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까지 나선 현장체험학습 논란 직후, 학부모의 민원이 문제라는 교사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때론 기가 막히고, 과도한 간섭으로 느껴질 민원 실태를 볼 때, 분명 교사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에 무겁고 답답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교육부는 '현장체험학습을 위한 교육공동체 간담회'를 열었다.
한국교총에서 참여한 28년 차 교사, 현장체험학습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고 자부한 그의 말은 이랬다.
"학교는 추억을 쌓는 공간 아니다. 학교는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성공적인 배움이 추억이 되는 곳이 학교다."
"현장체험학습은 법적 의무가 아니다. … 갈지 말지는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있어선 안 된다.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여기에 덧붙여 어떤 초등교사 단체의 대표도 이렇게 말했다.
"현장체험학습 필수 아니다. (그럼에도 교사가) 가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책임)면책권 있어도 민원 사라지지 않으면 현장체험학습 안 간다."
불편한 면도 있지만, 곱씹어 볼 말이다. 불가항력으로 발생하는 안전사고와 독박 책임, 반복되는 과도한 민원과 법적 보호의 부재 속에서 교사들이 느껴왔을 두려움과 피로는 누구라도 그럴만하다. 오히려 학생을 위해 헌신했던 교사일수록 더 깊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토록 열심히 했건만 정작 책임 추궁 앞에 혼자 남았을 때, 교육은 멈춘다. 이건 교육공무직도 곁에서 겪는 문제다. 교육공무직도 현장체험학습의 부담을 알고, 거부 의견도 적지 않다. 게다가 교육부의 교육공동체 간담회에선 ‘유령 취급’, 의자 하나 내주지 않는 배제된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다.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현장체험학습 안 가면 될 문제가 아님을 누구나 알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묻고 새롭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책임이 큰 교육 당국은 물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는 교육기관인가? 여기서 우리는 엇갈린다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하지만 여기서부터 엇갈림은 시작된다. 교사가 말하는 교육과 사회 일반이 생각하는 교육은 다르다. 교사가 말하는 교육은 대체로 국가교육과정 교수학습 중심의 행정적․법적 개념에 가깝다. 그러니 현장체험학습은 학교의 의무가 아니고 필수도 아니며, 당연히 "가 주는 것"이 된다. 그렇게 교사의 전문성과 일반의 상식은 다르다.
반면 최근에 만난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교육이 아닌가요?" 교사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너무나 전문적이고 법적인 교사들에게 돌봄은 교육이 아니고, 학교가 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교육이 아닌 일까지 자꾸 학교에 짐을 지운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들에게 지금의 학교는 교육에 집중할 수 없는 학교인 것이고, "교육이 가능한 학교"가 교사의 투쟁 슬로건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엇갈린다. 학교는 ‘배움’만 세우면 되는 공간일까? 5월 18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2025년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를 집에서 엄마가 돌봐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34.12%로 ‘동의한다’는 응답(33.83%)을 기어이 넘어섰다. 이는 2007년 첫 조사 결과를 뒤집은 변화다. 초저출생 시대, 우리 사회의 고민에 과연 학교를 빼고 답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필요한 학교는 정말 교육과정 수업만으로 충분할까?
오늘의 아이들은 과거와 전혀 다른 사회를 살아간다.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관계는 더 멀어졌으며, 공동체 경험은 더 희미해졌다. 맞벌이와 돌봄 공백, 고립과 우울, 초연결 디지털 환경에서 느끼는 역설적 단절까지, 아이들의 삶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복합적인 문제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학교도 복잡해졌다. 학교는 이미 지식 전달, 교수학습 기관을 넘어섰다. 문제는 이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이지, 부정할 문제가 아니다.
배움에 성장을 더하는 학교
학교는 아이들의 사회다. 배움만 세울 수 없다. 성장이 바탕이 돼야 배움도 비로소 일어난다. 학교에서 밥을 먹고, 돌봄을 받고, 관계를 배우고, 고민을 해결하고, 공동체를 경험한다. 물론 현장체험학습의 목적은 교육을 향해야 한다. 즐거움 자체만 목적일 순 없다. 그러나 배움과 성장, 성과와 추억을 무심코 분리하여 갈라놓는 순간, 우리는 교육의 중요한 본질 하나를 놓칠 수 있다. 좋은 교육은 성공을 위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수업만이 아니라 돌봄, 관계, 건강, 경험, 감정, 협력, 실패와 회복 같은 삶의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포함된다.
아이들은 훗날 교과서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함께 웃던 경험, 친구와 협력했던 순간, 낯선 세상을 실제로 만났던 감각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런 성숙의 경험들이 결국 다시 배움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학교가 아이들의 삶과 멀어질수록, 교육은 점점 더 입시 기술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교사도 학교의 학원화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이라 부르며 헌신을 압박하는 감성적 구호도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금 촉구해야 할 것은 학교 역할의 변화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제도와 비전으로 뒷받침하는 일이다.
5월 20일 전국교육공무직본부가 발표한 ‘교육감 후보 정책 분석’에서 많은 후보들이 교육복지 체계 구축과 교육공무직 법제화 필요성에 동의한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학교는 교무행정 지원에 더해 급식·돌봄·안전·상담·특수교육·방과후 활동까지 수행하는 복합적 교육복지 공간으로 변모해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과거의 학교 시스템과 인력구조 위에서 해내라고 한다. 학교엔 경쟁과 땜질만 있고 협력과 비전이 안 보인다. 그 결과가 교사의 아우성이고, 교육공무직의 소외이며, 협력보다 갈등이 커진 학교다. 교사는 교사대로 과잉 책임 속에 무너지고, 교육공무직은 무시와 소외, 불안정한 처우 속에서 주변으로 밀려난다. 학부모는 불청객이고 아이들은 공동체가 아닌 스마트폰 개인의 세계로 숨어든다.
문제는 교육복지, "교육의 공적 목적을 위한 공적 지원체계"
"교육의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두에게 제공되는 공적 지원체계", 즉 교육복지에 대한 총체적 재확립이 필요하다. 교육복지는 교사의 교육과정을 대체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안정적인 돌봄과 행정 지원이 있어야 교사는 수업에 집중할 수 있고, 안전한 급식이 지속돼야 학교는 건강하게 운영된다. 상담과 특수교육, 다양한 체험과 방과 후 활동 역시 교사의 부담을 늘리는 부가물이 아니라, 오늘의 학교가 아이들의 성장을 지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적 지원체계다.
개인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교육의 공적 목적, 공동체의 성숙을 이끌어야 한다. 독일의 <마그데부르크 선언>이 '민주주의를 배운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것'을 핵심 원리로 하듯, 우리 학생들이 공동체를 배운다는 것 또한 공동체를 살아가는 생활이 돼야 한다. 지금 우리 학생은 학교에서 공동체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까? 현장체험학습을 두고 부딪히는 항변과 불편감 사이에서, '누가 누가 이기나'의 승부가 끝나면 해법이 나오는 것일까? 정부는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 된단 말인가.
최근 정부가 국가교육위원회를 통해 31년 만에 포스트 5.31교육개혁(안)을 검토 중이라 한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학교가 왜 이렇게 많은 일을 떠맡아야 하는가"를 넘어, "달라진 학교의 역할을 우리는 어떤 철학과 제도로 책임질 것인가"를 정부부터 자문해야 한다. 전국교육공무직본부가 말하는 ‘교육 그 이상의 학교’란 학교가 모든 문제를 떠안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단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할들을 가정이나 개인의 책임에만 의존할 수 없는 시대, 국가가 확장된 공적 시스템으로 책임지자는 이야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대와 협력의 목소리다. 학교의 역할 변화에 맞는 국가 책임과 총체적 시스템 개편을 함께 요구해야 한다.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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