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캐나다 토론토로 이사한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목사이자 신학자였고, 딸은 미술학교를 나와 파리에서 1년간 보석세공을 배웠다. 귀국해서는 자기이름을 건 보석가게까지 차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예술가 팔자다. 그런데 이 사람, 훗날 전 세계 난민들에게 "마마 낸시"라 불리며 자기 집을 30년 넘게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통째로 내어준 인물이 된다. 반지 만들던 손으로 서류를 만들고, 목걸이 팔던 자리에 난민 통역을 앉힌 셈이다. 아 사람의 이름은 낸시 믹 포콕(Nancy Meek Pocock, 1910-1998)이다.
보석보다 사람을 세공하다
1942년 낸시는 잭 포콕과 결혼했다. 남편은 곧 영국군을 따라 유럽전선에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귀국했는데, 그 직후 딸이 태어났다. 이 무렵부터 낸시는 평화운동에 발을 들였고, 1950년 부부가 함께 퀘이커교도가 됐다. 퀘이커라는 종교자체가 원래 전쟁반대와 사회적 약자 돌봄을 신앙의 실천으로 삼는 쪽이라, 낸시에게는 종교가 곧 생활방식이 됐다.
베트남전쟁 때 미국은 종교적 사유가 아니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이유로 징집을 거부한 미국청년들은 캐나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포콕 부부의 집은 이런 미국 탈영병, 징집기피자들이 캐나다에 도착해 가장 먼저 두드리는 문이 됐다. 베트남 난민들도 이 집을 거쳐 갔다. 낸시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한테 큰 집이 있는데, 왜 안 나눠야 하지?" 논리가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반박이 안 된다.
1962년부터 1973년까지는 캐나다 퀘이커 봉사위원회가 운영하는 그라인드스톤 섬 평화센터에서 비폭력 훈련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핵무기 반대운동, 여성평화운동 등 여러 단체의 창립 멤버로도 이름을 올렸으니, 이 시기 캐나다 평화운동 명단에는 거의 빠짐없이 낸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남편을 잃고, 활동은 더 커지다
1975년 남편 잭이 베트남전쟁 종전을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보통은 여기서 활동이 줄어드는 게 인지상정인데, 낸시는 정반대로 갔다. 이후 베트남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전쟁이 한창 이던 시기에도 갔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의료원이 있고, 1978년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받았다.
1983년에는 교회연합 난민위원회 일로 미국 댈러스를 방문했다가,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이 "캐나다는 너무 추워서 안 된다"는 이유로 미국 당국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낸시는 이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토론토로 돌아와 위원회를 꾸리고 중앙아메리카 난민들을 직접 데려오기 시작했다. 집을 구해주고, 노동허가를 받아주고,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영어까지 가르쳤다. 그 시절 그녀의 집에서는 늘 라틴아메리카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나를 범죄자라 부른다면, 나는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
캐나다 정부가 미등록 난민을 도운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을 때, 낸시는 이렇게 응수했다. "어느 나라든 나를 범죄자라 부른다면, 나는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법과 양심의 명령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따를지, 이보다 명료한 답이 있을까 싶다.
이후 토론토 난민문제협의회 간사를 맡아 이란, 캄보디아, 스리랑카, 자이르 등 각지 난민들을 계속 도왔다. 딸의 추산으로는 평생 모금한 난민지원금이 2백만 달러가 넘는다. 말년에는 고문피해자를 위한 미술치료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여든여섯 살에 "은퇴? 내가 왜?"라고 잘라 말한 뒤, 실제로 은퇴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응급실 침상에서 이란 난민을 위한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다. 1987년 캐나다 유엔협회로부터 피어슨 평화훈장을, 1992년에는 온타리오 훈장을 받았다.
한국이 곱씹어볼 대목
낸시 포콕의 삶에서 눈에 띄는 건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다. 국가가 "안 된다"고 할 때마다, 그녀는 개인의 집과 지갑을 열어 그 빈틈을 메웠다. 정부정책이 난민을 밀어낼 때 한 시민이 문을 열어준 것이다.
한국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2018년 제주 예멘난민 논쟁당시 한국사회가 보인 반응, 이주노동자와 미등록 체류자를 향한 정책적 냉대는 낸시가 맞섰던 1980년대 캐나다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면, "국가가 나를 범죄자라 부른다면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겠다"는 낸시의 말은 결코 낡은 수사가 아니다. 당시 계엄군 앞을 막아선 시민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과 실무자들이 바로 이 원칙을 실천한 셈이다.
낸시는 정치인도 아니었고 대단한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저 "큰 집이 있으니 나눠 쓰자"는 상식을 반세기 동안 흔들림 없이 실천했을 뿐이다. 거창한 구호보다 이런 꾸준한 실천이 결국 역사에 남는다는 사실을, 낸시 포콕의 삶이 다시 한 번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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