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그런 건 남들이나 하는 거야."
16세기 말, 이런 말을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여성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더군다나 그 여성이 한 나라의 임금이라면 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그 시대 모든 통념을 뒤집은 채 45년간 영국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황금시대였다.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헨리 8세(1491-1547)는 실망했다. 또 딸이라니! 아들을 얻으려고 첫 번째 부인과 이혼까지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다. 헨리가 그토록 원했던 아들 에드워드 6세(1537-1553)는 15세에 요절했고, 첫째 딸 메리 1세(1516-1558)는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실망스러운' 둘째 딸이 왕좌에 올라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6번이나 결혼한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어려서부터 '결혼이란 게 꼭 좋은 건 아니구나'를 몸소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어머니 앤 불린(1501-1536)이 아버지 손에 목이 잘린 걸 보면서 말이다. 이런 집안 사정을 보고 자란 아이가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리 없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말의 진짜 뜻
엘리자베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왕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후계자가 없다는 뜻이고, 이는 왕조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끊임없이 결혼을 재촉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교묘하게 피해 다녔다.
"나는 이미 영국과 결혼했다"는 그녀의 명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개인적인 행복보다 국가의 안정을 택했다. 결혼하면 남편이 왕이 되어 자신의 권력을 나누어 가져야 했고, 외국 왕자와 결혼하면 영국이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될 위험도 있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시대 다른 여왕들을 보라.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1542-1587)은 연이은 불행한 결혼으로 결국 목이 잘렸고,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는... 뭐, 결과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종교문제를 '적당히' 해결한 지혜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은 종교분쟁으로 난리였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이혼하려고 가톨릭에서 나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만들었고, 이복 언니 메리 1세는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면서 개신교도들을 불태워 죽였다. 이래저래 백성들은 혼란스러웠다.
엘리자베스의 해결책은 걸작이었다. "종교? 그거 개인 취향 아닌가요?" 그녀는 '엘리자베스 정착'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관용 정책을 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여왕에게 충성하고 법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물론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그 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똑똑한 판단이었다. 종교분쟁에 휘말려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그 힘을 경제발전과 식민지개척인 해외진출에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강도들을 영웅으로 만든 솜씨
엘리자베스 시대의 또 다른 묘수는 해적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 같은 사람들은 사실상 해적이었지만, 여왕은 이들을 '사략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며 스페인 함대를 털도록 방조했다.
"해적질? 그게 아니라 애국사업이야!"
이런 식으로 국가가 공인한 해적질 덕분에 영국은 막대한 부를 얻었고, 동시에 라이벌 스페인을 견제할 수 있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것도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그때는 폭풍도 도와줬지만 말이다.
문화 황금시대의 뒷배
엘리자베스 시대를 빛낸 건 정치적 성취만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1564-1616),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 같은 문학가들이 활약한 것도 이 시기였다. 여왕 자신이 교양 있는 지식인이었고,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보면 엘리자베스의 영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여름 밤의 꿈>의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이나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처럼, 지혜롭고 권위 있는 통치자의 모습은 엘리자베스를 연상시킨다. 물론 직접적으로 여왕을 묘사할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경제발전의 숨은 공신
엘리자베스는 경제정책에서도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 무역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육성했으며, 특히 모직물 수출로 큰 성과를 거뒀다. 당시 영국산 양모와 모직물은 유럽전역에서 인기였다.
또한 동인도회사 같은 무역회사들을 설립해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섰다. 이는 훗날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식민지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여성군주의 한계와 가능성
하지만 엘리자베스도 한계는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의심받아야 했고, 특히 군사적 결정에서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무적함대와의 전투에서도 여왕이 직접 지휘한 게 아니라 부하장군들의 공이 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성군주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힘보다는 지혜로,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외교에서 발휘한 솜씨는 가히 예술적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견제하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스코틀랜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균형 감각이 뛰어났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향
엘리자베스 1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영국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실용주의적 정치문화, 그리고 여성지도자에 대한 상대적 개방성 등은 모두 그녀가 만든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2022) 역시 할머니뻘 되는 이 위대한 선배의 그림자 아래 70년간 군림했다. 두 엘리자베스 모두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왕실의 권위를 지켜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처녀 여왕이 남긴 교훈
결국 엘리자베스 1세의 진짜 '사랑이야기'는 권력과의 로맨스였다. 그녀는 개인적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이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지만, 분명한 건 그 선택 덕분에 영국이 근세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개인적 스캔들로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 500년 전 이 현명한 여왕의 선택이 새삼 빛나 보인다. 물론 그때는 소셜미디어가 없어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여자의 몸을 가졌지만 왕의 마음과 의지를 가졌다"던 엘리자베스 1세. 그녀의 이 말처럼, 진정한 리더십은 성별이나 출신이 아니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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