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한일회담 개최와 한국정부의 교섭 방침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 재개와 한일국교정상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한일 양국은 제6차 한일회담(1961년 10월 10일~1964년 4월 5일)을 재개하기로 한다.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각 의제에 관한 교섭 방침을 작성한다.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저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의 기본 방침'(1961년 7월 12)은 제1안에서부터 제3안까지 문화재 반환 교섭 방침을 정했다. 시기는 1905년으로 동일하고, 반환의 방법은 제1안이 '반환', 제2안과 제3안은 '인도'였다.
반환 대상 문화재와 관련하여 제1안은 불법·부당하게 반출한 모든 문화재, 제2안은 '일본 국유물'과 '일본 사유 문화재 중 일본의 국보 또는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문화재', 제3안은 '일본 국유 문화재 중 한국이 꼭 필요한 문화재 약 1,000점', '일본 사유 문화재 중 일본의 국보 또는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문화재 80점'이었다. 이와 함께 양국의 전문가들의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문화재 목록을 작성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제6차 한일회담의 진행 방법'(1961년 10월 17일)은 '문화재 반환의 7항목' 논의와 회의 진행 방법을 정하고 있다. 이 방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본 위원회에 일본 문부성 관계관을 정식 대표로서 참석시킬 것을 일본 측에 요구하고, 만일 일본 측이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와 같은 전문가회의를 개최하도록 하되, 동 전문가회의를 위원회에서 공식회의로 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가들의 논의에 권한을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반환받을 문화재 목록을 작성하려는 의도였다.
이와 같이 한국정부는 상당한 수의 문화재를 '반환'받는 제1안에서부터 약 1,080점의 문화재를 '인도'받는 제3안까지 다양한 방침을 세우면서 제6차 한일회담을 준비했다.
'문화재 반환의 7항목' 논의
한일 양국은 문화재소위원회와 전문가회의에서 '문화재 반환의 7항목'을 중심으로 문화재 반환 교섭을 진행한다. 제2회 문화재소위원회(11월 7일)에서 한국 측은 제1항목부터 제3항목에 해당하는 문화재를 반환할 것, 제2항목 관련 목록을 제출할 것,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미술품 등을 반환할 것을 요청했다.
제3회 문화재소위원회(11월 15일)에서 한국 측은 제4항목과 관련하여 1905년부터 1915년 사이 일본인들이 고분을 도굴했고, 일본인들이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일대에서 발굴한 삼국시대의 유물은 도쿄국립박물관과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제5항목에 대해 개성 일대의 수많은 고려 고분에서 고려자기가 도난되어 일본으로 반출됐다고 지적했다.
제4회 문화재소위원회(12월 5일)에서는 제6항목, 제7항목, 체신 관계 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한국 측은 제6항목에 대해 통감부 시기 이후 조선왕조실록, 데라우치 문고 등 여러 고서적들이 불법적으로 반출됐다고 지적했다. 제7항목에 대해서는 오구라 다케노스케를 예를 들며 개인 소유 문화재에 대한 반출 경위 등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우편 업무를 알 수 있는 체신 관계 문화재는 한국에는 없으므로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전문가회의도 여섯 차례 개최됐다. 한일 양국은 '석굴암 불상과 소석탑', '불국사 다보탑 사자상', '오구라 컬렉션', '지도원판', '체신 관계 문화재', '이치다 컬렉션', '통감부 전적', '가와이 문고', '소네 통감 전적', '데라우치 문고' 등의 반출 경위와 현소재지 등을 논의했고, 이에 대한 일본 측 조사 결과를 확인했다.
특별위원회 설치 논의와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주일대표부는 1961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진행된 교섭 상황을 토대로 '회담 운영 방안 건의'(1962년 1월 25일)라는 교섭 방침을 작성한다.
이 방침에서 문화재 반환 교섭과 관련해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특별위원회' 설치다. 한국 측이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려고 했던 이유는 권한이 부여된 전문가들이 특별위원회에 참가하여 문화재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측은 그때까지 문화재 반환 교섭의 공적 효력이 있는 문화재소위원회에 전문가를 참가시키거나, 전문가회의에 공적 효력을 부여할 것을 일본 측에 요구했었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전문가들이 문화재소위원회에 불참했고, 전문가회의에 공적 효력을 부여하는 일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한국 측은 문화재소위원회와 전문가회의의 성격을 모두 가진 특별위원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문화재 목록을 실질적으로 논의하면서 반환받을 문화재 목록을 작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문화재소위원회 대표 간 비공식회의(1962년 2월 1일)에서 일본 측은 다음과 같이 문화재 반환 문제 해결 방침을 제시했다.
"일본 측은 일한국교정상화 시에 양국의 학술・문화협력의 일환으로 권리・의무 관계에서 벗어나 국유의 한국 문화재 중 적당한 것을 한국 측에 넘기기로 하며, 또한 민간에게도 권하여 이것이 한국 땅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기로 한다. 이것이 가장 타당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한국 측이 이 기본적인 해결 방침을 양해해 준다면, 이를 문부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에 전달하고 향후 본 문제에 대해 그들의 협력을 얻기가 용이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개인 소유 문화재를 언급한 것이다. 일본 측은 그때까지 개인 소유 문화재는 돌려줄 수 없다고 설명해 왔지만, 이 방침에서는 개인 소유 문화재도 '한국 땅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는 일본 측의 문화재 반환 문제에 관한 입장이 이전보다 유연화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과거에 이미 반환・기증에 관한 문제는 논의가 된 것이며 (return) (donation) 또는 (turn over)라는 말이 나왔던 것으로 실상 이와 같은 문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줄로 믿는다."
이는 한국 측이 '반환'과 '기증'의 문제에서 '반환'을 고집하지 않고 '인도'도 괜찮다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언급 것이다. 이와 같은 발언은 앞에서 살펴본 한국정부의 문화재 반환 교섭 관련 방침을 토대로 나온 것이다.
한편 일본 측이 특별위원회 개최에 동의하면서 한국 측의 계획대로 문화재 반환 교섭이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제6회 문화재소위원회(2월 16일)에서 한국 측이 제출할 문화재 목록을 검토한 후에 특별위원회 참가를 결정하겠다는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의견을 설명하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한국 측은 문화재 목록을 먼저 제출하지 말라는 방침을 변경하여 제7회 문화재소위원회(2월 28일)에서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을 제출하고 각 항목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일본 측은 이 목록을 참고자료로 수령하고 다음 회의부터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전문가가 참가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교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일본 측을 만찬회에 초대한다. 그러나 문화재보호위원의 전문가들을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을 검토한 후 만찬회 참가를 거절했다. 한국 측은 외무성의 알선을 통해 문화재보호위원회 전문가들과 비공식적으로 만날 시도를 했지만 외무성이 이를 거절했다. 또한 이홍직 수석위원이 전문가회의에서 알게 된 문화재보호위원회 전문가를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성과가 없었다.
제6차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 회담에서 큰 대립이 발생했던 '반환'과 '기증' 문제에 대해 '반환'을 고집하지 않는 자세를 취했고, 공적효력이 부여된 특별위원회를 개최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측도 권리·의무 관계에서 벗어나 문화협력의 일환으로 일본정부가 소유한 국유 문화재를 건네고, 개인 소유 문화재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와 같이 한일 양국은 기존 입장에 비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문화재 반환의 7항목'도 구체적으로 논의하면서 문화재 반환 교섭을 진전시켰다.
■ 참고문헌
한국정부 및 日本政府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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