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히프치히역 승강장에서의 환승 대기 시간은 15분이었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열차는 IC2447 열차로 2층 열차이다. 독일의 열차는 고속열차 ICE(Intercity-Express)와 도시 간 특급열차 IC(Intercity) 및 국제열차 EC(Eurocity), 지역 간 특급열차 RE(Regional-Express)와 보통 열차 RB(Regionalbahn), 광역전철 S-Bahn (Stadtschnellbahn)이 총연장 4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독일 철도망을 꼼꼼히 이어주고 있다. IC열차와 RE열차는 대부분 2층 열차로 승객 수용 능력이 뛰어나 이용자들의 편의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동안 최대 과제였던 코레일(KORAIL)과 SR의 통합을 앞둔 현재, 한국철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부족이다. 특히 서울–부산 간 경부선은 예매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이용자들이 좌석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류 열풍으로 외국인 방문객들의 철도 이용률도 해마다 늘고 있는 상황에서 열차 좌석 부족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철도 공급을 늘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열차 운행 편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로는 시간당 수용할 수 있는 열차 편수가 있다. 지금 경부선은 선로 용량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에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선로를 건설하지 않는 한 한계가 분명하다.
두 번째는 한 번 운행될 때 이용할 수 있는 객차를 최대한 늘리는 방법이다. KTX나 ITX 같은 경우에는 중련이라고 부르는, 두 편성을 이어 붙여 열차를 길게 조성하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이용자가 몰리는 시간대에는 중련 편성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충분한 차량 여유분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단위 객차당 수용 인원을 늘리는 방법인데, 이게 바로 2층 열차다. 철도 선진국으로 불리는 많은 나라들에서 2층 열차가 주력 객차로 활용된다. 한국에서도 10여 년 전 2층 열차가 추진된 적이 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단됐다. 부족한 수요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한국 철도 차량의 다변화와 철도 차량 제작 산업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2층 열차 도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드레스덴행 열차가 도착하는 라히프찌히역 승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하자 승객들이 출입문으로 몰렸다. 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지만 2층 열차는 넉넉하게 여행자를 받아들였다. 객차를 돌아봤지만, 어디에도 서서 가는 사람은 없었다.
드레스덴역에 도착하자마자 시내 교통 1일권을 끊고 트램을 탔다. 토요일만 개장한다는 드레스덴 중앙역 서쪽의 철도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박물관은 철도 차량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 철도 기지들이 흔히 그렇듯, 시내에 있어도 그 주변은 도시 공간과 단절되어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기분이 이상했다.
철도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밤이라면 절대 다니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고 일주일 중 딱 하루만 개장한다고 하는 곳에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겨우 길을 찾아 검문소같이 생긴 문 닫힌 매표소를 지나 박물관 부지로 들어갔다. 역시 인기척은 없었다. 외계인의 침공을 받아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구글 앱을 열어 장소 정보를 보니 개장했다고 나왔는데 사방이 조용했다. 용기를 내어 차량 유치 공간으로 보이는 큰 건물 앞에 다가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안을 보니 증기기관차들이 보였다. 고요함 속에 박물관 전시용 차량이 서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좀비가 나타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건물을 돌아서니 독일어로 철도박물관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었고, 한쪽 끝에는 한국에서는 전차대라 부르는 기관차 진행 방향을 바꾸는 턴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 서서 지나가는 열차들을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박물관 야간 개장 특별 행사를 알리는 빛바랜 전단이 붙은 게시판을 지나 트램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1944년 3월 2일과 4월 17일, 미육군항공대의 폭격 목표는 드레스덴 중앙역과 역 북서쪽의 주차장 그리고 지금은 문을 닫은 박물관이 있는 차량기지였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드레스덴 시내는 이미 폐허가 됐기에 선로로 이어진 목표물을 찾기 쉬웠을 것이다.
철도는 등장 이후 중요한 전쟁 기계가 됐다. 전쟁 수행의 필수 요소인 보급을 철도만큼 대량으로 보장하는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군인과 기갑차량, 탄약과 식량을 나르는 덕분에 전쟁은 이어지고 이어졌다. 먼저 보낸 열차로 충원된 물량이 사라지면 작전참모는 다음 열차를 준비했다. 병사들은 탄약 200상자, 통조림 100상자, 탱크 30대 같은 보급 장교의 소모품 체크리스트의 한 항목을 차지했다.
드레스덴 하늘은 제트여객기 한 대가 만든 비행운을 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파랬다. 투명한 파란 벽 너머에 검은 우주가 존재하고 그 공간을 달리는 태양계에서 지구는 작은 공처럼 보인다. 더 확대해 은하계를 펼치면 태양계는 은하계 속 작은 행성계에 불과하고 지구는 먼지처럼 미세한 존재이다. 하물며 인간이 사는 시간은 고작 얼마인가? 서로 증오하고 살육을 일삼기에는 너무 무심한 시간이 아닌가.
트램을 타고 가다가 배꼽시계가 울려 어딘지도 모르는 정거장에 내려 식당을 찾았다. 식당 한 곳에서는 술만 되고 식사는 안 된다고 해서 나왔다. 다른 한 곳에서는 자리 잡고 메뉴판까지 열었지만 왠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사과를 하고 나왔다. 거리를 걸으며 식당 간판을 찾다가 독일식 돈가스인 슈니첼과 감자튀김에 생맥주까지 포함된 게 13.5유로라고 사진까지 곁들인 입간판을 세워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손님이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 두 분이 일하고 계셨다. 빈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시키고 식당을 둘러봤다. 식당 한편에 출판 시기가 다른 두꺼운 시베리아 횡단 열차 사진집이 몇 권 놓여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진 9288킬로미터의 세계에서 제일 긴 철도 노선 풍경이 4계절을 배경 삼아 담겨 있었다.
11년 전 횡단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완주하고 페테르부르크까지 갔던 추억이 떠올랐다. 맞다. 식당 이름이 페테르부르크였고 이 식당은 러시아 식당이었다. 나치 치하의 드레스덴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고 이후 냉전기 사회주의 진영인 동독에 속했다. 소련과 동독은 동맹관계로 많은 사람이 왕래했으며 그런 연유로 드레스덴에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배를 채운 뒤 계산하고 식당을 나서며 "스파시바"라고 러시아말로 인사했더니 할머니가 씩 웃었다. 다시 트램을 타고 달리다가 드레스덴 군사역사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드레스덴 슈타우펜베르크알리 즈바이(Dresden Stauffenbergallee 2) 정류장에 내렸다. 구글 앱이 인도하는 대로 걷다가 공원을 만났다. 나무에 둘러싸인 공원 중앙에 동상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2차대전 당시 소련군 병사의 모습이었다.
놀란 것은 동상 주변에는 온갖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줄지어 참배하던 광경이다. '2026년 독일에서 소련군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다니….' 마음속으로 놀라다가 한 번 더 놀랐다. 맙소사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날은 5월 9일, 2차대전 승전 기념일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만 치르지 않았다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비롯해 러시아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성대한 전승절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모스크바로 진격한 나폴레옹을 물리친 제1차 조국 수호 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킨 제2차 조국 수호 전쟁 승전일은 러시아 최대의 군사적 명절이다. 승전 기념일을 맞아 드레스덴의 러시아인들과 시민들이 공원을 찾은 것이다.
추모단 위의 병사는 소련군을 상징하는 돌격 소총인 페페샤(PPSH-41) 기관단총을 목에 건 채 왼손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비에트연방공화국 기를 오른손에는 막 투척하기 직전의 수류탄을 들고 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와 싸우다 희생된 소비에트 병사들을 추모하는 동상 아래에서 사람들은 묵념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같은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오직 드레스덴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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