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경계를 경계하며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전공(專攻), 소위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는 일은 오늘날 학문과 공론장에서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통찰은 흔히 경계의 바깥에서, 혹은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하곤 한다. 최근 정치 평론장에서 유시민 작가의 언급으로 유명해진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극한 상황에서도 왕성한 식욕을 보인다는 특정인을 떠올리게 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우연이다.—가 좋은 사례다. 드 발은 본래 동물행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영장류학자였지만, 침팬지 집단 내부의 지배, 연합, 화해, 감정의 작동 방식을 면밀히 관찰해 인간 정치와 권력의 심리학을 성찰하게 하는 이론적 자원을 제시했다. 즉, 자기 전공의 기반 위에서 심리학과 사회이론으로 시야를 넓힌 것인데, 전공의 확장은 이렇게 이루어질 때 생산적이다. 다른 분야에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축적한 경험적 관찰과 방법론을 발판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피터 터친 역시 비슷한 예를 보여준다. 동물학자로 출발한 그는 역사학, 인류학, 진화론, 수학적 모델링을 종합하여 이른바 "엘리트 과잉생산" 이론을 제시했다.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불안정이 단지 이념의 대립만이 아니라, 상층 지위를 놓고 경쟁하는 고학력 엘리트의 과잉 축적, 기대와 기회의 불일치, 재정적 압박과 결합될 때 폭발적으로 심화된다는 그의 설명은, 물론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역사 속 국가의 흥망성쇠와 오늘날 극단주의와 포퓰리즘, 재(再)권위주의화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함의를 주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월경(越境)의 방식이다. 터친은 전공을 넘어선 분야의 문제를 유추와 감상으로 논평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역사 자료와 계량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설명틀을 제시했다.

이런 성공 사례가 전공을 넘는 연구 모두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작년 말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뜬금없이 한국출판공로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취소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은 그 위험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본 문학 전공자인 그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사와 증언 자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왜곡된 기억과 예외적이고 복합적인 사례를 포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일반화하여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흐리고, 강제성과 식민지 권력관계, 폭력의 구조를 상대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정치적·사회적 함의를 왜곡하려 한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것과 그 특수성을 전체의 본질인 양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물론 예외적 사례를 무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해리 엑스틴이 말했듯이, 일탈적이거나 결정적 사례는 이론을 시험하는 가장 강력한 장(場)이 될 수 있다. 지리학에서 출발해 행정학과 경제·경영학을 넘나든 벤트 플루비야오 역시 핵심적, 극단적, 패러다임 전환적 사례는 비록 예외적일지라도 반드시 검토해야 함을 강조한다. 실제로 중요한 이론적 혁신은 종종 평균적 사례가 아니라, 기존 틀로 설명되지 않는 낯선 사례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훈련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떤 사례가 정말 예외적인지, 아니면 우리가 아직 전체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예외처럼 보이는 것인지 등을 판단하는 일은 해당 분야의 축적된 교육과 연구 전통 속에서만 가능하다. 예외의 의미를 읽어내려면, 먼저 정상성의 구조를 알아야 함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메노키오라는 한 방앗간 주인의 기이한 우주관은 그 자체로는 주변적이고 특이한 기록에 불과하다. 그러나 긴츠부르그는 그 사례를 통해 민중 문화, 문해력, 종교개혁기의 지적 흐름, 심문 기록의 성격을 촘촘히 연결해냈고, 그 결과 거시사(巨視史) 중심의 역사학에 대해 미시사(微視史)의 정당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예외적 목소리를 역사학의 방법론적 전환으로 끌어올린 힘은, 무엇보다 바로 탄탄한 역사학적 훈련에서 나왔다.

융합과 학제간(學際間) 연구의 시대에 분과학문의 벽은 분명 더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벽을 허문다는 말이 무작정 남의 집에 뛰어들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전공을 넘어선다는 것은 무지를 용기로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타자의 학문에 대한 경의와 학습을 전제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융합은 창조가 아니라 침범이 된다. 박유하는 돌연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수호하기로 결심한 우리 법원의 자애로운 판단으로 심판을 면했지만, 김대령, 지만원 등의 박사들—그렇다, 그들은 박사(신학, 공학)다.—이 역사학의 영역에 뛰어 들어가 그들의 눈에만 의심스레 보이는 사례를 찾아 광주를 상대로 자행한 만행은 이를 면하지 못했다. 이들이 교수나 박사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함량 미달의 주장이 학문과 사상의 공론장에서 불필요한 분란만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생명공학 전공의 한 교수가 현란한 그래프와 수식을 동원하며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등의 일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분과학문의 벽 너머로 들어가는 일은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고, 구조를 익히고, 그 집의 규칙을 배운 후 들어갈 때만 그렇다. 벽을 때려 부수고 뛰어드는 것은 기물손상이자 무단침입이다. 기생충의 세계에서 미추(美醜)를 깨닫곤 근처 무덤에 침을 뱉고 있던 전직 미학자와 합을 맞춰 불러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비유와 풍자의 말글을 쏟아내는 등의 일은, 예컨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문학을 논하다 말고 동북아 현대사와 국제법, 여성학과 정치사회학 등을 건드리며 학술의 외피를 둘러쓴 서적을 출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논란이 된 그 책이 냉전사와 (남북)한·일 관계, 동북아 평화 구축과 시민사회·운동과 같은, 자신의 전공을 한참 벗어난 주제에 대한 비평 모음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깃집 불판이 맘에 안들면 사람을 불러 바꿔 달라고 해야지, 자기가 바꾸겠다고 팔 걷어붙이면 십중팔구 판을 엎거나 불똥에 걷어붙인 본인 팔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해를 입기 마련이다. 특히나 술이나 이념에 취해 있다면야.

학제적 도약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단횡단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일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경계 너머에 대한 존중과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당신의 박사학위는 척척박사가 아니다.

▲제미나이로 생성한 A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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