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폭우, 병해충 창궐... 뿔난 농민들, 한전·발전소 '기후 책임 손배소' 돌입

'기후 피해' 농민 6명, 한전 등에 기후 소송... "국내 누적 온실가스 27% 차지"

경남 함양의 사과 농부 마용운(56) 씨는 "거의 매해 기후 재난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겪은 냉해 피해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4월 8일 사과 꽃봉오리가 맺히는 시점에 함박눈이 내린 해다. 사과 농부들은 냉해가 가장 무섭다. 저온 때문에 꽃이 피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해, 사과를 수확할 수가 없다. 보통 사과 100개를 맺는 나무라면 10개만 맺는 식이다.

이런 냉해가 해를 걸러 반복된다. 마 씨는 2023년에도 강도 높은 냉해 피해를 봤다. 그 해엔 폭우까지 겹쳤다. 여름 폭염, 폭우가 만든 고온다습한 환경에선 곰팡이류가 활발히 번식한다. 그해 함양 사과밭엔 탄저병(곰팡이에 의한 과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2023년 전국 사과 생산량은 30% 정도가 감소했다. 이듬해 설 즈음에 사과 가격이 폭등하는 '금사과' 사태로 이어졌다.

마 씨는 "기후 변화 외엔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마 씨는 1990년부터 아버지의 사과농사를 지켜봐 왔다. 그 시절 냉해 피해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개화 시기가 4월 말에서 4월 초로 바뀌었다. 4월은 중순까지 꽃샘추위가 불거나 서리 등이 내릴 수 있고, 간혹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기후 변화로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고 이상 기상현상도 잦아지면서 냉해 피해가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엔 벼멸구 창궐, 올해는 폭우 침수"

30년째 충남 당진에서 벼농사를 짓는 황성렬(62) 씨는 "해가 갈수록 피해가 더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씨는 지난해와 올해 모두 기상 피해를 크게 봤다. 지난해엔 벼 수확량이 35% 줄었다. 황 씨는 "벼멸구가 새끼를 치고 또 쳐서 생애주기가 2~3배로 길어졌다"며 "그럼 답 없다. 농약 방재도 안된다. 날이 뜨겁고 습도가 높으니, 병충해가 활개를 쳤다"고 말했다.

또 "거기다 가을엔 비가 자주 내렸다"며 "벼는 쨍쨍한 햇볕을 쫙 받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면 안 여문다. 벼가 익질 않으니 무게도 덜 나가고 품질도 안 나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올해도 폭우로 논이 침수됐다. 황 씨는 "농약값 줄 정도 지원금이 나온다더라"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충남 당진에서 벼농사를 하는 황성렬 씨가 8월 1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농업인 기후피해에 대한 손배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프레시안(손가영)

황 씨는 매해, 매일 기후변화를 몸으로 느낀다. 못자리는 큰 변화 중 하나다. 논에 심기 전, 어린 모를 먼저 심어다 키우는 모판을 말한다. 황 씨는 "언제부터 못자리를 2번, 3번씩 심는다"며 "(4월) 온도가 25도는 나와줘야 하는데 올해가 저온이었다. 뿌리가 안 생겨서 썩으니 못자리를 두세 번씩 하게 되는 것"이라 설명했다.

<프레시안>이 12일 만난 두 농부는 이날 오전 하루 생업을 뒤로 하고 서울 광화문광장에 섰다. '농업인 기후피해에 대한 손배청구소송 기자회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이날 한국전력과 5개 발전 공기업에 기후 위기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소송을 광주지법에 제기했다. "기후재난의 피해를 가장 먼저 받는 농민으로서, 농업 기반을 붕괴시킨 온실가스 배출기업에 책임을 묻겠다"는 이유다.

한국 화석연료 발전소, 전 세계 온실가스 0.4% 차지

이들을 대리하는 김예니 변호사(기후솔루션)는 기자회견에서 "발전 자회사들은 온실가스 배출이 집계된 2011년 이후부터 줄곧 국내 배출량 1위를 점해왔다"며 "2011~2022년 누적배출량으론 총량의 27%를, 전 세계 누적 배출량의 0.4%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발전 자회사들이 운영하는 화석연료 기반 발전소들이 내뿜은 온실가스의 비중이다.

김 변호사는 "국가 전력 공급이란 책무를 수행했지만,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책임을 면제하는 사유는 될 수 없다"며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전력 규칙 개선,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 같은 결정은 정부 방침과 별개로 개별 기업 판단으로 가능한 사안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국전력의 책임에 대해서도 소장에서 "5개 발전사가 세계의 온실가스 절감 흐름에 매우 뒤처지는 것은 한전이 이들의 전력생산을 신재생에너지로 변경하거나 화력발전량을 줄이는 등의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적극적 에너지 전환을 미루고 지연하면서 지금까지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한 책임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배상 청구 금액은 우선 한 명당 500만 원에 정신적 손해배상 위자료 2035원을 합한 500만 2035원이다. 재산적 손해배상금은 아직 확정되진 않았으나, 향후 집계될 재산피해액 전부의 0.4%를 청구할 예정이다. 0.4%는 5개 발전 자회사가 현재까지 배출한 전 세계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의 비율이다. 2035원은 '한국이 적어도 2035년까지는 탈석탄을 해야 한다'는 과제의 취지를 반영해 정했다.

▲경남 함양에서 사과농사를 하는 마용운 씨가 8월 1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농업인 기후피해에 대한 손배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후솔루션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농민, 우리 삶에 관심 좀" 호소

원고 농부는 총 6명이다. 제주에서 17년째 귤 농사를 짓고 있는 윤순자씨, 복숭아 농사를 하는 경기 이천의 송기봉씨와 경북 영덕의 김수옥씨, 산청 딸기농가 농부인 이종혁 씨도 소송에 참여했다. 이 씨는 지난 7월 산청 폭우로 딸기하우스가 침수돼 아직도 복구에 여념이 없다.

마 씨는 "기후 재난은 수확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농민의 삶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지난 6~7월 폭염 때만 해도 "밭에서 일하다 오전 10~11시만 되면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며 "일이 정말 힘들다. 피부로 체감하는 피해다"라고 말했다.

마 씨는 또 "'석회보르도액'을 바를 때도, 지난해엔 일부만 했다면 올해는 폭염이 정말 심해 모든 열매에 다 발랐다"며 "그만큼 많은 비용, 시간, 노동력이 든다"라고 말했다. 석회보르도액은 햇볕에 열매가 타 죽는 피해를 방지하는 살균제다.

황 씨는 이웃 농부의 안타까운 상황도 전했다. 그는 "기온이 계속 오르니 예산에서도 사과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계속 늘어난다"며 "아는 분도 사과나무를 다 베어내고 수박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올해 폭염 때문에 수박 농사에 타격을 받더니, 최근엔 폭우로 밭이 아예 침수됐다"고 말했다. "정말 답답한데, 이런 사례가 한두 집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2년마다 농사 피해는 반복되지만, 보호망은 부실하다. 정부 지원은 그때그때 지급되는 일시적 지원금 외엔 없다. 대부분이 농작물재해보험에만 의존하는데, 자기부담률이 20% 정도이고, 보험금 수령 횟수에 따라 차후 보험금 액수도 줄어든다. 마 씨는 "아는 사람이 냉해 피해로 사과 100개가 날 나무에 9개만 난 적이 있었다"며 "4000~5000만 원 매출을 예상한 밭이었는데 손해사정사가 다녀간 뒤 보험금 1000여만 원이 나왔다"고 말했다.

마 씨와 황 씨 모두 "농민들이 기후 위기의 피해를 가장 먼저 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이 소송이란 방법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 씨는 "언론은 사실 사과 가격이 오를 때만 크게 관심을 가지고, 또 '금사과' 얘기밖엔 안 하더라"며 "이미 수개월 전부터 농민은 냉해, 폭염, 폭우, 병해충 피해를 보고 고통을 받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니 소송을 해서라도 농민들 기후변화 피해에 대해 하소연하고 싶어서 나서게 됐다"며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8월 1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후솔루션 등의 주최로 '농업인 기후피해에 대한 손배청구소송 기자회견'이 열렸다. ⓒ프레시안(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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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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