 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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