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등 진보 학자들과 함께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호치민이 처음 게릴라전을 펼친 팍보 동굴 등 베트남혁명 유적을 다녀왔다. 그 여행기를 사진과 함께 두 번에 걸쳐 게재한다.
'레닌 개울'. 현실 사회주의 몰락으로 세계가 자본주의로 평정된 21세기에 '레닌 개울'이라니! 빙하가 녹은 빙하수에서 볼 수 있는 기막힌 비취색 개울 위에 세워진 '레닌 개울'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있자, '초현실적인 현실'에 기분이 묘했다. 그 위의 나지막한 산에는 '산중의 산'이라는 안내판이 쓰여 있다. '카를 마르크스산'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달려가던 1941년 2월, 베트남 혁명의 아버지 호치민은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중국 윈난성에서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어 조국의 최북단 지역인 카오방의 국경 지역 하꽝에 도착했다. 1883년 이후 60년이나 프랑스 식민지로 지내온 베트남을 해방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여기입니다." 한 달 전 호치민의 지시로 이곳에 침투해 지역을 탐색한 정찰대는 그들이 찾아놓은 산속의 동굴로 호치민을 안내했다. 베트남민족해방군의 초기 사령부가 된 '팍보(Pac Bo) 동굴'이다. 작은 다리를 건너 레닌 개울을 10분 정도 거슬러 올라간 뒤 카를 마르크스산으로 가파른 계단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자, 역사적인 동굴이 나타났다. 입구는 키가 큰 나로서는 거의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았지만, 일단 들어가자 천장이 엄청나게 높고 종유석들이 즐비한 동굴이 나타났다.
베트남 혁명의 첫 발자국이 된 이 동굴에 들어가 호치민이 책상과 침대로 쓰던 긴 나무 판자 앞에 서자,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하나는, 이곳에 오기까지 호치민이 겪었던 독립투쟁의 긴 여정이다. 두 번째는, 호치민의 여정에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이곳에 오기까지의 긴 우리의 여정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호치민이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로 성장하는 데는 우리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하지만 호치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국뽕 가짜뉴스'다).
1890년 가난한 유학자의 집안에 태어나 근대적 교육을 받은 호치민은 서양을 보고 배우기 위해 1911년 보조요리사로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프랑스로 향했다(안창호가 190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호치민은 젊은 시절 보조요리사와 요리사로 일하며 돈을 벌어 독립운동을 했다. 처칠 수상의 단골 식당이자 호치민이 일했던 런던 칼튼호텔 자리에는 '호치민이 1913년 이곳에서 일했다'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어디서 왔습니까?" "코리아요." 요리사로 미국 뉴욕에 온 호치민은 우연히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만났다. 이들과의 만남이 그의 민족주의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의 전기 작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후 그는 영국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한국과 연결된다.
"어서 오십시오." 1919년 봄, 파리 동쪽 근교(파리 9구 샤토가 38번지) 한 낡은 건물에서 30대 후반의 한 동양 남자가 10살 정도 어려보이는 다른 동양 남자를 맞았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강대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현실과 일본의 폭압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이곳에 '한국통신국'을 설치한 김규식이었고, 손님은 호치민이었다.
김규식은 독립청원서를, 호치민은 베트남인의 참정권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요구서를 작성해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호치민의 행동 계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출판한 문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최근 공개된 프랑스 정보경찰 보고서다.
물론 강대국들은 두 식민지의 청원을 무시했다. 이에 의한 실망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호치민을 공산주의로 이끌어, 1920년 그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했다. 1921년, 호치민은 파리 몽마르트 북쪽 아파트에 살면서 프랑스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 이외에도 아프리카 국가 등 프랑스 식민지들의 해방을 위한 국제연대조직 '식민지동맹(Intercolonial Union)'을 만들어 기관지를 출간했다. 인도의 최하위 카스트층인 불가촉천민을 지칭하는 파리아(Paria)를 딴 <버림받은 자들(Le Paria)>이다. (이 건물 외벽에는 사각형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1921~1923년까지 호치민은 이곳에 살면서 베트남과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 일로 프랑스 정부의 감시가 심해지자, 호치민은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코민테른 동아시아 상임위원이 된 그는 1924년 중국 광저우로 가 베트남 청년들을 조직했고, 1928년에는 태국에 침투해 조직 활동을 했다. 1930년, 영국령 홍콩에서 3개 공산주의 조직을 모아 '베트남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이름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들여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개명했다. 곧이어 터진 '옌바이 봉기'에서 응에안 지역 노동자들은 베트남 최초로 '소비에트'를 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결석 재판에서 호치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는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그리고 나중에 베트남 혁명의 성공 요인이 된) 광범위한 '(반제)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승인했다. 1938년,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두 달 간 같이 생활했다. 1939년 2차대전이 터져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1940년 일본이 남방정책으로 베트남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할 때라고 판단한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가까운 윈난성으로 본거지를 옮겨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 같은 근 30년간의 망명투쟁 끝에 그는 50세 나이에 베트남으로 들어와 팍보 동굴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사용해 왔던 150개의 가명을 버리고 '깨우치는 자'라는 뜻의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머리를 식히기 위해 낚시를 하던 동굴 앞 개울을 '레닌 개울'로, 그 뒷동산을 '카를 마르크스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역사의 현장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말년에 고생하셨습니다." 2008년 가을, 이명박 정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 사회주의노동자연합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다행히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석방된 오 교수를 위로하기 위해 나를 비롯해 김세균, 최갑수, 강내희 등이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날 탄생한 것이 '즐좌(즐거운 좌파)'라는 모임이다. 몇 되지 않는 '좌파 교수'들이 가끔 만나 술자리를 하는 만남으로 평소에 지겹도록 하는 "세미나나 심각한 논쟁은 절대 하지 않고 즐겁게 놀자"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고 김수행(경제학), 김세균(정치학), 강내희(문화연구), 손호철(정치학), 서관모(사회학), 박거용(교육학), 최갑수(서양사), 박상환(유학), 송주명(정치학) 9명이 주 멤버였고 오세철, 고 류초하 교수가 참가했다. "돈을 모아 역사적인 혁명유적 답사도 다닙시다." 만날 때마다 돈을 모았지만, 김수행 교수가 세상을 떠나고, 가까운 후배 활동가의 어머니가 암으로 고생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은 돈을 치료비로 전해줬다.
세상을 떠난 김수행 대신 이도흠 교수(국문학)가 참여하게 됐고, 뜻을 같이 한 뒤 17년 만에 드디어 베트남혁명 답사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많이들 가는 하노이와 호치민시 이외에 베트남혁명의 성지인 팍보 동굴을 가지고 한 것이다. 팍보 동굴은 하노이에서 367km로 서울~부산 거리보다 가깝지만, 열악한 도로 사정 등으로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이동에만 9시간 이상 걸렸고 식사, 화장실 등을 포함하면 11시간이 걸린 강행군이었다.
특히 가는 길은 중국으로 가는 국경도로라서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물류수송 트럭들이 줄을 이어 교통 체증이 심하고 도로도 엉망이라 70대 노인들의 허리에는 고문이었다(이번 여행에는 송주명 교수를 제외하고 8명이 참가했는데, 대장인 김세균 교수는 70대 후반이고 막내로 올 봄에 정년이 된 이도흠 교수를 빼면 모두 70대다). 그래도 '레닌 개울'과 '카를 마르크스산'을 보자, 강행군에 따른 피로와 허리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호치민 루트 : 카오방 출발점 0km'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 출발해 베트남에 인접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정글을 지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시)까지 이어졌던 3000km에 이르는 북베트남군과 군장비 이동로다. 팍보 공원의 언덕 위에는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핵심 요인인 호치민 루트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이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고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수민족인 타이족과 넝족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호치민은 이들의 문화를 존중했고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들을 설득해 투쟁에 동참시켰다. 공원에 있는 기념관에는 소수민족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호치민의 모습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넝족은 호치민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기념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손가방을 든 넝족 소년과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호치민을 그린 그림이다. 이를 보는 순간 이 소년이 베트남혁명의 전설적인 소년투사 '김동'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넝족 소년인 농반던은 일찍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도 몸이 약해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해, 나이에 비해 책임감이 매우 강했다. 그는 10살 때 '호아저씨(호지명의 애칭)'를 만났고 그가 만든 민족구원소년단에 가입했다. 이 단원들은 모두 별명을 썼는데 그의 별명이 '금처럼 귀중한 아동'이라는 뜻의 '김동'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 때문에 의심을 덜 받아,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전령으로 활동했다.
1943년, 레닌 개울 근처 안가에서 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프랑스군이 나타났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김동은 간부들이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산으로 도망치며 프랑스군을 유인했다. 그를 쫓던 프랑스군은 그를 놓칠 것 같자 총격을 가했다. 김동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레닌 개울에 붉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다. 그의 동상과 그의 영웅적인 투쟁을 그린 벽화를 보고 있자, 문득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원경스님(1941~2021)이 떠올랐다.
치열한 항일 투사이자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아들로,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원경은 박헌영이 1946년 북으로 넘어간 뒤 먼 삼촌인 한산스님 등 남로당 관계자들에 의해 키워졌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산스님은 생존을 위해 열 살 나이의 어린 원경의 머리를 깎여 동자승으로 만들었고, 지리산 빨치산 부대였던 이현상 부대에 데리고 들어갔다. 이현상 부대(남부군)에서 스님은 '애빨(애기 빨치산)'로, 김동처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전령과 마을에 들어가 된장 등을 구해오는 보급책으로 활동했다(손호철, <한 스님>, 이매진, 2023년 참조).
김동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희생 위에 베트남혁명은 성공했고 그는 '민족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원경스님은 살아남았고, 이현상 부대는 1948~1953년까지 1만 번 이상의 전투를 치르는 등 '세계 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치열한 투쟁'을 벌였지만(이에 비하면 중국공산당의 장정과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쿠바 정글 게릴라전은 '피크닉 여행'과 '야영캠프'에 불과하다), 호치민 부대와 달리 괴멸하고 말았다.
베트남은 정글과 라오스, 캄보디아 등 유격부대들이 숨을 수 있는 은신처가 많았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기 등을 지원받았다면, 지리적으로 지리산에 갇히고 반(反)김일성 세력이란 이유로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이현상 부대는 고립된 채 괴멸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김성동 소설가가 안타까워했듯이, 먼 나라의 혁명가 게바라는 다들 알면서도 정작 이 땅의 혁명가 이현상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노이로 돌아오는 버스 창에는 어린 10대 초반의 나이에 비밀문서를 지닌 채 가슴 조이며 '적진'을 누비던 김동과 '애빨' 원경스님, 그리고 친김일성 세력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채 지리산 계곡에서 스러진 비운의 혁명가 이현상의 얼굴이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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