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잊고 싶었거나, 잊고 있겠지만, 내란 방조 혐의 등으로 15년 형을 구형받은 한덕수는 국민의힘 대선 주자 출신이다. 적어도 당의 공식 기록대로라면 한나절 이상 대선 후보를 지냈다.
한덕수는 지난 5월 10일 새벽 3시 20분에 당비 1만 원을 내고 입당하면서 무려 32종의 각종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한다. 국민의힘은 새벽 4시인 마감시간까지 유일하게 등록한 후보인 한덕수로 대선 후보가 교체됐다고 새벽 4시 40분에 공고를 냈다. 입당 80분만에 당권을 거머쥔 한덕수는 그날 밤 당원투표로 후보 교체 안건이 부결될때까지 하루짜리 대선 후보로 존재했다.
이 치욕적인 사건을 국민의힘은 잊은 것 같다. 한덕수가 내란 방조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구형받았지만, 공식 논평은 단 하나도 없다. 전직 대선 후보의 범죄 혐의에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을까? 한덕수는 국민의힘이라는 '소극'의 엑스트라였을지언정, 이 극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주제' 그 자체다.
지금 국민의힘 대표를 맡고 있는 장동혁도 이 소극의 엑스트라다. 그는 김문수 대선 후보가 패배한 후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김문수 후보에게 이렇게 몰아붙였다.
장동혁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23차례에 걸쳐 후보 단일화를 약속해놓고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나"
김문수 "김문수 후보를 한덕수 후보로 바꿔치기하는 후보 교체가 안 된 것이지 단일화가 안 된 것이 아니다...김문수로 단일화가 됐다."
장동혁 "궤변이다"
본래 장동혁 대표는 '김문수로 단일화'를 주장했던, 김문수 후보 캠프의 핵심 인사였다. 자신이 보좌하던 후보가 후보직 박탈 위기에 처한 상황을 겪은 장동혁이, 김문수에게 '왜 한덕수와 단일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느냐'고 호통치는 장면을 마주하면 '패륜' 이외에는 딱히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죽하면 김문수가 "(나의) 캠프 상황실장과 (대선후보 경선에서 나의) 선거대책본부장도 하신 분이,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 보면 당대표 선거에서 정략적인 말씀을 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질문을 하시는 것 아닌가"라고 한탄했겠는가. 김문수의 인간적 배신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자신이 보좌하던 김문수를 밟은 장동혁은, '윤어게인'을 표방하는 전한길 세력의 표를 얻어 국민의힘 당대표가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 정당의 본질은 탈은폐된다. 국민의힘은 '집권'이 아니라 '주류 쟁탈전'에 매몰된 정당일 뿐이었다. 한덕수를 밀던 '윤석열 세력'이 '김문수의 참모' 장동혁을 밀고, 장동혁은 자신이 보좌하던 대선 후보를 호통치는 모습에선 어떤 가치나 비전이 아니라 순수한 정치적 욕망만이 남아 나뒹군다. 그 세력은 '주류'의 위치만 차지할 수 있으면 정권을 탈환할 기회가 언제든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덕수 후보 교체를 시도했던 권영세, 권성동 등 '쌍권'의 생각도 그랬다. 박근혜 탄핵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의 혁신을 막아 세우고, '이명박 박근혜'를 감옥 보낸 윤석열을 내세워 정권을 탈환한 그 경험이 '쌍권'을 움직인 셈이다. 박근혜 탄핵과 황교안, 윤석열로 이어지는 '독'을 맛보고도 국민의힘의 '주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윤어게인'으로 살아남아 그 '독'을 체화하고 있다. 윤석열이든 한덕수든, 내란 수괴든 방조자든, '막판 역전승'이라는 일말의 희망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한탕주의라고 할가.
국민의힘은 내란 사태를 '프레임'(나경원)으로 접근하고, '내란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김민수)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란 재판 1심 판결은 1월(한덕수), 2월(윤석열)에 줄줄이 예고돼 있다. 한덕수와 윤석열이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사실 0에 수렴하는 상황에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내란은 허구'라고 주장하면 현실과 인식이 충돌하게 된다. 이걸 우린 '인지 부조화' 상태라고 한다. 인지 부조화가 진행되면 인식이 현실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인식이 현실을 왜곡하게 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비현실'로 인식하게 된다.
국민의힘을 정신병리학적으로 설명하면 '해리(解離, dissociative)성 기억 상실'(외상으로 인해 중요한 자신의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인성 장애(자신과 외부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 해리성 둔주(과거의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사는 것),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중인격) 등 다양한 형태로 보고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6개월 전 자신들이 추대하려 한 '대선 주자'가 징역 15년 형을 구형받아도 단 한마디 논평을 낼 수 없는 상태, 보좌하던 대선주자를 공격하거나,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옹호하면서 과거 내란 피해자(5.18 묘지)를 위로하러 가는 행위가 어지럽게 펼쳐진다. 정치 윤리나 그 어떤 일관성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의힘이 위기를 타개할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보수 진보 언론, 평론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지적하는 건 "국민의힘이 중도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하지 않는 이유는 당의 '주류'로 한자리 차지한 김재원 최고위원이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표가 안된다"는 것이다.
"중도층을 얻어야 선거에 이긴다는 논리가 있고, 중도층의 의견을 반영해야 된다는 전략이 있는데, 그런데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분들이고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좀 무관심한 분들이 많잖나", "흔히 중도층이라고 했을 때 주로 투표율을 따진다면 한 55% 정도로 본다면 또는 많게 봐서 60% 정도 봤을 때 중도층의 많은 분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국민의힘이 스스로 "중도층은 우리에게 표를 주지 않을 거야. 내란은 좌파들의 개념이고 프레임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눈앞의 선거에서 망하더라도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의 실정이 자신들에게 윤석열 같은 인물을 내려주고, 그걸 통해 또다시 집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당의 '주류' 포지션만 뺏기지 않는다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최대 고민은 '의원직 사수'와 '영남 사수'다. 장동혁 대표가 장외투쟁으로 PK와 TK에 집중하는 이유도 그것이고, '표가 되는' 극우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심지어 '주류'와 '의원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방선거 승기를 내줘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같은 일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국민의힘 앞에 있는 현실은 이것이다. "내란범 한덕수는 국민의힘의 공식 대선후보였다."
한덕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후보 수락 메시지를 통해 한 말을 떠올려본다. 이 정당의 상태를 보여주는 말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김덕수, 홍덕수, 안덕수, 나덕수 그 어떤 덕수라도 되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윤덕수'와 '윤동혁'의 지독한 기시감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국민의힘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만으로 저 도그마와 병리적 현상들을 깰 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의힘의 과거를 돌아보고, 냉철히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보수 정당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귀한 시절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