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만에 되찾은 '노동절'에 생각하는 노동

[복지국가SOCIETY] 노동의 주체성 회복해야

인공지능(AI)과 피지컬 AI가 노동 현장을 전방위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과거의 기계화가 육체노동의 보조에 그쳤다면, 이제는 판단과 실행을 동시에 수행하는 지능형 로봇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설 자리에 대한 현실적 위협을 실감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어느 시대든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형성하는 본질적 생명활동으로 봤다.

노동, 인간 소외를 넘어선 자아실현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이 노동을 통해 외부의 사물에 투영되고 만들어진 결과물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물을 가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동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확인한다.

피지컬 AI가 정교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와 성취감, 그리고 동료와의 유대감은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인간일지라도 자신의 손길로 사물을 변화시키는 노예가 그와 같은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주인보다 더 독립적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고 통찰한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더 자명해 진다.

피지컬 AI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신체 노동이 가진 '현장성'과 '유연성'을 재조명하게 한다. 인간의 본질을 '노동하는 존재'로 본 칼 마르크스의 포괄적 관점에 비해 한나 아렌트는<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구분하며 인간의 활동적 삶을 분석했다. 기계가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작업'할 때, 인간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행위'한다. 또한 노동은 단순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인간의 의지 표명이라고 봤다.

기술 낙관론과 비관론 사이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노동의 주체성' 회복이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상품화된 노동으로 인해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비판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근로'라는 이름은 노동을 오직 화폐 가치로만 치환하며, 생산물과 노동으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국가적으로 강화해준 증거일 것이다. AI 시대의 소외는 '데이터 제공자'로만 전락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을 지배하는 주체로서, AI를 노동의 대체재가 아닌 노동의 가치를 확장하는 도구로 길들일 수 있는 우월한 지위를 잃으면 안 된다.

연대와 투쟁으로 지켜온 노동절의 정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문구가 오늘날에도 모든 노동자에게 유효할 수 있기를 바란다. 1886년 시카고의 8시간 노동제를 위한 투쟁에서 시작된 노동절의 역사는, 노동이 자본의 부속품이 아님을 증명해 온 역사다. 디지털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의해 파편화가 심화된 현대의 노동자들에게 이런 태도는 더 필요하다. 서로의 노동이 가진 가치를 인정하고 함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연대의 정신으로 노동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급변하는 노동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동시에 노동의 의미를 재정의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노동은 '고역'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AI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의 감수성, 도덕적 판단,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은 노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입된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이나 기술 그 자체가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노동이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AI가 지배하는 사회의 복잡한 알고리즘과 자동화 공정 이면에도 결국 그것을 설계하고 유지하며 운영하는 노동자의 숨은 노고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를 폄하 하는 것은 사회적 부의 원천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회복한 노동절의 이름 아래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세상의 모든 부와 문명이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손끝에서 시작됐다는 준엄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의 진보 앞에서도 당당히 "나는 노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절(May Day), 승리의 이름을 되찾으며

노동절(May Day),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데 63년이 걸렸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는 '노동'을 불온하거나 투쟁적인 단어로 낙인찍고 '근로'라는 순응적 표현을 강요했다. 이러한 언어적 왜곡은 노동자를 생산현장에서 경영의 주체가 아닌 종속적 객체로 전락시켰다. 또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여 노동자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강조했듯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활동이며, 그 형태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은 사회적 가치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제 '노동'이라는 이름을 회복함으로써, 노동자가 단순히 임금을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사회의 부를 창출하고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에 덧씌워진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온전히 걷어낼 때 비로소 노동의 존엄성도 바로 설 수 있다.

끝으로 노동의 존엄성을 실질화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제안한다. 첫째,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실질적 자동화를 위해 '세이프티 스탑(Safety Stop)' 의무화다. 이는 물리적 자동 차단(Safety-Kill Switch) 의무화를 통해 정부 지원을 받은 AI안전 시스템이 위험(추락 징후, 가스 누출, 협착 위험 등)을 감지 하는 순간, 관리자의 승인과정 없이 해당 공정의 전력이 물리적으로 자동 차단되게 해 작업이 중단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일정한 산업현장에 도입돼 있지만, 여전히 관리자의 주관적 판단을 거치기 때문에 효과 면에서 완전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물리적 시스템이 관리자의 판단 과정 없이 기계적으로 임계점에 도달할 때 사고 방지를 위해 킬스위치가 자동 작동하게 하면, 안전 확보와 책임 소재에 대한 관계자의 부담도 덜 수 있다.

둘째, 법률에 기반하지 않은 포괄임금제의 재검토다. 본래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업종을 위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계산의 특례' 조항(제58조)의 취지를 판례로 구체화한 예외적 제도다. 그러나 2024년 실태조사 결과 노동자의 44%가 포괄임금제를 적용받을 만큼 오남용이 심각하다. 대법원(2008다6052)은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한 경우 포괄임금제 적용을 엄격히 제한하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일반 사무직 등에도 무분별하게 적용되고 있다.

간주·재량근로제 도입 등 유연해진 근로 환경을 고려하더라도 근로기준법의 핵심은 실질 근로에 대한 정당한 보상에 있다. 법적 예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포괄임금제는 근로기준법의 입법 취지를 왜곡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1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2026 세계노동절대회.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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