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우크라 영토 내주는 '러시아 편향' 평화안 제안한 듯…'진퇴양난'에 빠진 우크라

트럼프 "우크라이나, 감사 없어" 불평…WSJ "합의 땐 젤렌스키 정치적 자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과한 합의 시한이 며칠 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미국 제시 평화안 관련 회담에서 진전을 이뤘다고 밝혔다. 양국은 돈바스 양도, 우크라군 규모 제한 등 러시아 편향적인 것으로 보도된 해당 초안이 수정되고 있다고 했지만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23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이 공개한 미-우크라 공동성명을 보면 양국은 이날 미국 제시 평화안에 대한 논의가 "매우 생산적"이었고 "입장을 조율하고 명확한 다음 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성명은 양쪽이 논의 결과 "갱신되고 정교화된 평화 프레임워크 초안"을 마련했고 "향후 모든 합의가 우크라이나 주권을 온전히 수호하고 지속 가능하며 정의로운 평화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는 걸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논의 중인 협상안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관련 기자회견에서 "양쪽의 우선 순위, 금지선(red line), 중요 쟁점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며 당초 제시한 "28개 항" 문서가 "살아 숨 쉬는" 듯 "매일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루비오 장관은 세부 사항에 대한 언급은 거부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마감일인 "목요일(27일)"까지 합의가 마무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같은 날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도 루비오 장관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 대표단과의 회담이 "매우 생산적"이었고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협상의 기초인 미국 제시 초안에 우크라이나가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초안 28개 항에 현재 우크라이나가 통제 중인 지역을 포함해 돈바스 전체를 러시아에 양도, 헤르손와 자포리지아의 경우 현 전선 동결,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가, 우크라군 규모 60만 명으로 제한 등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조항이 많은 반면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 보장 관련 조항은 구체성이 떨어진다.

루비오 장관은 회견에서 우크라이나가 영토 양도 등 핵심 문제에 동의했냐는 취재진 질문을 받고 세부 사항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유럽은 미국 초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23일 도이체벨레(DW)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린(유럽) 지난 금요일부터 이 28개 항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 우린 일부엔 동의할 수 있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또 그에게 우린 전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뜻을 같이 하며,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위태로워져선 안 된다고 했다"고 밝혔다.

메르츠 총리는 유럽이 우크라이나 평화 과정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DW에 러시아 동결 자산이 유럽에 묶여 있다고 환기하며 "이 계획을 실현하려면 유럽의 지원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했다. 메르츠 총리는 "중국이 러시아에 이 전쟁을 끝내도록 더 많은 압력을 가할 수 있다"며 중국의 역할도 촉구했다.

예르마크 비서실장은 회견에서 논의 과정에 "유럽 친구들도 참여시킬 것"이지만 "최종 문구는 미국 및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이 수정안을 내놨다는 보도도 나왔다. 23일 <로이터> 통신은 자사가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유럽은 우크라이나군을 60만 명이 아닌 "평시" 80만 명으로 제한하고 "영토 협상은 현 전선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안전 보장에 대해서도 미국이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 헌장 5조와 유사한 보호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해야 한다고 구체화했다. 또 러시아 자산 동결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입힌 피해를 보상할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통신은 이 안이 영국, 프랑스, 독일 주도로 마련됐다고 덧붙였다.

다만 루비오 장관은 23일 회견에서 유럽 수정안 관련 질문을 받고 "어떤 대체 제안도 접한 적 없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에 협상 마감 시한을 27일로 부과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우크라이나에 강하고 적절한 지도부가 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전쟁 원인을 우크라이나 정권 탓으로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우리 노력에 전혀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고 유럽은 러시아산 원유를 계속 사들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재블린(미사일)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인의 생명을 구해 온 미국의 지원, 모든 미국인의 마음,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께 개인적으로 감사드린다. 생명을 지키도록 도와주신 유럽, 주요 7개국(G7), 주요 20개국(G20)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미국, 고맙습니다!", "유럽, 고맙습니다!"라며 줄줄이 감사를 늘어놨다.

이번 미국 평화안은 측근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에너지 기업 비리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는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히려 이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불리한 조항에 동의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봤다. 신문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28개 항을 "은폐된 항복"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을 지낸 키이우 기반 싱크탱크 국방전략센터 의장 안드리 자고로드뉴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미국 제안을 "전쟁의 대안이 아닌 적을 강화하는 조치, 러시아 재무장을 위한 일시 중지로 본다"고 분석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전 외무장관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어떤 정치인도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느끼는 용납 불가능하고 극도로 고통스러운 결정을 단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승인할 수 없다"며 "사회가 거부하는 합의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러한 정치인에게 정치적,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 현실에선 물리적 자살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 수석 외교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크만은 23일 칼럼을 통해 "미국 제안은 러시아에 편향돼 있다"면서도 "우크라이나는 미국 평화안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우크라이나가 이미 전장에서 러시아 진격을 막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지원이 끊기면 러시아군에 돌파구가 생길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라크만은 미국의 제안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후 제안의 결함과 모순을 수정해 나가는 방향으로 협상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미국 제안이 "최종 제안이 아니다"라며 협상 가능성을 시사한 상태다.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러시아 공습으로 숨진 어머니의 주검을 한 소녀가 바라보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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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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