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표면을 뒤덮었던 수사(修辭)를 우리는 기억한다. "민주주의의 방어", "자유의 확장", "규칙에 기초한 국제질서".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이 오래된 노래를 돌연 멈춰 세운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이념적 사도(使徒)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미국 본토'와 '서반구(아메리카 대륙)'를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먼로 독트린에 트럼프식 각주를 달았다.
이를 노골적으로 "미국의 첫 번째 전략적 공간"이라 부르고, 군사력도 이제 "가치가 감소한 전역에서 재조정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 선언은 단순한 문장 하나의 변화가 아니다. 미국이 30년 넘게 유지해온 세계전략의 축이 대서양―태평양의 장대한 호(弧)에서 미국 본토 주변의 좁은 환(環)으로 수축하는 장면이다. 거대한 행성의 중력이 이동하듯, 동아시아 역시 이 진동의 외곽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1. 중국, 이념의 적에서 '관리해야 할 경쟁자'로
이번 미국의 신안보전략의 중국 서술은 흥미롭다. 미국은 중국을 더 이상 "가장 중대한 위협"이라 부르지 않는다. 민주주의 대 독재, 가치 대 전체주의, 세계질서의 수호 같은 문구도 사라졌다. 미국이 세계의 정치 이념을 개조하려는 욕망에서 물러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퇴가 곧 약화는 아니다. 문서는 중국을 경제적 경쟁자, 공급망 취약성의 원천, 그리고 지역 지배력을 '이상적으론' 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 말의 이면은 단순하다. 군사적 우위가 더 이상 자동적이지 않은 시대, 미국은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미래의 생존을 중심으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문서는, 미국이 대만에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첫 번째로 인정한다.
"이상적으로는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표현은, 그 우위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음을 조심스런 방식으로 토로한 문장이다. 더 나아가, 대만 방어는 "제1도련선 동맹국들이 훨씬 더 많이 지출하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만을 둘러싼 억지력은 이제 '미국 단독의 의지'가 아니라 '동맹의 부담 능력'에 종속된 셈이다.
이것은 미국이 중국을 이데올로그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미국이 더 이상 전권적 보호자임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2. 동맹에게 더 적게 주고 더 많이 요구하는 미국
이번 문서에서 가장 선명한 지점은 이율배반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제 연합을 만들자고 동맹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동시에 동맹국들과의 무역 협정은 재협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방위비·무기 구매·기지 제공 등은 예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부담을 요구한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더 적게 제공하면서 더 많이 요구하고 있다.
문서의 어조는 단호하다.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교정하는 데 관심이 없으나, 세계 경제의 규칙만큼은 미국식으로 다시 짜겠다고 말한다. 이는 '이념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거래의 시대'는 더 날카롭게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거래의 시대에, 과연 동맹국들이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희생해 미국 중심 질서를 떠받칠 것인가? 문서가 약속하는 보상은 제한적이며, 군사적 방패는 줄어들 수 있다.
3. 한국이 맞닥뜨릴 '압박과 틈새'의 시대
한국은 미국의 새 전략이 만들어 내는 지진파가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도달하는 지역에 서 있다. 미군 전력이 인도-태평양에서 부분적으로 조정될 경우, 한국이 마주할 상황은 단순히 "미국의 관심이 줄었다"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것은 힘의 공백이다. 공백은 언제나 누군가가 메우며, 동아시아에서 그 누군가는 대개 중국과 북한이다.
한국이 마주할 가능성은 세 갈래다.
첫째, 낙관적 경로.
미국은 핵심 억지력만 유지하고, 동맹과의 무역 갈등은 조율된다. 한국은 기술 동맹과 경제 다변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로는 정치적·재정적 비용을 고려할 때 가장 희박하다.
둘째, 중간 경로(가장 개연성 높음).
미국은 군사·경제에서 동시에 동맹에게 더 큰 부담을 요구한다. 중국은 남중국해·동중국해에서 회색지대 활동을 늘리고, 북한은 전술핵 기동성과 SLBM 능력을 강화한다. 한국은 안보와 경제가 동시에 압박받는 구조로 밀려난다.
셋째, 비관적 경로.
미국의 전력조정이 본격화되고, 중국은 주변 해역에서 '기정사실화' 전략을 강화한다. 미국은 대만 유사시 한국에 전례 없는 수준의 병참·정비·기지 제공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은 미·중 양측의 강제적 선택을 동시에 강요받고, 공급망과 수출산업은 압력에 노출된다. 이때 한국은 스스로 억지력의 상당 부분을 구축해야 한다.
4. 미국이 세계에서 물러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미국의 새 전략은 단순히 미국의 전략 조정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새로운 구조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념의 언어가 사라지고, 거래의 언어가 전면으로 등장했다. 민주주의의 보편성 대신, 경제적 국익의 우선성이 등장했다. 세계시민주의 대신, 국경과 반구(半球)의 언어가 부활했다.
이제 동아시아는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은 정말 이 지역에서 예전만큼의 억지력을 행사할 의지가 있는가? 중국은 그 틈새를 어떤 속도로, 어떤 방식으로 메울 것인가? 한국은 미국의 요구와 중국의 압박 사이에서 어느 지점에 새로운 균형을 세울 수 있는가? 우리는 미국의 수축을 '고립'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재배열'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외교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적 상상력과 사회적 합의를 다시 구성하는 문제다.
5.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
한국이 해야 할 일은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결단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
첫째, 안보의 기본 단위는 한국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
미국의 억지력은 축소될 수 있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결국 한국의 자주적 안보능력이다.
둘째, 경제는 단일 축이 아니라 삼중 축으로 분산해야 한다.
(1) 미국과의 기술동맹,
(2) EU와의 규범·청정산업 협력,
(3) 중국과의 현실적 경제관계.
이 세 축을 조합할 때만 한국은 압박과 보복을 흡수할 여유를 얻는다.
셋째, 대만 유사시 한국의 역할을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전면개입도, 완전중립도 전략적으로 위험하거나 불가능하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을 둘러싼 준비된 합의의 유무다.
이번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이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한 발 물러섰음을 인정하는 문서이자, 동시에 중국을 향한 또 다른 방식의 견제를 선언한 문서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외곽의 구경꾼이 아니다. 힘의 공백은 가장 가까운 나라에게 가장 먼저 도달하며,
우리는 그 진동을 흡수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세계가 수축할수록, 한국은 단단해져야 한다. 그 단단함은 무기나 군비만을 뜻하지 않는다. 산업의 탄력성, 사회의 합의력, 외교의 기민함, 그리고 변화의 본질을 직시하는 눈(眼)이 그 단단함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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