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양립 불가능한 과제인가? 즉 한반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4.27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한반도의 미래상을 놓고 한국의 대표적 석학 간에 첨예한 공방이 시작됐다.
이달 초,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반도에서 남북의 평화 공존은 통일로 가는 전 단계가 아니"며 통일 가능성을 제거한 뒤 남북 평화 공존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2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면서 '양국체제론' 또는 '한반도 2국가론'은 "주창자들의 의도와 별도로 분단체제 기득권 수호라는 기능을 수행하기 십상"이며 "당장에 비핵화를 실현할 방책도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가 지난 5일 일본 도쿄대 강연에서('한반도의 냉전 해체와 평화 공존의 조건') 한반도 평화를 위해 통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백 교수는 12일 한반도평화포럼 주관 강연을('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 통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동시에 추진해야 할 과제라고 반박한 것이다.
경향신문 6일 자 보도에(☞ 관련 기사 : 통일 가능성 제거한 뒤 남북 평화 공존 논의를) 따르면 최 교수는 도쿄대 강연에서 "신질서에서 이해되는 평화 공존은 통일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는 남북관계"라면서 "미래의 남북관계는 통일된 민족 단일국가가 아니며, 어떤 것이 될지는 열려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백낙청 교수가 주도해온 '분단체제론'에 대해 "이 말의 함의는 한반도의 탈냉전과 남북 평화 공존은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고, 그 다음 단계는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이자 분단 이전 상태의 복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탈냉전, 평화 공존은 분단의 극복을 통한 미완의 통일된 민족독립국가의 때늦은 완성이 아니라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역사적 경로를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일 가능성을 제거한 평화 공존 논의'라는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백 교수는 12일 강연에서 이는 자신이 주장해온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의 성격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결과라고 본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특히 자신의 분단체제론이 1민족 1국가를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최 교수의 평가는 분단체제론의 실제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밝혔다.
백 교수는 "나 자신이 이미 1997년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란 글을 통해 '분단 이전 상태의 복원'이 아닌 남북 국가연합 구상을 밝힌 바 있고, 그에 앞서 '외세(주로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한민족이 1945년에 달성했을 법한 국민국가'에 초점을 맞추는 통일 구상을 비판했다는(1996년 <독일과 한반도 통일에 관한 하버마스의 견해>)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족주의적 통일이냐, 평화 공존이냐'는 자의적인 이분법을 설정해놓고, 그 이분법의 타파를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분단체제 담론이 '1민족 1국가를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 목표는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이자 분단 이전 상태의 복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학문적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두 학자는 촛불혁명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백 교수가 촛불혁명이야말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평가한 반면 최 교수는 별개 사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백 교수는 12일 강연에서 "시민참여형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행위는 남북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정권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쫓아냈다는 점이다. 이거야말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획기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최장집 교수는 <시사인> 5월 28일자 인터뷰(☞ 관련 기사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에서 촛불혁명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상관관계에 대해 "별개 사건으로 본다. 촛불집회는 박근혜정부가 만든 헌정 위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남북관계에 대한 어떤 요구를 담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 사건이 시기적으로 상당히 가까이 일어나다 보니 둘이 맞아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고 답했다.
또 최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한반도 2국가 체제가 이미 굳어진 현실"이며 "장기적으로도 유일한 대안"이고 "남과 북은 이미 별개 국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사인> 기자가 "한반도 2국가론은 헌법과 충돌한다"고 질문하자 최 교수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 영토조항은 4.27 정상회담 이후 실질적으로 헌법의 효력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남북한 협상을 공론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2국가 체제가 실질적으로 합의됐다. 북한이 독립적 체제를 계속 보유하도록 인정한다는 '실질적 개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그렇다면 헌법의 다른 통일 관련 조항들도 효력이 정지된 것으로 봐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즉 인터뷰에 나선 기자가 최 교수에게 그의 한반도 2국가론과 헌법 전문("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 헌법 4조("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그리고 헌법 66조 3항("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흡수통일도 북한의 적화통일도 불가능해졌다면서 앞으로 한반도는 2국가 체제를 통해 "남과 북이 각자 독립된 국가로 평화 공존을 제도화" 하고 "남북이 각자 갖고 있는 정치체제나 이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회와 경제의 교류와 통합이 상당히 진행"돼 "한두 세대 정도가 그런 경험을 쌓는다면, 그때는 남북관계를 또 어떻게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백 교수는 요즘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분단지향적 평화공존론' 또는 '양국체제론'은 기존 체제 유지의 논리이며 비핵화의 가능성도 봉쇄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즉 "분단체제 아래서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 이제는 분단을 잊어버리고 북한의 존재에 더는 신경 안 쓰면서 편안히 살아보자는 논리"이며 "당장에 비핵화를 실현할 방책도 없는 논의로, 그동안 전쟁 위협에 시달리고 분단체제 아래 신음해온 민중더러 또 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달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백 교수는 남북연합이야말로 비핵화를 비롯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동시에 진전시킬 수 있는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비핵화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군사적 보장 방안은 바로 미국의 우방인 한국이 참여하는 국가연합 형성이며, 또한 남북연합은 북한이 내심 두려워하는 '남한의 존재 자체가 주는 위협'을 관리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남북 국가연합은 교과서적으로는 통일에 미달하지만 한반도의 툭수한 역사적 맥락에서는 '1단계 통일'에 해당될 수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퇴임 후 이러한 평가를 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존 상태에서의 평화 공존이란 결국 남과 북 사회 내부의 빈부 격차, 성차별, 환경파괴, 인간성 붕괴 등 온갖 불의와 문제점을 온존시키자는 주장이라며 촛불혁명은 바로 이러한 '헬조선'의 존속과 확대를 거부한 혁명이며,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을 포함하는 한반도의 점진적‧단계적‧창의적 재통합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지난 12일 백낙청 교수의 한평아카데미 강연과 질의응답 전문.
최근 정세에 관한 몇 가지 가설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최근 정세에 관한 몇 가지 가설부터 말씀드리겠다. 첫째는 4.27 판문점 선언과 6.12 싱가포르 선언으로 한반도의 평화체제 건설은 거의 불가역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판단이다. 둘 중에서도 판문점 선언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내가 말하는 '한반도식 통일',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두 번째로 설혹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해도 이는 해당국 정상들의 결단에 의한 것이고, 시민 참여의 기여도는 크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내가 (한반도 평화체제의) '거의 불가역적인' 진행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시민참여형 통일 과정의 성과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세 번째로 평화체제로의 진행이 "통일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는 남북관계"의 성립 과정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의 성격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결과라고 본다.
시민참여형 통일의 1단계로서의 남북연합
이러한 가설 하에 본론으로 들어가서, 시민참여형 통일의 1단계로서의 남북연합에 대해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는 2010년 <'포용정책 2.0'을 향하여>라는 글에서 2000년 6.15 공동선언이 '포용정책 1.0'이라면 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포용정책 2.0'이 필요하며 그 요체는 '남북연합 건설과 시민참여형 통일'이라고 주장했다. 즉 "남북연합 건설을 향한 의식적 실천과 더불어 시민참여형 통일 과정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현재 우리의 당면 목표는 연합제 중에서도 '낮은 단계의 연합'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건설 과정은 2007년 10.4 선언으로 일단 시작됐고, 이후 10년의 중단과 역진을 거친 뒤 올해 대대적으로 재개되고 있다. 그 사이에 촛불혁명이라는 시민참여가 있었고 이것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개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남북연합 건설과 시민참여형 통일은 같은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은 남북연합 건설 이전에도, 그 과정에도, 그리고 그 이후 단계에도 해당된다. 즉 남북연합 건설 전반에 걸쳐 시민참여형으로 진행돼야 옳고, 또 한반도에서는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남북연합 건설은 그 중에 어느 한 대목에 해당되지만,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1단계 목표는 남북연합이다.
연방과 연합은 다르고, 각기 여러 종류와 수준이 있다.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은 모두 연방국가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스위스는 높은 단계의 연합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오히려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단일 헌법과 화폐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각 주가 굉장히 큰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대통령도 순번제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훨씬 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남북은 6.15 공동선언 제2항에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간다고 합의했다. 모호한 표현이지만 통일을 쌍방의 합의 아래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은 명시했다.
그렇다면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염두에 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무엇일까? 스위스식의 연방제일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회담에 직접 배석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왜 지금 연방제는 곤란하고 연합으로 가야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길게 했다.
연방은 아무리 느슨해도 하나의 중앙정부가 있고 그 밑에 주 정부 등 연방의 구성 요인이 존재한다. 연합은 각자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는 형태다. 사실 두 가지는 굉장히 다른 개념인데,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연방은 안 된다면서 연합제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바로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정일 위원장이 연방제를 꺼내든 것은, 해석하기에 달려있지만, 김일성 주석이 고려연방제를 주장했고,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감히 연방제가 아닌 연합제를 그대로 받기 곤란했기 때문에 낮은 단계라는 수식어를 달아서 실질적으로는 연합제 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한 것 아닌가 싶다.
또 모호한 표현이긴 한데 6.15에는 통일을 쌍방의 합의 아래 점진적‧단계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명시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연합제든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지만 일단 그런 단계를 거쳐서 다음 단계로 나간다는 점을 적시한 것이다.
우리의 당면목표는 연합제 중에서도 낮은 단계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연합도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수준이 상당히 낮은 단계여야 한다.
가령 유럽연합의 경우, 정확하게 어느 정도라고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아세안보다는 높은 수준의 연합이다.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유럽연합 국가 간에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북연합을 한다고 할 때 자유 왕래하고 화폐를 통일하는 수준의 연합이 가능할까? 언젠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목표로 움직이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연합제 중에서도 아주 낮은 단계의 연합을 1차 목표로 삼고 진행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사실 낮은 단계의 연합 건설 과정은 2007년 10.4 선언 이후로 이미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몇 달 못가서 중단됐고 이후 남북관계는 역진해서 남북 대결이 강화되고 관계가 단절됐다.
이것이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복원된 것인데, 상당히 대대적으로 복원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4 선언에서는 정상회담을 수시로 하자고 했지만 실제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 방문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또 그 때는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면 으레 남측 정상이 평양에 가서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남북 정상회담의 경우 첫 번째 회담을 판문점에서 했고, 두 번째 회담을 보면 이건 거의 국가연합이 돼 있는 상태에서 양쪽의 정상들이 필요하면 전화해서 "만납시다" 해서 만나는 수준까지 와 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지 모르겠지만 회담이 관례화가 되고 쌍방 군사 회담 등도 열리고 교류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대북제재 때문에 아주 활발하게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미 그 과정은 10.4 때에 비해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촛불혁명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민 참여다.
시민참여형 통일이라고 하면 일부 사람들은 남북교류에 민간이 얼마나 참여하느냐, 민간교류를 시민단체들이 얼마나 하느냐, 아니면 쌍방 회담할 때 민간인 대표가 끼어 있느냐 등등을 따지는데, 그게 아니라 시민 참여형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행위는 남북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정권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쫓아냈다는 점이다. 이거야말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시민 참여 이런 것은 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결국 당국이 결정하는 것이다, 촛불 혁명을 거기까지 갖다 붙이는 것은 견강부회다 등등의 의견이 있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시민 참여 없는 통일 운동이 성공한 사례가 있나? 그 결과는 어땠나?
시민 참여의 결여로 '불가역적' 평화 건설이 불가능했던 대표적 예는 7.4 남북 공동성명이었다. 남북에서 밀사들이 오가면서 주요 사항들을 결정했고 이를 나중에 발표했다.
물론 거기에도 간접적으로 시민 참여가 있긴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가 남북관계에 대한 획기적인 주장을 하면서 높은 득표율을 올렸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7.4 공동성명에 영향을 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시민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7.4 공동성명은 집권자가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었다.
10.4 선언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이유도 충분한 시민 참여가 없는 상황에서 정권 말기에 이른바 '대못질'을 하는 식으로 정상회담을 하고 선언을 하니까 그만큼 지속성이 약했다. 물론 그렇다고 10.4선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은 아니고, 그 때 그나마 그 정도로 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발전이 이뤄지고 있지만, 10.4 선언도 시민 참여의 부족으로 지속성이 떨어진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예멘이 1990년 처음으로 통일이 됐다. 이건 남과 북 양측의 정권끼리 담합해서 통일한 형식이었다. 대통령, 총리, 장관 등을 소위 '나눠먹기' 식으로 가져가면서 통일한 셈이다. 시민 참여는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3~4년 정도 지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자본주의 체제였던 북예멘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예멘에 비해 부강하고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북예멘은 이번에 선거를 하면 그 결과에 따라 권력이 나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에서 불리한 남예멘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남북 예멘 간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 군대를 진압하고 결국 북예멘에 의해 무력 통일됐다.
그래서 오늘날 예멘은, 꼭 통일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전 상태에 들어가) 현실적으로 보면 거의 국가 붕괴 상태에 처했다. 이게 시민 참여 없는 통일이 가져올 수 있는 후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예멘식 통일을 '3당 합당식 통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비해 독일 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시민 참여 등으로 훨씬 좋은 결과를 낳았으나 서독에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 미미했던 데 따르는 한계도 지적할 수 있다.
시민참여형 통일 운동이 동서독에서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통일이 됐다면 통일 후유증도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또 세계 역사에 모범을 보여줬을 것이다. 독일 통일은 또 하나의 강국이 나온 것이지, 새로운 모델 국가가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례를 봤을 때 시민 참여를 중요한 모델로 인식해야 한다. 시민 참여가 없으면 통일이 잘 되지도 않고, 되더라도 결과가 매우 나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연합 중에서도 낮은 단계의 국가 연합을 이야기했는데 연합은 연방과 달리 통일이 아니다. 두 국가가 그대로 있으면서 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연합은 연방과 달리 교과서상으로 통일에 미달하지만 한반도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는 1단계 통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김대중 대통령도 퇴임 이후에는 연합을 1단계 통일이라는 말을 썼다.
유럽연합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연합보다 훨씬 높은 단계이지만, 거기는 통일 문제에 대한 합의가 없다. 그에 비해 한반도는 원래 오랫동안 같은 민족으로, 같은 정치 체제를 가지고 살고 있다가 타의에 의해 분단됐다.
따라서 남북의 경우 당장 통일하자고 하면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결국 통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에 대해서는 폭넓은 국민적 합의가 있다. 남북 두 정권 모두 그를 전제로 그동안 남북 교섭을 진행해 왔고, 이번 판문점 선언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공식 제목이다. 통일에 관한 7.4 공동성명 이후 모든 합의를 재확인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에서는 국가연합만 달성해도 1단계 통일에 해당할 수 있다.
평화체제의 필수조건으로서의 남북연합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남북이 단절됐던 상황에서 남북연합을 이야기하면 우습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화도 못하고 있는데 무슨 남북연합이냐, 북한 비핵화나 하지 이런 반응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남북연합이 건설되지 않으면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동안 남북연합이 안 됐기 때문에 비핵화가 안 됐다고 하면 그 역시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금 비핵화가 되려면 남북연합 건설 작업도 필요하다.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남북연합은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한반도 비핵화가 평화체제 건설의 관건적 과제로 부각되어 있다. 북에 대한 체제 보장이 그 필수 요건임은 미국도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이론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은 반면 이에 대한 대가,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체제보장(CVIG)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거는 아무도 할 수 없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을 텐데, 그동안 인간의 역사를 보니까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불가역적인 체제 보장은 인간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이라기보다 '완전에 가까운' 보장을 달성하기 위한 온갖 방도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1차적인 보장 제공자는 물론 미국이다. 미국은 군사력, 국제 외교무대, 금융권에서의 완력에서 압도적이다. 실제로 그동안 가장 큰 대북 위협을 행사해 왔다. 그래서 미국이 일단 보장을 해줘야 하는데, 보장을 제공하고 평화협정 맺고 북한과 수교 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국가 정책을 바꾸면 그만이다.
리비아 모델이 비핵화를 미리 다 하고 보상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 있는 리비아 모델은 '리비아가 비핵화하더니 망하더라'는 것이고, 이게 김정은 위원장 머릿속에 있는 리비아모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리비아의 예로 볼 수 있듯이, 미국이 변심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변심해서 쳐들어가지는 않더라도 북한이 미국의 속국이 되지 않는 한 미국은 계속 북한의 인권 문제, 미국 투자자의 권익 등을 내세워서 대북 위협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일단 보장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추가 보장도 생각해봄 직하고, 특히 미국을 포함한 대북 경제관계 발전이 중요하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6월 러시아 방문 때 제의한 '다자평화안보협력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면 이 역시 보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군사적으로 가장 확고한 보장은 남북연합이다. 미국의 우방인 한국과, 그 때쯤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게 된 북한이 느슨하게라도 결합된 하나의 공동 운명체가 돼 있다면, 미국이 기분 나쁘다고 다시 (대북 체제 보장을) 철회하는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요인이 있는데, '남한의 존재 자체가 주는 위협'이다. 북측은 현재 이 이야기를 안 한다. 자존심 문제도 있고 미국과 관계를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북한이 가장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남한의 존재 자체가 주는 위협'이라고 봐야 한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도 경제교류나 이런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을 공동 관리하는 정치적인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간과한 채 '통일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평화 공존을(최장집, 경향신문 7월 6일 23면 '통일 가능성 제거한 뒤 남북 평화공존 논의를') 운운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물론 학자로서 거론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민족주의적 통일이냐, 평화 공존이냐'는 자의적인 이분법을 설정해놓고, 그 이분법의 타파를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분단체제 담론이 "1민족 1국가를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 목표는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이자 분단 이전 상태의 복원"이라고 말한다면 학문적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이미 1997년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란 글을 통해 '분단 이전 상태의 복원'이 아닌 남북 국가연합 구상을 밝힌 바 있고, 그에 앞서 "외세(주로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한민족이 1945년에 달성했을 법한 국민국가"에 초점을 맞추는 통일 구상을 비판했다는(1996년 <독일과 한반도 통일에 관한 하버마스의 견해>)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최장집 교수는 5월 28일 <시사인> 인터뷰(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에서 같은 의견을 개진했다.
(최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한반도 2국가 체제가 이미 굳어진 현실"이며 "장기적으로도 유일한 대안"이고 "남과 북은 이미 별개 국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사인> 기자가 "한반도 2국가론은 헌법과 충돌한다"고 질문하자 최 교수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 영토조항은 4.27 정상회담 이후 실질적으로 헌법의 효력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남북한 협상을 공론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2국가 체제가 실질적으로 합의됐다. 북한이 독립적 체제를 계속 보유하도록 인정한다는 '실질적 개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기자가 다음과 같은 추가 질문을 했어야 했다. 즉 한반도 2국가론과 헌법 전문("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 헌법 4조("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그리고 헌법 66조 3항("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어야 했다.
점진적‧단계적‧창의적 통일과정과 시민참여
내가 급격한 통일이 아니라 점진적 통일을 주장했을 때 점진적 통일은 속도만 느린 것뿐이지, 결국은 흡수통일 비슷한 통일로 가는 과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6.15 공동선언에 명시돼있는 단계적 통일이라는 것을 끌어내서 점진적‧단계적 통일이라는 말을 써왔는데, 오늘 여기에 '창의적'이라는 말을 하나 더 넣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남북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동원 전 장관이 과정으로서의 통일, 사실상의 통일을 강조하면서 평화 프로세스에는 통일지향적, 분단지향적 프로세스가 있는데 우리는 통일지향적인 프로세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는데, 어차피 분단지향적 프로세스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분단지향적 평화공존론', 또는 '양국체제론' 등의 주장이 있다. 즉 남북이 사이좋게 남남처럼 살자는 얘기인데, 이건 이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분단체제 기득권 수호라는 기능을 수행하기 십상이다. 분단 잊어버리고 북한 존재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것인데, 이는 비핵화만 하면 북한에 '밝은 장래'를 선사하겠다는 트럼프의 약속과도 부합한다.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당장에 비핵화를 실현할 방책도 없는 논의로 무책임한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본인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겠다고 하는데, 남에서 촛불 혁명이 있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고 남북연합 건설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 북에다가 잘 살게 해주겠다고 말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평화공존이라는 것도 사실 무책임의 논리다. 그동안 전쟁위협에 시달리고 분단체제 아래 신음해 온 민중더러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달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그런데 북의 기득권층도 겉으로는 통일지상주의와 연방제 등을 주장하지만 내심 국가연합에 미달하는 남북관계 개선을 선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게 가능하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비핵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국가연합에 미달하는 남북관계 개선에 멈춘다고 한다면 남북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 성차별, 환경파괴, 인간성 붕괴 등의 문제점이 얼마나 시정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평화공존이라는 것은 이런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고 기성 체제를 각자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것인데, 이는 분단 체제의 기득권 수호의 논리라고 본다.
최근 남북관계 발전과 북미 관계 전환의 물꼬를 튼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장래, 곧 '헬조선'의 존속과 확대를 거부한 혁명이며, '낮은 단계의 연합'을 포함하는 한반도의 점진적‧단계적‧창의적 재통합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혁명이다.
■ 질의 응답
Q. 2016년 초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시민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최순실 사태 때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결국 정권을 바꿨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나?
백낙청 :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선 박근혜 정부가 하도 어이없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둔감해진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남북관계가 잘 안 되면 우리 국민들은 일단 북을 나무란다. 우리 정부가 분명히 잘못했을 때도 북한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민들은 남북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1차적인 반응은 북한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런데 관계가 좋아지면 좀 더 객관적 판단을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국민 여론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여론이 금방 달라진다.
Q.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에 창의적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신 구체적인 이유를 듣고 싶다.
백낙청 : 앞으로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 시민들이 창의적인 방법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촛불 혁명에서 이야기했듯이 더 중요한 것은 정보화 사회의 동향을 정의롭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그런 사회로 끌고 가는 데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고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한국 시민은 2016~17년에 걸쳐 세계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시민 참여 행동을 보여줬다. 다만 당시 과정에서 남북관계 발전이나 평화체제 건설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촛불 혁명에 남북관계 발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억지라는 주장도 있지만, 촛불 혁명과 같은 큰 역사적 사건을 표피적으로 보면 안 된다.
2008년 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들은 미국산 소가 전부 광우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괴담에 속아서 국민들이 놀아났다고 주장했다. 광우병 문제를 표면에 내세우니까, 이것만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시위는 그게 아니었다.
당시 가장 먼저 거리로 나온 것이 여중생들이었는데, 이들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고 외쳤다. 그들이 당시 내놓은 구호는 지금의 '헬조선'과 마찬가지다. 이후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역시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들여오는 것과 관련해 검역 주권을 포기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민주주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도 나오게 됐다.
촛불 혁명도 마찬가지다. 당시 시위에서는 '박근혜 퇴진', '박근혜 구속', '이재용 구속' 등의 구호가 나왔지만, 단지 정권 퇴진만을 위한 시위는 아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더 정의롭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 힘을 받아서 당선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또 이렇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도 문 대통령 개인의 진정성만 믿고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수는 없다. 남한 사회가 이전과 달라졌고, 이에 따라 대통령이 마음대로 노선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Q. 지금은 포용정책 버전 2.0에서 더 나아갔다고 봐야 하나?
백낙청 : 포용정책 2.0을 언급한 것이 10년 정도 됐다. 이제 3.0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이야기도 있던데 포용정책 2.0, 3.0, 4.0 이렇게 나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포용정책은 원래 미국이 소련에 관여하겠다는 정책 속에 나오게 됐다. 우리처럼 통일 정책과는 관계가 없었다. 한반도에 포용정책이 적용됐을 때는 통일을 전제한, 즉 점진적‧단계적‧창의적인 통일 과정을 전제한 상호 관여 정책으로 나타났다.
포용정책 1.0의 정식 출시 시점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면 2.0 버전에서는 남북연합 건설하고 시민 참여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구상했다. 그런데 여기서 3.0이 또 나오면 이건 2.0이 실패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2.0으로 성공하고 앞으로는 포용정책이 아닌 남북연합 관리 방안이라든가 더 점진적이고 단계적이고 창의적인 통일에 대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Q. '이면헌법'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백낙청 : 70년 전 제헌의회 때 만들어진 우리 헌법은 상당히 민주적이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남북 대결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 때부터 우리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남북 대결 하에서는 민주주의를 제약해도 상관없다', 즉 심하게 말하면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식의 사고가 굳어졌다. 정식 헌법은 멀쩡한데 숨겨 놓은 예외 조항, 즉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를 제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숨겨진 조항이 있었다. 이를 이면헌법이라는 용어로 부른 것이다.
Q. 통일을 이루려면 몇 단계의 접근법이 필요할까? 1단계에서의 교류는 어느 정도의 범위로 진행돼야 하나? 유럽연합은 현재 몇 단계에 위치해 있나?
백낙청 : 6.15 공동선언의 묘미이자 지혜로운 것 중 하나는 1단계로 낮은 단계 연방제든 연합제든 하되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미리 정해두려 했다면 아마 남북 간 합의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이후에 무엇을 할지는 그 때 가서 시민들이 정하면 되지, 왜 정상들이 만나서 정하려고 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낮은 단계의 연합으로 시작했다고 가정하면 남북은 그 연합의 정도를 점차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남북 시민 참여의 수준도 점차 확대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북에 무슨 시민사회가 있느냐, 시민참여형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반론도 있다. 일단 북에 시민사회가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고 우선 우리나 잘하자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또 북한 민중들도 그들 나름으로 온갖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본다. 김정은 위원장도 그러한 인민 생활을 의식하고 비핵화 결단을 내렸을 것으로 본다.
이와 함께 북의 시민 참여가 현재 수준에서 멈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낮은 단계의 연합이라도 구성된다면 북에서 시민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달라질 것이다. 그 때는 또 다른 양상이 벌어질 것으로 본다. 1단계 이후 연합 또는 결합의 정도를 높여가면서 시민 참여도 확대돼야 한다.
유럽연합의 경우는 우리와 역사적 맥락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몇 단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성립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유럽은 현재는 물론이고 1단계 남북연합을 이뤘다고 하더라도 실현하기 힘든 수준의 여러 가지 연합 정책이 있다.
중국의 양안관계처럼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는, 통일 전 동서독처럼 자유 왕래만 해도 좋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는데 그건 맥락을 모르는 것이다. 남북 간 자유 왕래하면 북한 체제가 무너지기 쉽고, 남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북에서 대규모로 남으로 이주해 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을 보더라도 유럽연합과 남북연합의 단계는 같은 기준으로 보기 어렵다.
Q.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을 만들어가는 단계가 1단계라고 한다면, 이 단계가 완성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백낙청 : 선례가 없어서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단계적 통일을 한 예가 없다. 독일과 베트남 모두 한 번에 통일을 하는 식이었다. 한반도처럼 전쟁을 한 번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들이 만나서 통일을 할 것이긴 한데 빨리하지 말자, 천천히 하지만 통일은 한다는 식으로 단계적 합의를 하고 추진한 전례가 없다.
우선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해제돼야 할 것이다. 북미 화해와 종전선언 정도까지는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남북관계를 희망적으로 보는 것이, 지금 북한과 미국이 저렇게 삐걱거리는 동안에도 남북은 계속 같이 나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미국이 "북한이 우리말 안 듣는데 왜 남북이 함부로 먼저 나가는 것인가"라며 항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미국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문 대통령은 촛불 혁명 이후에 당선된 대통령이기 때문에 멈출 필요는 없다.
이렇게 남북이 계속 함께 나가다 보면 남북 간 왕래를 위한 여행 규정이 생길 것이고, 경제협력과 관련한 규정도 마련될 것이다. 그렇게 여러 분야에서 양측 간 교류가 누적되고 그와 관련된 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통일이 꽤 됐네", "이 정도면 우리 남북연합 됐다고 선포합시다"라고 합의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물론 남북 교류 및 협력 축적이 어느 정도 됐을 때 남북연합을 선포할 것인가에 대한 정무적 판단도 중요하다.
Q.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사례로 촛불 혁명을 말씀하셨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백낙청 : 그 때 시민들이 거의 반년에 걸쳐서 매주 광화문에 나갔는데, 연 인원 2400만 명이 나갔는데 이런 걸 다시 하기는 쉽지 않다. 또 그렇게 해서 되겠나. 박근혜 정부 같은 정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거지.
중요한 것은 그 때 생긴 시민 참여의 동력을 일상생활 속에서도 계속 살려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본다. 우선 대한항공과 아시나아항공의 경우, 촛불 혁명 이전이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 미투 운동이나 혜화역 시위 등도 촛불 혁명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번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촛불 혁명의 동력을 얼마나 이어가서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의 문제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우리 사회의 체질이 바뀐 것은 맞다. 그 바뀐 체질에 맞게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시민 활동 및 정치 참여를 하는 상황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보수의 패배라고 하는데, 이는 촛불 혁명의 시민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보수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이들을 혼내주기 위한 결과였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이 잘해서 선거를 싹쓸이한 것이 아니다. 우리 정당 체제가 제대로 돼 있으면 이번 선거처럼 민주당에 일방적으로 표를 몰아주지 않으면서도 선거로 특정 정당을 심판할 수 있었겠지만, 선거 제도 때문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 개헌을 비롯해 촛불 혁명의 에너지를 제도화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이 제도화에 성공하려면 개헌안이 입법부를 통과해야 하고, 이게 가능하려면 자유한국당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개헌의 경우 촛불 혁명이 요구하는 것에 맞춰 이상적 헌법을 만들자는 것은 현재로서는 가망이 없는 시나리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분적이라도 개헌을 추진해서 개헌의 동력을 이어나가되, 시민들의 개헌 발의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가령 '100만 명 이상이 개헌 발의를 하면 국회는 이를 반드시 심의해야 하고 그 심의 과정에서는 시민 숙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만 확보해 놓는 것이다.
Q. 시민참여의 원동력을 통일에 접목시키려면 민족적 동질성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민족적 동질성은 굉장히 낮아진 것 같은데, 통일의식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백낙청 : 민족적 동질성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서 정의하고 그걸 지표로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민족적 동질성을 너무 과도하게 중시하는 것도, 또 민족 동질성이 상실됐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실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남북 간 회담할 때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상당한 장점이다. 회담을 쉽게 하고 신뢰를 빨리 구축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 앞에 서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만약 저 자리에 통역이 있었다면 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잠시 넘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의식의 경우 질문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완전한 통일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면 우선 가능성도 없는 것을 물어보니까 한심하고,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고 세금이나 더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통일의식을 높이려면 통일의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옛날식의 되지도 않는 단일한 통일 국가를 만들자는 개념을 접어두고,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개념의 통일을 설명한 다음 이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할 것으로 본다.
Q. 북한 인권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백낙청 : 북한 인권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분단 체제에 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보통 남한 인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고, 남한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북한 인권과 관련한 발언을 자제하는 대신 남북 화해를 얘기하는데,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각기 다른 사회이자 체제지만, 하나의 분단 체제 속에 공동으로 엮여 있는 운명공동체다. 어느 한 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완전히 남의 나라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 체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북의 인권 문제의 일차적 책임은 물론 북의 정권에 있지만, 분단 체제에 관여하고 있는 모든 행위자들에게 조금씩 책임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남한 국민들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선출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나. 남북 관계가 협력에서 대결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런 측면에서 남한도 북한 인권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분단체제에서 중요한 플레이어인데,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고 제재한 것이 북한의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됐는지 의문이다. 북한 주민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Q.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되길 바라야 할까?
백낙청 : 트럼프는 역사가 한 번 써먹고 버리는 카드다. 우리가 바란다고 해서 트럼프가 재선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올해 중간선거 전까지 북한과 비핵화-평화체제 관련해서 회담을 상당부분 진행시키고 9월 유엔총회 때 종전선언하고 임기 말까지 북미 관계 진전시켜 놓으면 다음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이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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