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분한 한국인"인가? 어머니에서 내게로 대물림된 질문

[한국 입양인 2세 이야기] ④ 어머니의 입양, 암, 죽음...슬픔과 치유의 여정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질문들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닌, 나의 어머니에게서 느낀 것이었다. 평생을 자신의 '소속'을 찾아 헤매던, 한국에서 입양된 나의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는 적어도 다섯 살에 미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고아원은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고, 추산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파고(파고, 노스다코타)에서 자랐다. 그녀의 얼굴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10여 년 동안에도 그녀의 희망 상자에 고이 간직되어 온 어머니의 일기장은 보이고 싶은, 이해받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했다. 여러 세계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삶.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끝내 얻지 못했고, 불확실함만이 늘어갔다.

나는 한국 입양인의 딸로서, 어머니를 괴롭혔던 바로 그 질문들과 씨름하며 자라왔다. 나는 나만의 정체성을 탐색할 지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파편 같은 이야기들과, 말하지 못한 내 뿌리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자신의 다섯 자녀를 소도시 미네소타에서 키우면서 스스로의 상실을 이해하려 애쓰던 어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상실은 곧 나의 것이 되었다.

▲어린 시절 가족 사진. 엄마가 안고 있는 여자 아이가 필자다. ⓒ타냐 마르티노

어머니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엄마의 주된 간병인이자 열 살 동생의 홈스쿨링 교사가 되었다. 매일 이어지는 간병, 밤늦은 응급실 호출 등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결정들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나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몸이 암을 이겨내길 기도하며 함께 싸웠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 결정은 쉬웠지만, 암이라는 독이 우리 가족의 삶에 스며드는 걸 지켜보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51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3년 후, 나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했다. 사진첩 사이에 끼워져 있던 먼지 쌓인 푸른색 공책. 그녀가 그것을 쓸 당시 나이는 내 또래였고, 다섯 자녀 중 네 명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늘 어머니를 대담하고, 독립적이고, 강인하며, 사적이고, 너그럽고, 보호적인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는 지금까지의 내 인식을 뒤흔들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만들었다.

그녀는 두려워했고, 스스로를 의심했고, 많이 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했다. 육아로 힘겨운 하루를 보낸 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기를. 그 아이들이야말로 내 첫 가족의 뿌리니까. 나는 혈육이 없다. 로빈, 수잔, 마이크, 타냐—너희는 내게 모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후, 나는 한국으로 이주했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 어린 시절에는 금기시되었던 그 유산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낯설고 먼 나라였다. 나는 어머니의 입양 기관을 찾고, 가족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녀와 나를 이어줄 무언가를. 그러나 많은 입양인 이야기들처럼, 내 여정도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한국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입양 전 가족을 찾을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입양은 동화(同化)를 의미했다. 과거를 버리고 완전히 미국인이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국에서도 '외국인'이었고, 한국에 온다 해도 역시 '외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프랑스·독일·영국·아일랜드 혈통)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서, '충분히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아픔을 느껴왔다. 한국에 살 때도 의심과 배제의 시선을 경험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반쪽 한국인임을 알게 된 한국의 '아줌마'들의 태도는 변했다. 그들은 따뜻했고, 나와 연결되려 애썼다. 그 순간들은 치유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도 아마 그 순간들을 붙잡고 싶어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살 때의 모습. ⓒ타냐 마르티노

2021년 3월, 내가 애틀랜타로 이주한 지 석 달 만에 총격범이 세 개의 마사지 업소를 공격해 8명이 희생되었다. 그중 6명이 아시아 여성들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내 친구가 나의 안부를 물었다.

"어떻게 느끼고 있어?"

"뭐에 대해서?" 내가 되물었다.

"그 총격 사건."

나는 당황했다. 누군가가 나를 '한국인'으로 명확히 인정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평생 그 부분의 정체성과 단절된 채 살아왔고, 내가 그걸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한국 정체성은 더 이상 무시하거나 밀어낼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나 자신의 정체성과 어머니의 역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것은 슬픔과 발견, 치유의 여정이었다. 그러다 작년, 그것은 다른 의미가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사건이 생겼다. 나에게서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어머니의 병력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늘 불완전했다.

"가족력인가요?"

어머니는 입양 전 친부모 및 가족의 의학적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따라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료 때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의 무게와 마주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건강과 미래의 문제였다. 이것이 유전인가? 다른 위험도 있는가? 이런 불확실성은 독자적인 무게를 지닌다.

수개월간의 조직 검사와 스캔, 상반된 보고들은 나를 공허 속에 두었다. 암일까? 아닐까? 알 수 없음이 나를 삼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립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동체가 나를 붙들게 했다. 고통은 이상한 스승이다. 그것은 나를 드러내고, 파헤치고, 노출시킨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것은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어머니의 존재는 모든 순간에 엮여 있었다.

어머니를 돌보던 경험은 내가 무엇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지,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답을 요구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동시에, 그때의 트라우마—응급실, 무너져가는 몸, 무력감—을 함께 남겼다. 이제는 내가 병상에 누워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을 차례였다.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수술 17일 후, 새크라멘토에서 영화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대기하며 5분 뒤 예정된 화상 진료를 기다렸다. 라운지의 전화 부스는 모두 꽉 차 있었고, 사생활은 없었다. 각자 캐리어를 끌고, 식사를 하고, 여행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 내 에어팟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암입니다."

와이파이가 끊겼다. 땀에 젖은 손으로 급히 다시 연결했다. 인터넷에 연결된 순간, 들려온 말은 이랬다.

"모두 제거했습니다."

▲수술 직후 모습. ⓒ타냐 마르티노

나는 숨을 내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깊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옆에 있던 여자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내가 기뻐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랬다. 나는 그대로 앉아 내가 들은 단어들의 의미를 흡수하려 애쓰며, 변함없는 세상 속에 머물렀다.

이번 경험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내 이야기를 다시 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서로 다르지만, 얽혀 있는 이야기들. 어쩌면 치유란 이런 방식으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고통을 지우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사는 것. 이전 세대가 결코 누리지 못한 치유를, 우리가 살아내는 것.

다른 한국 입양인의 자녀들이나 혼혈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두려움이 당신을 가로막지 않게 하라. 당신의 여정은 당신만의 것이다. 유산와 연결되는 '올바른 방식' 같은 것은 없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을 방문하고,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그저 한국이라는 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모든 발걸음은 의미 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길 바란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충분히 한국인인지"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 정체성이란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 모두를 포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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