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처절한 항쟁이 시작된 후 '민주주의'라는 말은 진보 진영의 일상적 용어가 되었고, 1987년 민주화의 상징인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된 이후 최근에는 내란 세력조차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써가며 역으로 진보 진영을 비판한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 세력이 주장하는 기본적 가치가 되었지만, 다양한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의미 또한 다양해졌다. 한때 진보 진영의 유력한 정치평론가가 정치인을 A, B, C 그룹으로 나누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인들도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A, B, C 그룹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A 그룹의 민주주의자에게 민주주의란 원리상 '국민주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누구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뜻으로 모든 국민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은 주권자라는 점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뜻을 모아 특정 집단이나 계층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살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어느 나라에서 소수만이 자유롭고, 대다수가 부자유 속에서 산다면 이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국가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강자의 횡포를 막고, 약자에게 힘을 보태거나, 강자와 약자라는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쟁을 완화하고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국가를 국민의 뜻에 따라 운영하려고 해도 사실 국민의 뜻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란 말은 개개의 국민을 포괄하는 단어일 뿐 국민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 개개인의 뜻은 서로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국민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논쟁하며 이른바 국민의 뜻을 만드는 협력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점 때문에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인에게는 아무리 참기 어려운 주장이라도 관용하고, 상대를 협력자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런 민주주의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의 지지 세력을 넘어서 국민 통합적 정치를 실현하려고 한다.
B 그룹의 민주주의자에게 민주주의란 절차상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원칙을 말한다. 따라서 어느 일개인이 일방적으로 국가 대사를 결정한다든지, 소수 집단이 국가 운영을 좌지우지하면 반-민주가 된다.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국가로서 다수결에 기초해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다수결에 따라 선출되며, 국가 운영의 토대가 되는 법률 역시 다수결에 따라 제정된다. 비단 정치 영역만이 아니다. 민간 영역에서도 각종 조직과 단체의 운영이 다수결에 따라 결정될 때 이를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민주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야 권력을 장악하고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정치인에게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은 이겨야 할 경쟁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정치인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까? 민주주의를 다수결 절차로 이해하는 정치인은 대개 자신을 지지한 다수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고, 이 다수의 이익만을 위한 정책을 편다. 그래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세력의 정권 연장까지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수가 실제로는 다수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을 보면 아무리 높아도 전체 유권자의 80%를 넘지 못한다. 따라서 당선자의 득표율이 투표율의 과반에 이른다 해도 전체 유권자 수를 기준으로 보면 지지자는 채 40%를 넘지 못한다. 그 결과 어느 대통령이든 지지자는 결코 다수가 아니며, 오히려 60%에 해당하는 다수는 지지자가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인이 자기 지지자만을 위한 정책을 편다면 다수의 국민은 금새 정권의 반대자로 돌변한다.
C 그룹의 민주주의자에게 민주주의란 역사적 경험상 '군부독재 세력의 반대말'일 뿐이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집권했던 군부독재 세력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짓밟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고, 학생운동권이 선두에 서서 처절한 항쟁을 이어갔다. 결국 군부독재는 종말을 고하고, 이들과 싸웠던 많은 민주 투사가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제도적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현실 정치 참여가 지속되면서 일각에서는 민주주의를 군부독재 세력의 반대말로만 이해하고, 이에 맞서 싸웠던 자신들을 민주주의와 동일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비록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지만, 이들의 의식과 문화는 민주적이지 않았다. 물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은 민주주의 원리를 배우고 깨우치며 민주주의 문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오히려 이들은 군부독재 세력과 맞서 싸우며 이들을 닮아가던 사람들이었다. 학생운동 시절 정치적 노선이 다르면 같은 운동권이라도 적으로 몰고, 비운동권은 프락치로 만들고, 지하화된 된 비선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자기들만이 진짜 민주 투사라는 순혈주의적 망상을 키워왔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정치인에게 민주주의란 참을 수 없는 주장도 관용하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협력하는 국민 통합적 이념이 아니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기껏해야 다수결이라는 정권 장악 절차일 뿐이며, 더구나 정권 장악의 목적은 자신들이 반민주 세력으로 낙인찍은 사람들을 척결하는 데 있다. 그래서 그럴까? 이들은 하나가 척결되면, 곧바로 새로운 척결 대상을 지목한다. 민주주의를 반독재로만 이해하기에 독재 세력 척결이 없다면 자신들의 존재 가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원칙으로만 이해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주권 원리가 파괴된다. 그 다수는 현실 상황에서 결코 다수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소수 역시 주권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주의를 반독재로 이해하고 이에 맞서 싸운 자신을 민주주의와 동일시 하는 사람은 사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동등한 주권자라는 점을 부인이라도 하듯 자기들만이 진짜 민주 투사라는 자기 우상화에 빠져 국민 통합적 정치에 반대하고,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은 도외시한 채 오직 반민주 척결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진보 진영을 자임하는 정치 세력 내부의 분란 때문에 민주주의를 원하는 국민의 우려가 크다. 지금은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참뜻을 되새겨볼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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