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도미 외교, 실의와 온축의 10년
박인규
1933년 김규식이 미국을 방문한다.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과 윤봉길 의거에 따른 중일 대결 격화, 그리고 중국 국민당이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강화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반일 통일전선을 위해서 미국 교포들의 도움을 확보하려던 것이다. 당시는 말하자면 외교의 시대가 지나고 1929년 대공황 이후 각국이 군사주의로 치닫던 때다.
정병준
중한민중동맹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위한 방미였다. 전자는 한중연대, 후자는 한국 측 조직이었다. 제일 큰 목적은 미국 내 화교들의 자금을 얻는 것이었다. 화교들이 신해혁명 때부터 남양군도나 미주에서 중국혁명을 지원했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지원이 많았다.
그 다음이 재미 한인들의 지원이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미주도 대공황 여파로 완전히 엉망이었다. 국민회도 제대로 운영이 안 되어 국민회와 동지회가 연합했던 상황이었다. 굉장히 독특한 시기였다. 거기에 김규식이 가니까 김규식 추종자들이 연합회를 해체하고 대한민주당이라는 당을 만들어버린다. 김규식이 미국을 방문함에 따라 재미 한인 사회에 그나마 통일됐던 분위기가 깨진 셈이다. 김규식이 대일전선, 통일동맹의 연장선에서 대한민주당을 만들었는데 실제로 만들어지니까 김규식에 우호적이었던 국민회가 반발했다. 대한민주당은 일종의 김규식 팬클럽이 된다.
박인규
김규식이 뭘 만들 때마다 성공을 못한다.
정병준
조직가로서 김규식은 인간적 매력, 끌어들이는 포용력이 덜했다고 본다. 중국 화교들의 지원 역시 잘 안 된다. 저녁이나 점심은 크게 대접하지만 조직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하튼 김규식이 몇 천 불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다.
박인규
사실상 실패였다. 다만 세 번째 도미가 남긴 것으로 '한길수'라는 이상한 인물을 만난 점을 들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생략하자. (웃음) 하와이 출신으로 일찍부터 일본의 미국 공격 가능성을 주장해 미국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고, 이승만과는 앙숙이었으며 김규식의 하와이 방문 당시 민족혁명당 미국 대표라는 타이틀을 받으면서 김구의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 관계 악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정도로만 알아두자.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무력투쟁 국면이 본격적으로 열린다. 중국 국민당 쪽에서는 임정, 중국 군부에서는 김원봉을 지지한다.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김구의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김원봉의 민혁당과 조선의용대가 양립한다.
김규식이 참여한 민혁당은 일종의 국민당 지원 좌파 단체들의 통일전선정당인데, 여기서 김규식은 국민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처음 참가했던 조소앙, 이청천, 김규식이 결국 다 민혁당을 떠난다. 이들이 그때 남았다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정병준
김규식이 미국에서 돈을 모금하여 오니 그걸 기반으로 민족혁명당이 창당된다.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에 가담하게 된다. 1920년대에 국민대표회의가 있었다면 1930년대 초반에는 민족유일당, 혁명정당을 만들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나온 게 조선민족혁명당이다. 모든 당을 합쳐서 하나의 통일 당을 만들자는 거였는데, 합류했던 모든 세력 거의 대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김원봉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지만, 개인적으로 김원봉의 역량이나 큰 판을 멀리 내다보는 판단력에 의문을 갖고 있다. 처음 모였던 사람들이 급속히 다 떨어져 나가는데 이게 사상이론, 노선 차이 때문이었나?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그보다는 김원봉 측에서 독립운동의 선배나 존장을 대우하는 인간적인 면모, 예의가 형편없었다고 생각한다.
김원봉
김원봉이 1898년생이다. 김구는(1876년생) 거의 아버지뻘이다. 김규식, 조소앙 등도 10년 이상 연상이다.
문제적 인물 김원봉
정병준
어른을 모시고 선배를 모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김원봉 측은 선배 대우는커녕 부하 취급을 했다. 명령을 들어야 하는 부하 취급을 하니까 대선배들은 참을 수 없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와서 중국 군부 내에 친구들이 많았다. 반면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 이후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를 비롯한 원로들은 김구를 후원한다. 그렇게 당의 후원, 군의 후원이 갈라졌다. 민혁당을 만들었으면 이름 있는 자리, 실권 있는 자리를 선배들에게 줄 필요가 있었다. 당 대표 등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 대표 자리는 비워놓고 총서기의 이름으로 자신이 실권을 행사하면서 한직에 독립운동 대표, 선배들을 앉혀 놓으니 어땠겠나. 사실상 나가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임정 쪽으로 간다. 그렇게 매우 강력한 반민혁당, 반김원봉 세력이 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김구 핵심 세력과 결합한 것도 아니다. 결국 해방 이후 또다시 뿔뿔이 이산이 된다.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산다는 게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 모두들 자의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 것을 훼손하면 견딜 수 없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이해가 되는 바도 있다. 사실 정국을 크게 보고 도량 있게 행동하고 통합을 추진하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박인규
나중에 학병을 탈출한 장준하가 중경에 가서 이런 모습을 보고 "셋집을 얻어 정부청사로 쓰는 형편에 그 파벌의 숫자는 의자보다도 많다"면서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고 일갈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민혁당 문제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정병준
민혁당이 만들어진 건 시대의 호명이었고 과제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운영되었어야 한다.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박인규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진다. 본격적인 군사 투쟁 시대가 된다. 이것이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진다. 두 군대 모두 사실상 국민당 휘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의용대뿐만 아니라 국제 반파시스트 조직으로서 대만의용대, 인도의용대도 있었다는 점, 또 조선의용대와 연안 조선의용군의 차이 등의 내용을 책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정병준
김원봉이 황포 출신이니까 조선 청년들을 훈련시켜야 된다고 하면서 특설반을 만들었고, 한인들 거의 100명이 훈련을 받았다. 나중에 이 사람들이 조선의용대가 된다. 그런데 조선의용대라고 하는 건 결국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 군사 학교에서 훈련시킨 청년 군관들로 국민당이 지원하는 재정을 가지고 만든 군사 조직이다. 국민당은 장제스 휘하의 왕펑성(왕봉생, 王芃生), 일본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와 함께 조선의용대를 국제 반파시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만든다. 타이완, 조선의용대를 만들었고 몽골, 일본도 참여시키려 했다.
이걸 만드니까 김구도 한인특설반을 만들고 광복군을 창설하려고 한다. 군부에서는 '이미 조선의용대가 있으니 조선인 군대를 통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럼에도 결국 1940년 임정 쪽에서 강력하게 주장해서 임정은 광복군 창설식을 독자적으로 한다. 이때 실제 병력은 얼마 없었다. 중국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군관은 조선의용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복군에 중요한 건 명목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건너온 공산주의자 최창익이 조선의용대에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의용대의 중추인 청년전위동맹 등은 매우 혈기왕성했다. 일본하고 싸우겠다고 왔는데, 우리는 후방에서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최창익이 등장해서 뭐라고 하느냐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동북3성, 즉 만주로 올라가서 일본군과 싸우자고 선동한다. 청년들이 혹할만한 주장이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으로 만주 지역 항일조직은 뿌리째 뽑히던 시점이니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다.
중국 국민당 입장에서 조선의용대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일본과 실전을 벌일 군대는 아니지만 선전, 선동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면 나중에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관리할 엘리트 그룹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조선의용대 당사자들은 싸우고 싶어 했다. 최창익이 이들을 부추겨서 동북에 가서 항일 투쟁하자, 공산주의 이론이 옳다, 이렇게 되니까 다수가 붙는다. 김원봉이 이걸 막지 못했다. 김구, 임정 계열에서 보자면 김원봉은 좌파적 인물인데, "진짜 공산주의자" 최창익이 나타나니 갑자기 김원봉은 보수적이고 온건한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연안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조선독립동맹이 된다. 그렇게 되니 애초에 군사 역량으로는 더 컸던 김원봉 쪽이 쪼그라들고, 뒤늦게 만들어진 광복군의 역량이 더 커지게 된다. 장제스는 화가 났다. 돈 대주고 사람 키웠더니 다 공산당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선의용대를 해산하고 광복군에 합류해라, 김원봉도 광복군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즉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통합은 명령에 의한 강제 통합이었다.
당시 반일 국제연대 좌우합작 정신이 세계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먼저 군대가 통합하고 그다음 의정원이 통합하고 마지막에 정부가 통합했다고들 하지만, 실제 제일 중요한 결정은 후원 주체였던 중국 국민당 정부가 했다. 국민당이 통합하라고 명령하니 억지춘향격으로 통합됐다. 1942년도가 되면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들어가고 민혁당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고 국무위원으로도 참여한다. 즉 군대, 의회, 정부는 통합했다. 그런데도 민혁당과 한국독립당은 통합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무장 투쟁이 사실상 타국에서 군사 조직을 만들어서 독자 무력화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보면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나름 대국으로서 풍모를 보여준 측면이 있다. 물론 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해 한국 무장 투쟁 세력을 조직화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자기 휘하에 타국 군사 조직을 둔다는 결정이 보통 일은 아니다. 자기 영토 내에 사실상 외국 군대를 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국민당이 한국 무장 투쟁 세력을 통제하려는 측면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 교수에서 임정 부주석으로, 다시 등장한 김규식
박인규
좋게 보면 권유, 나쁘게 보면 강요로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이 사실상의 합병을 이뤘다. 이때 김규식이 김원봉 측 대표로 등장한다. 1935년에 민혁당을 떠나서 1942년까지 쓰촨성 청두에서 영어 교수를 하다가 1943년에 합류한다.
정병준
김규식이 '얼굴 마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평판, 명망, 대표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앞의 상황을 보면 민혁당 대표로 김원봉보다는 김규식이 훨씬 나은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재미 한인들에게 영향력이 있고, 한독당 입장에서도 김규식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있었다.
박인규
그에 따라 김규식이 처음에 국무위원으로 갔다가 나중에 임정의 부주석까지 한다. 그런데 김규식의 전문 분야는 외교인데 민혁당에서 외교는 조소앙이 맡고 김규식은 선전부장을 한다. 사실 김규식이 1945년까지 중경에서 중요한 일을 하지는 못 한다. 본인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정병준
당시 임시정부에서 제일 중요한 조직이 의정원이었다. 그런데 김규식은 의정원 의원도 아니었다. 김규식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 김원봉이 제지했다고 보는 게 맞다.
박인규
8년 동안의 공백을 뒤로 하고 돌아왔으나 그것은 예전 외교가로서의 명망 때문이었지, 김규식에게 실질적인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김규식이라는 인물이 명목상으로나마 김원봉 세력의 수장으로서 김구 세력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이것이 나중에 해방 후 좌우합작 때 하나의 자산이 된 것 같다.
정병준
그렇다. 그리고 임정 부주석을 역임한 것도 정치적 자산이 됐다. 그런 것들이 해방 후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우익 삼영수라고 부르는 여론의 기반이 됐다.
(⑦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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