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4권을 받아 들었다. 2권 표지에 쓰인 소제목이 눈을 찔렀다. "인권의 최후 보루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다." 법원 편이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두 이름을 떠올렸다. 양승태(1948~)와 조희대(1957~). 한 사람은 판결을 권력과 거래했고, 다른 한 사람은 선거에 개입했다. 시대는 달랐지만 사법부를 짓밟은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유신 시절의 배석 판사, 그리고 제왕적 대법원장
양승태는 194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0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5년 11월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한 그의 첫 직장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배치된 곳은 서울형사지법이었다. 그 법정에서 그가 한 일이 문제다.
1976년, 재일한국인 모국유학생 간첩조작사건들이 줄줄이 그의 배석 앞을 지나갔다. 백옥광에게 사형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징역 5년에서 10년을 선고한 재판에 그는 배석판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사건들은 훗날 모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같은 기간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12건을 처리했다. 술에 취해 "박 대통령이 군인을 얼마나 했겠느냐"고 혼잣말을 한 노동자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재판도 그 12건 가운데 하나였다. 유신이라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판사들이 법관 양심보다 권력의 눈치를 먼저 살폈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이 간첩 사건들의 수사 책임자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1939~)이었다. 경남고 8년 선배와 후배가 1970년대 중반 간첩조작사건에서 손발을 맞춘 것이다. 40여 년 뒤 그들은 각각 '왕실장'과 '제왕적 대법원장'으로 다시 만나 재판거래의 파트너가 됐다. 한국 엘리트 법조권력의 세계는 참으로 좁고, 또 오래간다.
이후 양승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법원행정처에서 국가 소송을 총괄하는 송무국장, 부산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파산부 수석부장판사, 부산지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특허법원장, 대법관을 거쳐 2011년 9월 제15대 대법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한국 헌정사의 가장 추한 사법스캔들 하나를 만들어냈다.
재판을 팔다, 상고법원이라는 욕망
양승태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은 상고법원 설립이었다. 대법원 업무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상고법원이 생기면 대법원장의 권한과 영향력이 더욱 커진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양승태 사법부는 박근혜(1952~)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했다. 재판결과를 정권 입맛에 맞게 조율해주는 대신 상고법원 설립에 협조를 받겠다는 구상이었다.
거래대상에 오른 재판들이 섬뜩하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판결, 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소송. 수십만 명의 삶이 달린 재판들이 상고법원이라는 조직 이기심의 흥정재료가 됐다. 법원행정처 하드디스크에서 발견된 8천여 건의 문건에는 "과감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의 기대효과로 보수세력과 여론을 확실한 우군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재판은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내부고발에 나서거나 비판적인 판사들은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돼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판사들의 연구모임을 사찰하고, 헌법재판소 내부정보를 빼돌렸다. 법원이 법원을 해체한 것이다.
세계사 속 양승태의 동류들
영국에서 이 사태를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인물들이 떠오른다. 소련의 바실리 울리흐(Vasily Ulrikh, 1889~1951)가 있다. 스탈린(1878~1953) 치하 군사재판부 의장으로서 대숙청 재판(1936~1938년)을 직접 주재하며 수만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절차는 있었다. 변호인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크렘린에서 정해져 있었다. 판사는 그 결론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자였다.
나치 독일의 인민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는 더 노골적이었다. 히틀러 암살음모 가담자들을 재판하면서 피고인에게 고함을 지르고 모욕을 주었다. 재판이 아니라 처형을 위한 공연이었다. 그는 1945년 2월 연합군 공습 중 법정에서 사망했다. 법정을 무대로 삼은 자가 법정에서 최후를 맞았다.
양승태는 이들보다 세련됐다. 총도, 고함도 없었다. 문건과 보고서와 전화 한 통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사법부의 독립을 권력의 도구로 녹여버린 것이다.
조희대, 더 노골적인 두 번째 배신
2026년의 한국에는 두 번째 사법부 배신이 진행 중이다. 조희대(1957~)는 2023년 제17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25년, 이재명(1964~) 당시 야당 대선후보에 대한 선거법재판에서 파기환송심을 강행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사법부가 선거구도에 적극 개입한 것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것을 "경악스러운 일"이라고 기록한다.
양승태가 은밀하게 재판을 거래했다면, 조희대는 보다 노골적으로 선거에 뛰어들었다. 양승태가 상고법원이라는 조직 이기심을 위해 재판을 팔았다면, 조희대는 특정 정치세력을 위해 사법부를 동원했다. 형식은 달랐지만 핵심은 같다. 사법부가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조항을 스스로 짓밟은 것이다. 더구나 조희대 사법부는 윤석열(1960~)의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에도 내란세력을 적극 비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찰출신 사법 엘리트들의 카르텔이 법원과 검찰을 가로질러 공고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 법원의 모토는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이다. 사법부의 독립이란 권력자가 원하는 판결을 거부하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영국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 수장이 재판을 흥정 카드로 쓰거나 선거에 뛰어드는 일은 없다.
양승태는 2026년 1월 30일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47개 혐의 가운데 2개만 유죄로 인정됐다. 상고를 예고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45개 혐의에 무죄가 선고된 것을 보며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몰랐다"는 재판부의 반복된 판단은, 대법원장의 지시로 이루어진 수천 건의 문건을 눈앞에 두고도 책임자를 면죄하는 기이한 법리였다.
조희대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나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미 그 이름을 기록했다. 살아있는 인물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지닌 힘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양승태는 현실법정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더 오래 열려 있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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