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감독이 자신의 14번째 영화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를 내놓았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 성장하는 사람이다. 아니 자신이 성장한 다음에 영화를 내놓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감독으로서 그는 영화의 역사에 큰 혁신을 이루었던 감독들과 그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의 영화에 직접 반영한다. 예를 들면 그를 세상에 각인시킨 작품인 〈부기 나이트〉(Boogie Nights, 1997)는 미국 포르노 산업의 세계를 다루면서, 현대 영화사의 최고 고전으로 꼽히는 오슨 웰스의 〈시민케인〉(Citizen Kane, 1941)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Raging Bull, 1980)의 서사 구조와 미학을 차용해 풀어낸 작품이다.
그런데 앤더슨 감독의 성장은 단지 영화라는 장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품마다 표현하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공통으로 폐쇄된 집단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 내면의 불완전성을 다룬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어윌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2007)와 <마스터>(The Master/2013)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주된 포커스였다.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미국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모순인 인종차별을 전면으로 가져오는데, 예사롭지 않은 시기에 나온 이 작품은 트럼프 시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성찰과 직접적인 비판을 여과 없이 담고 있다.
우선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가장 난해하고 지적인 감독인 장뤽 고다르의 <중국여인>(La Chinoise/1967)의 형식을 차용함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여인>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들>을 원작으로 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는 사건 그 자체보다는 청년 혁명가들의 대화가 더욱 중요하다. 이들은 기득권 세대에 대한 비판부터 모택동 사상까지 왜 혁명이 필요한지를 난상토론 한다. 앤더슨 감독이 이 영화를 가져온 것은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인종차별이 68혁명의 주된 모티브였음을 관객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다. 즉 이 영화는 ‘혁명’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영화에서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미국의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는 남자주인공 밥 퍼거슨은 그의 멘토 격인 흑인 애인 퍼피디아 베버리힐스와 함께 혁명단체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또 다른 주인공은 록조는 백인 비주류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군인이다. 밥 퍼거슨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록조 역의 숀 펜 그리고 가라테 스승 세지오 역의 베니시오 델토로의 유명세에 가려졌지만,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밥의 동지이며 연인인 퍼피디아와 그녀의 딸 윌라이다. 퍼피다아는 밥의 멘토 역할을 하며 무장 게릴라 활동을 이어간다. 그녀는 여성이며 흑인이지만, 전투에도 능하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다. 진압군 지휘관 록조와 대립하기도 하고 거래하기도 한다. 그녀는 록조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강압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주도한 관계로 그려진다.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자주 소개되는 만삭인 상태에서 연발총을 난사하는 시퀀스는 충격적이다. 마치 파괴와 탄생을 뜻하는 ‘혁명’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로 보인다.
반면에 조직에 충성하기 위하여 친딸(윌라)은 물론 자신의 얼굴 반쪽이 날아가는 것도 불사했던 록조는 결국 흑인 여자(퍼피디아)와 관계했던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국가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앵글로·색슨 순혈-인종차별주의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영화에서 ‘크리스마스 어드벤처스 클럽’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이들은 군 고위 장성, 정치인, 사업가로 함께 모여서 그들의 신념대로 국가를 배후에서 움직인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동안 미국의 주류사회를 견고하게 쌓아온 것이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또한 트럼프 정부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밥과 퍼피디아의 딸 윌라가 주인공이다. 아버지(밥 퍼거슨)의 강요에 의해 숨어서 살았지만, 타고난 그녀의 기질을 감출 수가 없다. 그녀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록조)한테 붙잡혀 친자확인을 당한 후에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탈출해서 자기 손으로 살인청부업자를 죽인다. 다시 일상을 회복한 부녀, 그러나 윌라는 또 다른 집회에 참여하려고 떠난다. 윌라의 마지막 행동을 통하여 감독이 말하는 메시지는 극명하다. ‘혁명’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인종차별과 기독교 근본주의로 가득 찬 미국의 지배권력에 대항하여 봉기하라는 것이다.
지난 9월 4일, 미국의 조지아주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 317명이 미국 이민 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어서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쇠사슬로 허리와 다리가 묶이고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니하오’, ‘로켓맨’ 그리고 눈을 양쪽으로 찢는 시늉을 하는 인종차별적 언행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였고, 개방된 화장실은 물론 필수 의료품 제공에서도 기본적 인권을 침해당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요구로 현지 공장에 파견된 숙련 노동자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서도 트럼프행정부는 관세 협상을 빌미 삼아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84%에 해당하는 350억 달러를 현금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행태이다. 신자유주의 형태의 착취로도 미국의 경기가 살아나지 못하자, 트럼프는 미국의 쇠락을 노골적으로 이민자들과 다른 나라 탓으로 돌리며,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높은 관세와 무리한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일 잘하는 대통령만 믿고, 4대 재벌 총수가 트럼프와 골프에서 잘 잃어주기를 바라면서 무력하게 기다려야 하나?
전 세계가 지난 윤석열의 독재와 12.3 반란으로 대한민국경제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도 했다. 아직도 회복이 덜 되어서 노동자들은 체불임금에 허덕이며, 골목상권은 하나둘 문을 닫고 있고, 일자리를 못 찾는 청년들이 캄보디아에 가서 범죄 조직에 의해 살해당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얼마 전 미국 내 트럼프 반대 ‘No King!’ 시위에 700만 명이 모였고, 이에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연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최대 피해국인 한국은 이리도 조용한가? 이제 우리 광장의 시민이 나서야 한다. 트럼프 같은 패권주의자들이 있는 한 전쟁과 학살은 계속될 것이고, 이에 온 인류는 혁명으로 맞설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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