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또는 유령의 코뮤니즘

[프레시안 books] 마쓰모토 준이치로 <들뢰즈와 맑스>

마르크스주의자 들뢰즈?

1995년,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푸코의 예언(?)이 실현되기 불과 몇 년을 앞두고 들뢰즈는 갑작스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굳이 푸코의 말이 아니더라도, 20세기 후반은 가히 들뢰즈의 시대였다. 서구에서는 68혁명 이후 반권위주의를 내세운 급진적 정치 운동이 사회를 휩쓸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운동이 그 주변을 넓고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 바람은 90년대 한국에도 이어져서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으로 포진해 있던 철학계의 풍토가 순식간에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편됐다. 라캉과 데리다, 리오타르 등이 표지에 커다랗게 박힌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발간고, 그 내용이 어렵거나 쉽거나 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책들을 사다 읽었다. 푸코와 들뢰즈는 나란히 주목받았으며, 특히 후자는 90년대 인문학의 필독서를 이루었다.

들뢰즈의 죽음은 또 다른 예언적 신화와도 맞닿으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일련의 '포스트' 철학이 근대 사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절연을 선언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세평이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어느 자리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말했다는 소문, 그리고 '마르크스의 위대함'이라는 저작을 준비 중이었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들뢰즈 사후, 그 유언처럼 들린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발언은 철학사적 해석보다 오히려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는 두 사상가의 사유 방식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라는 기획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고자 했고, 다른 하나는 차이, 생성, 탈영토화라는 개념들로 오래된 존재론의 토대를 넘어서고자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들뢰즈의 연결이 한낱 호사가들의 한담은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에 관한 저작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 혹은 마르크스적 사유와 들뢰즈의 연관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다양한 논의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과 마르크스를 연결지었을까? 단순히 마르크스의 저작을 중요하게 읽었다는 차원을 넘어, 그는 마르크스의 사유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토대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의 자본주의 분석은 단지 정신분석의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 책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욕망의 흐름 개념과 연결시켜서 자본주의를 '욕망을 포획하는 코드 없는 기계'로 재정의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더 이상 경제학자도 혁명가도 아닌, '무의식의 정치경제학자'로서 재정립된다. 가타리와 함께 들뢰즈는 역사유물론의 결정론적 요소를 경계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자율적 운동 곧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확장하는 자본의 논리가 갖는 힘에 주목했다. 특히 노동력의 상품화, 교환의 추상성, 물신주의와 같은 테마는 '기호의 흐름', '기계들의 분절'과 같은 들뢰즈의 개념을 세공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다.

그렇지만 이런 접속이 그저 사변적 논리에 머물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을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이 각자의 자율성을 획득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만나면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중세 이후 상업자본의 성장이 견인한 대규모의 자본 축적, 농노 신분에서 풀려난 중세 인구의 임노동으로의 전환. 이 두 사건적 계기는 우연한 흐름을 통해 합쳐지고, 이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성립했다는 뜻이다. 역사유물론이 지닌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역사적 결합을 인용하면서도, 그 계기와 전개를 필연성의 논리로부터 벗겨내 역사적 우연성에 맡겨 놓는 사유야말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통찰이라 할 만하다.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의 중압에 억눌린 계급이 아니라 억압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주체로, 탈영토화의 흐름 자체로 다시 개념화된다. 마쓰모토 준이치로는 이 같은 관점을 계승하면서, 계급이나 주체의 동일성을 대신해 접속과 운동으로서의 코뮤니즘을 상상하고 있다.

정치적 윤리와 방법으로서의 이웃

마쓰모토 준이치로의 <들뢰즈와 맑스: 이웃의 코뮤니즘>(갈무리, 2025)은 마치 오래된 유언의 회신처럼 도착한 책이다. 들뢰즈가 남긴 마르크스적 사유의 실마리를 마쓰모토는 단순한 사상사적 연결고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들뢰즈와 마르크스를 서로 닮았다거나 상이한 사상가로 위치시키기보다, 둘 사이에 형성된 독특한 이웃지대에 주목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코뮤니즘(commune-ism)은 마르크스주의 전체성이나 들뢰즈적 다중성이라는 두 이질적인 문법이 교차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가능성으로 읽힌다. 이 책은 '들뢰즈와 마르크스'를 병렬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 사이의 접속과 균열, 공명과 간섭 속에서 코뮤니즘이라는 전혀 다른 공동성의 윤곽을 더듬어 나가려는 시도이다.

이 책이 핵심적 개념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웃(近傍)'이다. 각 장에서 주도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이웃을 개념화하여 이해할 수 있는 마르크스-들뢰즈적 사유의 계기들이 등장한다. 마쓰모토가 코뮤니즘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동원하는 이 개념은 단지 친숙하거나 가까운 존재, 또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한편으로 이웃은 동일성에 기초하지 않으며, 공동의 이념이나 정체성으로 환수되지 않는 타자성으로 파악된다. 다른 한편, 이웃은 비가시적인 타자성의 지대로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삶의 조건 '너머'를 가리킨다. 흔히 외부성을 갖지 않는다고 언명되는 현재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이웃은 바로 코뮤니즘이다. 현실의 지평에서 코뮤니즘은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자본을 간섭하고 전복하는 비가시적 힘으로서 항상 작동해 왔다. 따라서 이웃은 들뢰즈의 '생성/되기(becoming)'와도 잇닿은 개념이며,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자 계급'의 우발적 생성, 즉 계급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속에서 정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사유와도 연결된다. 마쓰모토는 이웃의 개념이 지닌 이러한 미묘한 교차점을 포착하여 '이웃의 코뮤니즘'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전략이자 윤리를 세공한다.

코뮤니즘은 더 이상 '생산 수단의 공유'나 '국가의 폐지' 같은 대전제를 따라야 도출되는 거대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몸으로 겪고 있는, 파편화되고 고립된 일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접속의 윤리, 또는 관계 맺음의 감각으로부터 생성하는 잠재성의 차원에 가깝다.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분석했듯이,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조차 포획하는 거대한 기계이며, 이 기계에 저항하는 방법은 다른 욕망과 접속함으로써 자기의 욕망을 낯설게 배치하는 데 있다. 욕망은 절대 불변하는 힘이 아니라 이웃한 조건에 의해 굴절되고 종합하는 힘이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욕망의 다른 용법에 개방돼 있으며, 그에 따라 지금과는 다른 삶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마쓰모토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개념을 탈영토화하고, 들뢰즈의 욕망 정치 개념을 계급투쟁에 재접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너머에서 코뮤니즘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지금, 우리는 익숙하고도 낯선 코뮤니즘을 다시 길어올리기 위해 자신과 타자, 세계의 욕망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예의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책의 중반을 넘어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점은, 마쓰모토가 들뢰즈의 생성/되기와 마르크스의 역사적 주체 형성 개념을 나란히 두면서, 양자의 빈틈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찾아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즉자적 정의를 넘어서 사회 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주체로 자리매김됐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 개념을 재사유하면서, 존재하는 것 일체가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채 '되기'라는 운동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생성/되기의 사유는 프롤레타리아 역시 예외가 아님을 선언하며, 근대적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주체 개념 또한 탈영토화돼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조건 속에서 변화하며, 역사적 주체의 자리를 찾아 나서는 운동의 이름이다. 코뮤니즘은 그런 운동이 발견하고 접속함으로써 창출될 잠재성의 지대, 즉 비가시적인 이웃관계를 가리킨다. 코뮤니즘은 이처럼 새로운 생성에 열려 있는 정치, 즉 무한한 접속 가능성과 이행 및 변이의 윤리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정치철학적 사유는 지금 한국의 지형에도 유효한 문제를 던질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고도화 있는 한국 사회에서 동질적 집단이란 혈연이나 지연 이외에도 이익사회를 말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것은 여전한 전근대적 관계를 함축하거나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와 연계된 채 다른 생성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마쓰모토가 주장하는 '이웃'은 그런 의미의 공동체를 전면적으로 넘어서도록 요구한다. 이웃은 경계와 경계 사이에 머무는 자들이기에 가시화되지 않으며, 때로 그러한 비가시성의 지대 자체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이웃은 현 체제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체제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이중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이 같은 이웃의 모호성은 오히려 정체성 너머의 실존, 계급 없는 계급, 또는 주체성 바깥의 타자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웃의 코뮤니즘'은 정치적 행위로 수행될 것이다.

코뮨과 삶의 정치학

<들뢰즈와 맑스>는 이처럼 하나의 정치철학적 제안이자, 기존의 좌파 사유가 안주했던 도식을 비틀어보려는 사상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마쓰모토는 자본주의 이후를 사유하고, 공동체의 새로운 정의를 구축하며, 현재적 삶의 조건 바깥을 탐색하고자 한다. 그의 질문은 이렇게 요약된다. 친근하고도 틀에 박힌 삶, 그 너머에서 항상-이미 작동해 온 또 다른 삶은 어떻게 지금-여기의 현실이 될 것인가? 이는 단지 철학적 질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고립과 혐오, 파편화에 뒤덮인 채 주어진 일상을 전부라고 체념하듯 받아들인 우리 모두에게 던져질 근본적 물음이다.

코뮤니즘은 더 이상 혁명의 구호가 아니라, 관계의 태도이며 존재의 방식이다. 그것은 확고한 신념이나 운동의 강령이 아니라,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삶과 사유의 경계, 미끄러지는 언어 사이, 불투명한 감정의 동요 속에서 늘 작동하는 잠재적 힘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독자는 거창한 사회 변혁의 기획 대신, 주변의 익숙한 사물과 타인, 세계를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 말 없이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 언뜻언뜻 이상하다는 기분만 남긴 채 잊혀지지만 분명 존재하는 낯선 감각들. 코니즘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언젠가 도래할 공산주의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유령처럼 출몰하는 이웃 지대, 즉 비가시성으로서의 코뮨을 가시화하는 정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뮨을 위한 정치철학적 선언문으로서, 무엇보다도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사유의 실천으로서 이 책은 다시 읽혀야 한다.

▲<들뢰즈와 맑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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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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